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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연 비교민주주의세미나 발표문>
전환점에 선 한미관계
■ 발표 : 김준형 (한동대) “미국은 우리에게 또 세계에 무엇인가?”
찰스 암스트롱 (콜럼비아대) “한미관계의 새로운 접근” (원고미도착)
■ 토론 : 박건영 (가톨릭대) 박명림 (연세대) 김연철 (고려대)
■ 사회 : 최장집 (연구소장)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은 우리에게,
또 세계에 무엇인가?
김준형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조교수
Ⅰ. 미국과 9․11
이 글의 주제는 이라크전쟁이후 세계와 우리 한반도에 대해 미국이 가지는 함의이지만, 이라크 전쟁은 9․11 사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논의는 여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세계 유일의 패권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과 워싱턴에 민간항공기를 사용한 테러참사가 일어났고, 벌써 2년이 지나갔음에도 당시의 충격은 생생하게 남아있다.1) 이는 의외성으로 인한 충격의 잔영 탓도 있지만 세계 질서가 이 날을 계기로 큰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단일한 사건 하나로 완전히 딴 세상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세계는 일정부분 9. 11 사건의 그늘아래 살고 있다. 냉전과 탈냉전의 이분법은 물론 전통적인 안보개념도 무색해졌고, 전쟁은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세워진 국가끼리 충돌하는 것이라던 틸리(Tilly)의 가설도 설득력을 잃었다.2) 반면에 수평적인 비교로는 군사능력이 상대가 되지 않지만 힘이 약한 쪽에서 강한 쪽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비대칭 전략(asymmetric strategy)의 중요성이 새로 부상했다.
무엇보다도 9․11은 당사자인 미국인들에게 두 가지 점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하나는 미국의 힘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전통적인 이념과 관련된 것이다. 전자는 구 소련이 사라진 자리에,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패권이 무방비 상태에서 그것도 안방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는 점이다. 전 세계를 범위로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초강대국이 고작 수십 명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한순간에 무력해져버렸다. 혹자는 테러리스트들이 의도적으로 세계최고의 경제력의 상징인 뉴욕의 무역센터빌딩과 세계최고의 군사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워싱턴의 국방성을 대상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강하고 안전하다고 느낀 시점에서 가장 심각한 안보불안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2차 대전 이후 반세기를 넘게 지배하던 미소의 양극구조가 종언을 고하고 탈냉전이라는 이름표를 붙인지도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냉전과 탈냉전의 이분법을 다시 혼란에 빠트리고 말았다.
미국인들에게 준 두 번째의 충격은 미국의 전통적인 이념의 측면이다. 미국은 국가의 태생부터 특별한 도덕적, 이념적 우월성에 입각해서 국가를 건설해왔다. 특히 미국이 지금까지 이룩해 온 민주주의와 자유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는 모든 국가가 지향하고 있고, 또 지속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라고 믿고 있었다. 미국의 이념적 성향은 적어도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 하나이다. 미국이 종종 내세우는 다원주의는 국내정치에만 한정되는 것으로 국제정치에서 미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단일한 이념적인 성향을 가져 왔고, 그 이념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든지 간에 중심은 국가주의에 입각한 우월성으로 수렴된다(Crabb, Jr. 1982, 1-2). 그래서 미국의 정치가들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 역시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국가라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는 쉽게 발견된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도전자의 붕괴로 정당성은 배가된 상태였다. 더 이상 다른 이념의 도전은 이제 없으므로 인류의 이념경쟁의 역사는 종결되었다는 후쿠야마의 결론은 이런 정서를 극적으로 대변한다(Fukuyama 1992). 그러나 9․11 사태는 이를 뒤엎는 충격을 주었고, 탈냉전의 도래는 곧 미국적 이념의 승리라는 결론에 찬물을 끼얹었다. 더욱이 빈 라덴이 9․11 테러가 난 뒤 발표한 성명에서 미국의 위선과 도덕적 타락을 통렬하게 지적한 것이나, 국내외적으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이 그동안의 미국의 우월주의와 대외정책의 실패에 대한 비판은 미국인들이 거부하고는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픈 지적이 되고 있다.
