-일본 마이니찌 신문, 1919월 11월 28일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정부는 조선인의 자유와 평등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조선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조선독립운동의 주창자 여운형 입경 (신문기사내용)
-그것은 일제의 심장부에서 얻어낸 여운형의 승리이자 상해임시정부의 승리였다.
여운형이 돌아간 뒤 이듬해 일본제국의회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3.1운동의 중심점에 있던 인물이 일본을 뒤흔든 사건에 대한 책임공방이었다.
*일본제국의회 중의원 의사록 (1920. 2)
다카하시의원
: 여운형은 작년(1919) 3월폭동에 이르기까지 조선내지의 폭동자와 연락을 했고...
-이 과정에서 여운형이 3.1운동의 핵심인물임이 한번 더 드러났다.
당시 하라케 내각은 여운형회유공작실패의 책임을 져야 했고 결국 제국의회 중의원은 해산된다.
강덕상 / 재일한국역사자료관 조사위원장
그래서 (하라수상은) 궁지에 몰리자 그는 여러 가지 공작을 하여 이를 완화시키려고 했지만 반대파가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그럼 해산하자’ 그러한 의미에서 여운형국회라고 합니다.
*독립신문 상해임시정부발행
(1920년 1월 17일)
임시정부역시 이러한 그의 활약을 독립운동사상 유례없는 성과로 보면서 여운형은 독립운동의 주요인물로 자리잡는다.
이후 여운형의 행보또한 인상적인 것이었다.
모스크바에선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독립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고, 중국에선 손문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는 한편 국.공합작에 참여해 공산당을 도운 인물, 이념과 국경을 넘나드는 그의 행보는 조선독립을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1929년 7월 여운형은 상해에서 일제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3년행을 받았다.
비록 수인의 몸이었지만 여운형의 귀국은 그와 민족의 운명을 바꿨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입구 (조선중앙일보 옛 자리) 일제시대의 양식이 잘 보존된 2층 건물이 있다.
이곳은 일제때 조선중앙일보사건물이 있던 자리였다.
출옥후 여운형이 선택한 행보는 뜻밖에도 신문사사장이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속에서 언론사사장이라는 직위를 충분히 활용한다.
취임 이듬해 상해의 김구와 연락해 당시까지 국내에 있던 어머니와 아들이 상해로 탈출하도록 도움을 준 것이 여운형이었다.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한다.
당시 조선청년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사진을 개재한 것 역시 여운형이 사장을 맡고 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인해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신문도 폐간된다.
퇴임후 그가 머문 서울 계동집이다.
당시 여운형은 일제의 보호관찰대상 1호 였지만 그의 집에는 조국을 걱정하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여운형역시 청년들에게 연설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는 식민지조선청년들에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