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기도로 세운 나라 (누가복음 17:1-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어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시니라.
기도로 세워진 나라~ 너무나 듣기 좋다. 이왕이면 기도로 집집마다 기도로 세워진 집이라 하였으면 좋겠다. 어젯날 까지는 기도로 세워진 나라였다. 그래서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하여 정체된지 21개월이 되어온다. 문 닫아버린 교회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또한 떠나간 교인의 수도 헤아릴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로 세웠다면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가?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럴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특히 나의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끈질긴 과부와 같은 기도가 없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이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자 그 분,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날이면 심판이 있겠다는 생각이 더 두렵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기도로 나라를 세우지 말고 각자가 자기를 기도로 세웠으면 좋겠다. 자기부터 세워나가는 것이 오늘 날 현실을 보면서 느낀 것이다. 나라를 위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 성전된 몸인 자기 자신부터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껍데기뿐인 기독교인이 왜 필요한가? 어차피 심판은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이왕이면 몸과 마음과 뜻이 하나님과 일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각 사람이 주님의 뜻인 십자가의 사랑으로 일치로 살아가려고 기도하고 애쓴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나라를,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도 과부의 끈질긴 기도를 묵상하게 해주신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1. 선민의 글자(1) - 훈민정음 (신명기 9:9-10)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야를 산에 거하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네게 주셨나니 그 판의 글은 하나님이 친수(親手)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마음에 새겨라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다. 나는 늘 이 마음으로 살려고 애를 쓴다. 학교의 강의나 예배에서나 집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나 늘 마음판에 새기기를 원한다.
특히 가정예배를 볼때에도 가슴판에 새기라고 설교를 한다. 그렇다. 머리에 새기지 말고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 물론 내 힘으로는 안된다. 그래서 성령하나님을 우리 주님께서 보내주셨다는 것이 아닌가? 그 성령하나님께 의지한다. 주의 모든 말씀 나의 마음판에 새기기 해달라고 기도한다. 행1:8절에 말씀처럼 각 나라언어와 방언으로 말하고 싶다. 이 또한 마음판에 새김이 없다면 소리나는 괭과리이다.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판에 새기고 행함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사도도 말씀하였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다고 말이다. 머리에 지식이나 가득하고 각 나라언어를 할지라도 진실로 진실로 하나님의 원하시는바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지식으로 능으로 힘으로 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가는 곳이다. 소리나는 괭과리가 되지 말자.
42. 선민의 글자(2): 한자(漢字/韓字) (고린도전서 14:10-12)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눈에 보이는 분으로 나타나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마치 우리가 말하려는 것을 글자로 쓴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추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글자로 나타난 성경을 통하여 만나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요 5:39)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 눈이 열려서 한자의 글자 하나하나 속에 나타난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나아가 그 글자 하나하나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아가 모든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글자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 뜻 없는 소리가 없고, 뜻 없는 글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깨달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입니다. 나의 눈이 열려서 글자속에 나타나시어 나를 만나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오늘도 만나기를 원합니다. 아멘!!!
43. 솔롱고스의 민족 (창세기 37:1-4)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비가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인간의 시기와 다툼은 언제나 있었다. 에덴에서부터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 인간의 불평은 계속된다. 이 또한 가진자일수록 더 심하다는 것이다. 편견도 심하다. 이 또한 계속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의 제한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또한 피조물임을 스스로 시인하고 있다. 이 또한 똑 같이 지음을 받았음을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인간, 이러한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심판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약속하셨다. 무엇으로? 무지개로 약속하셨다. 그렇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이며 말씀이시다. 말씀이신 무지개는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심판 할수도 있고 구원할수도 있다.” 코로나는 두려움은 것을 낳았다. 서로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다. 교회를 떠나게 하였다. 모임을 페하게 하였다. 모든 시스템의 가동을 멈추게 하였다. 모든 질서를 흐트러 놓았다. 세상의 틀에 맞추어 놓았다. 사람들은 세상의 틀에 자신들을 끼운다. 끼우고 열심히 좆아간다. 이제는 담임목사님 설교보다 유트브에 인기있는 목사님 설교가 감동이 있고 깊음이 있다고 한다. 좋은 것이다. 부담이 많이 줄어든 것이다. 헌금할 일이 줄어들었다. 교회의 시스템에 자신을 끼워놓을 필요가 없이 한가한 시간들이 많아진 것이다. 노아 홍수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장가갔다. 술을 마셨다. 수다의 시간들이 있었다. 우리가 한가하면 마귀가 가장 좋아한다.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마귀가 손벽을 치며 좋아한다. 그들의 원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약속의 무지개를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속고 있다. 유트브에 속고, 자신에게 속고 세상의 코로나에 속고 속고 속고 있다. 하나님이 두렵다. 나 자신도 속고 있다. 깨어 기도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