정책결정자들은 이런 두 가지 문제를 깊이 있게 진단하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식으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이 선택한 것은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인 힘의 과시와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악마화 작업이었다. 전자는 미국이 90년대의 걸프전쟁과 코소보전쟁에서 소위 첨단전쟁을 통하여 쌓은 자신감과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고, 두 번째 역시 민간인에 대한 민간항공기를 무기로 살상을 감행한 엄청난 살육의 비정당성 앞에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동안 미국과 적대적이었던 국가들과 미국의 일방주의 대외정책에 비판적이었던 국가까지 모두가 테러리즘에 대한 공동전선에 동참하였다. 부시행정부의 기독교 근본주의에 의한 극우적 성향 역시 이런 경향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흔들리던 미국의 대외정책이 9․11을 계기로 확실한 방향을 잡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 정책결정자들사이에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었던 공산주의자라는 용어가 이제 테러리스트나 악의 축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강력한 효과를 주었던 이런 힘의 논리의 부활은 국제질서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고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미국 스스로가 국가주의와 초국가주의의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Ⅱ. 미국과 탈냉전, 그리고 세계
조금 단순화시킨다면 오늘날 미국의 패권은 2차대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200년 이상 성공신화를 꾸준히 지속해왔지만, 미국이 세계전면에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패권국가로 등극한 것은 2차대전의 종전이후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멸망의 문턱에서 구한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해방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폐허가 되어버린 이들 지역을 복구할 유일한 대안이었다. 어느 면으로도 경쟁상대가 전무했고, 전쟁 직후 세계 생산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던 경제력은 막강한 군사력과 결합하여 전후질서를 마음대로 금긋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절대적 위치는 자신의 동맹체제 밖으로부터는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이념의 도전을 받았고, 동맹블록의 내부에서는 일본과 유럽의 빠른 회복으로 인해 초기의 절대적인 위치는 아무래도 시간이 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일단이 바로 1970년대 미국의 침체론과 소련과의 데탕트전략의 등장이었다.
이렇게 2차 대전 직후 미국의 절대적인 아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침식되어 가는 구도가 꾸준히 지속되었지만, 그 침식이 70년대의 예상처럼 빨리 진행이 되지 않았던 것은 길핀(Gilpin)의 설명처럼 상대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패권의 유지를 연장시키거나 상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Gilpin 1987). 이와 더불어 적대국인 소련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즉, 미국의 상대적 우위의 격차가 점점 작아짐에도 불구하고 적대국 소련으로 인한 반사이익으로 패권하락을 상당 기간 유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소련의 붕괴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고, 소련에 대한 적대정책은 유지하되 1945년 2월의 얄타에서 나눠진 세력권 인정이라는 암묵적 동의와 결합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냉전을 지탱하던 한 축이 스스로 무너지게 되었고, 다른 한 축인 미국은 독점의 지위를 큰 비용 없이 차지하게 되었다. 일단은 적대적 대결의 시대가 끝나고 전임 대통령 부시가 ‘새로운 세계질서’라고 천명했듯이 모두에게 평화를 상징하는 시기로 출발했다. 미국은 냉전 50년의 최후승리자로, 또 이런 평화의 시기에서 유일한 패권국가로서 질서를 유지할 임무를 대내외적으로 요구받았다. 하지만 초기의 장밋빛 기대와는 달리 인류에게 탈냉전의 도래는 평화를 가져다 주기 보다는 오히려 세계의 곳곳에서 분쟁과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는 어떤 면에서 역설적으로 질서정연했던 냉전의 잘 짜여진 시스템이 약화되면서 문제는 복잡해졌고, 해결은 점점 어려워지는 양상을 보였다(스틸 1995, 30-32). 냉전시대에는 이데올로기의 대결과 미소가 보유한 가공할 핵무기의 대치라는 엄청난 변수로 인해 민족, 종교, 국가가 독립변수가 되지 못한 반면 탈냉전의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갈등의 공백을 인종과 민족적 갈등의 요소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국가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국내외의 폭력에 대한 억제력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할 만한 주도적 행위자도 시스템도 없는 과도기적 공백의 상황이 상당기간 계속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새 시대에 맞는 전략구축을 위한 미국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클린턴 행정부 8년 간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탈냉전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안보전략을 마련하는 기간이었다. 특히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연착륙을 해감에 따라 미국의 대외정책은 “예방방위(preventive defense)”로 수렴되는 듯했다. 이는 냉전전략의 핵심인 억지(deterrence)의 개념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억지는 직접적인 ‘위협(threat)’에 대한 안보전략이라면, 예방방위는 보다 포괄적인 ‘위험(danger)’에 대한 대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병의 예방을 위해 백신을 맞는 것처럼, 위험이 위협으로 발전하기 전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예방방위는 우선 미국의 안보에 대한 탈냉전기의 다양한 위험의 종류를 범주화하고, 위험의 정도에 따라 A, B, C 리스트로 나누었다. A리스트는 안보에 가장 심각하고 결정적인 위험으로 당장에 군사적 조치가 필요한, 냉전시대의 적대국가인 소련의 위협에 준하는 수준을 말한다. B리스트는 미국의 생존을 직접 위협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이익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과 상황전개에 따라 위협으로 발전할 수 있는 수준이다. 마지막으로 C리스트는 미국의 안보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도의 위험을 말한다. 클린턴 행정부는 A리스트는 적대국의 부재로 공백상태로 판단했고, B리스트는 북한을 포함한 동아시아와 중동을 꼽았으며, C리스트는 코소보, 소말리아, 르완다, 체첸, 티벳, 동티모르 같은 원거리 분쟁지역을 포함시켰다(Carter and Perry 1999, 11-12).
미국의 90년대 대외정책의 근간은 바로 이들 B와 C리스트의 위험이 A리스트의 위협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그 방법이 개입과 확산의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2차 대전 직후에 미국이 1차 대전 이후 제대로 전후질서를 수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재발되었던 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마샬플랜을 통해 유럽에서 새로운 위협으로 키우지 않았다는 것에 착안하고 있다. 따라서 개입정책의 초반부에는 포용정책이라고 불릴 정도로 협상이나 경제적 지원 등을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을 돕거나 북한과의 협상위주의 전략 등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반드시 개입정책이 당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 필요하다면, 특히 B와 C리스트 중에서도 미국이 판단하여 위협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군사력을 동원하는, 즉 채찍을 사용하였다. 대표적 케이스가 걸프전쟁과 코소보에서의 군사개입이었다.
미식 축구게임에 사용되는 전략 중에도 이 예방방위라는 용어가 있는데, 탈냉전 미국의 전략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작전을 사용하는 경우는 게임 후반부에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는 팀에서 나온다. 미식축구의 공격에는 패싱과 러닝의 두 가지가 있는데, 지고 있는 팀에서는 러닝공격이 시간을 많이 소모하므로 주로 패싱, 특히 긴 패스로 짧은 시간에 점수를 많이 내려는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기고 있는 팀은 수비를 공격과 수비라인이 마주하고 있는 중앙에서의 수비는 느슨하게 하는 대신 운동장 전체를 커버하면서 롱패스에 대한 수비에 치중하는 전략이다. 이는 미국의 탈냉전 이후 예방방어의 핵심적인 부분과 유사한데, 즉 냉전시기와는 달리 위협에 대처하는 고강도의 수비전략에서 벗어나 저강도로 그러나 전 세계를 모두 커버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첨단무기와 공군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타격대가 필수적이다. 미사일방어시스템 MD도 그런 맥락에서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미국의 전략변화는 일견 상당히 합리적이고 방어적이며, 또한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정치환경을 적절하게 감안한 전략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선 미국이 일방적으로 인식하는 대로 모든 안보 위협이 결정되고, 대응방식 역시 정해져 버린다. 그리고 철저히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안보질서라는 점 외에, 이는 전혀 냉전의 틀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선상에 있는 전략이다. 이는 미국 스스로 2차 대전 종전 직후의 마샬플랜을 재현한다고 밝혔던 것에서도 드러나지만, 위협의 부재상황에서 위험을 관리한다는 것은 위협의 일시적 공백일 뿐 결국은 모든 전략의 초점이 A리스트에 맞추어져 있다.
부시행정부의 출발과 9․11 사태는 확실하게 이 정책의 본질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A리스트의 공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A리스트가 채워졌다는 이상이다. 즉 냉전의 억지전략과 탈냉전의 예방방위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의미가 된 것이다. 미국이 테러리즘과 악의 축을 더 이상 위험이 아니라 실제적인 위협이라고 인식해버린 것이다. 알랭 족스(Alain Joxe)의 결론처럼 부시 정권은 무질서를 이용한 제국의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에 버금가는 범세계적 위협을 의도적으로 창조했는지도 모른다(Joxe 2002). 이렇게 미국 스스로가 탈냉전의 모호한 안보인식에서 벗어나 간단명료한 냉전적 안보인식으로 돌아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초기에 다자주의와 일방주의 사이를 오가던 이중전략을 버리고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일방주의에 의한 제국의 게임을 한다는 점일 것이다. 클린턴은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적을 상정했으나, 부시는 영구적인 처벌의 선택만 있는 적들로 규정했다. 클린턴은 미국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는 일방주의로 그리고 그 외의 문제는 다자주의를 이용해서 미국의 부담을 경감하려했지만, 부시는 세계 전체를 직접 그리고 의도대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제 자신들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믿지 않게 된 것이다.
이는 9․11 사건 전후로 미국이 국제적인 다자협력의 움직임에 완전히 상반되는 행보를 보여온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교토협약과 지뢰금지조약이나 생물학 및 독극물 무기 금지조약 같은 일련의 국제협력을 반대하였다. 또한 1973년 소련과 맺었던 ABM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으며, 국제형사재판소의 설치를 반대하였다. 국제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 부친 이라크 전쟁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프레스토비츠(Prestowitz)의 지적처럼 미국이 자신들의 일방주의와 패권주의적 대외정책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표적으로 제시한 깡패국가는 바로 미국 자신일지도 모른다(Prestowitz 2003).
Ⅲ. 미국과 이라크 전쟁
9․11 사태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단순한 분노의 수준을 넘어 미국인들이 오늘과 미래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연결되었다. 국제정치적인 면에서 본다면 국가주의적 관점인 현실주의나 초국가주의적 관점을 가진 자유주의의 어느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제3의 안보영역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오만과 패권의 관성은 9․11 사태가 일어난 원인이나 탈냉전의 복잡한 함의를 추적하고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냉전논리로 돌아감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국민들은 처음에는 당혹함에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어디에 숨어야 할지 몰랐지만 간단명료한 논리로 다가온 부시행정부의 이분법을 일단 지지하였다. 따라서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은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런 귀결이며 미국의 안보전략을 재정비하게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는 전쟁의 명분이었던 테러와의 연계도 밝히지 못하고, 대량살상무기도 찾아내지 못했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미국의 전쟁 결정에 70~80% 대의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이라크 침공의 작전명이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라는 것은 미국이 받은 테러를 그대로 되 갚는 복수의 상징으로는 너무나 적절한 표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사람들은 국가주의로 회귀함으로써 옛 영광의 그늘로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탈냉전과 초국가적 질서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 테러리즘에 대한 부시행정부의 국가주의적 대응방식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목표물을 넘나드는 엇박자 같은 것이었다. 이런 이중성은 시간이 갈수록 미국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바로 이런 미국의 처지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초국가적 단체인 국제테러리즘에 의해 공격대상이 되었으나, 미국은 개별국가로서 대응했고, 그것이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정당성은 역시 테러에 대한 응징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라는 초국가성을 동시에 표방하였다. 따라서 전쟁 수행과 결말에 국제협력을 무시한 일방주의적 행태는 물론이고,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민간인들의 희생이 증가하면서 미국의 정당성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아프간 전쟁은 그래도 이런 비난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이유는 9․11 테러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탈레반 정권이 빈 라덴에 대한 비호세력을 자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쟁 역시 30년 간의 오랜 전쟁으로 제대로 된 무기 하나 갖추지 못하고, 폭격할 만한 시설물 하나 없는 폐허를 상대로 세계 최강의 국가가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였다는 사실은 점점 미국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발생한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초국가적 목표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추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9․11 이후부터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테러의 근본적인 원인과 해결점을 모색하기는커녕 처음부터 보복공격의 대상과 적당한 시간을 찾기에만 혈안이 되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지적처럼 1991년 걸프전쟁에서의 자신감과 탈냉전 10년 동안의 독주로 인한 오만이기도 하지만 부시행정부의 성격상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이라크 전쟁은 시작부터 미국의 일방주의에 의해 함몰되고 말았다. 국제여론과 국제연합의 통일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의 수행방식 역시 미국이 말하는 평화를 위한 싸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9․11 직후에 테러리즘, 즉 보이지 않는 적과의 모호한 싸움을 선언했을 때는 국내외에 수많은 동조자가 많았으나, 아프간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은 더 이상 모호한 전쟁이―더 정확하게 침략―아니라 주체도 분명한 실제적인 전쟁이었다. 따라서 수십만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킨 전쟁의 참상에 대한 책임은 모두 미국이 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인종청소를 중단시킨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유고에서의 개입이 인종청소를 더욱 증폭시키고, 인종청소의 책임이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살상은 그 초기의 명분자체를 퇴색시킨 것 이상이었다. 거기에다가 미국의 일관성 없는 개입의 전례들로 인해 신뢰성은 더 떨어진다. 예를 들면, 미국이 인도적 개입의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르완다. 소말리아, 동티모르, 티벳에서는 개입은커녕 어떤 국제적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Gill 1999, 70).
이라크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후에도 전쟁의 원인이라고 말했던 테러리즘과의 연계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 미국은 세계적 비난여론에 직면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이 이들 전쟁을 통해서 원래 목적했던 테러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했는가 하는 것은 더욱 확신하기 어렵다. 테러의 가능성은 여전하고, 오히려 일부 진보진영에서 꾸준히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미국의 대량보복을 유도하여 전 세계의 반미세력을 결집시키고자 하는 원래 테러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민족주의가 물론 미국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나라의 국민들이 모두 종종 국수주의적이고 또 자주 애국적이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적 영향력은 이런 평균적 민족주의 성향을 한층 강화시키고 일방적인 것으로 만든다. 국가를 넘어서는 지역 또는 세계라는 이름으로 정체성을 잡는 것보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잡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더 자유롭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으로 더 큰 우월감과 애국심을 느낀다. 그러나 다시 한번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미국은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민족국가이지만, 동시에 여러모로 웨스트팔리아적 민족국가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이는 무력의 절대적인 우위만이 아니라, 미국 스스로의 이념과 행태가 초국가적 정체성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미국이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질 수 없는 이유가 생긴다. 미국은 자기 이익을 위해 개별국가의 특성을 보이고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익을 쟁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은 항상 그 행동을 세계의 질서를 창조하고 관장하는 초국가적 행위자로서의 역할로 포장한다. 이를 가리켜 존 러기(John Ruggie)는 역사상 존재했던 다른 패권과 미국의 헤게모니를 구별하는 독특한 특징이라고 했다. 즉 모든 헤게모니는 같지 않으며 미국의 헤게모니는 미국 특유의 정치적 경제적 신념을 반영함으로써 패권이 초국가주의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다는 것이다(Ruggie 1993, 25).
미국은 국가로서의 이익도 포기할 수 없고, 그렇다고 초국가적인 리더로서의 역할도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모순적인 두 정체성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은 미국이 제국으로 군림하는 것뿐이다. 제국만이 개별국가의 이익과 초국가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9․11은 미국에게 제국이 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고, 이라크 전쟁은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미국은 소련의 붕괴 이후 제국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모색해왔다면 이제 이라크 전쟁과 더불어 제국으로 공개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나섰다고 봐야 할 것이다. 웨스트팔리아적 민족 국가는 후퇴하고 있는데, 그 뒤에는 미국이라는 초국가적 제국이 우뚝 서 있다.3)
Ⅳ. 미국과 우리
냉전기간 미국의 가장 기본적인 전략이었던 봉쇄정책은 양날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소련의 팽창을 봉쇄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자주 간과하고 있는 봉쇄의 또 다른 측면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중남미에서 미국주도의 패권적 정치경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동맹블록내부의 잠재적 경쟁자와 이탈자들을 봉쇄한다는 측면이다(클라크 1997, 211-212). 특히 동북아에서는 이런 미국의 의도가 가장 선명하게 자리잡아 왔다. 이를 위해 일본, 대만, 남한은 거의 군사적으로는 준주권 국가의 지위를 가지고, 경제적으로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질서로 편입된 다음, 미국이 일본을 통제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커밍스 2002, 47).
이런 강력한 동맹구조는 탈냉전의 도래에도 변화가 없었다. 독일은 냉전구조의 변화가 통일로 이어졌지만 한반도는 그대로이다. 동북아에 냉전의 대결구조가 여전히 지속되었던 것은 물론 다른 원인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구조적 차이에 기인한다. 동서독이나 한반도의 분열구조는 2개의 외부적 힘과 2개의 내부적인 힘의 모두 4가지 축에 의해 만들어 졌다. 외부의 두 힘은 동서대결구조를 이루는 미소의 축이며, 내부의 두 힘은 독일에서는 동서독의 축과,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의 대결의 축이다. 외형상 동일한 구조를 가진 듯이 보이는 두 지역 간의 차이는 사실 처음부터 차이가 있었다. 동서독의 경우에는 미소의 축은 강한 반면, 동서독의 각 체제의 분열구조는 비교적 약했다. 2차대전 후 연합군의 전쟁처리 과정에 의해 분단이 되긴 했지만 서로가 심각하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데탕트이후에는 미소의 원심력이 약화되는 것과 더불어, 동서독간의 교류증대로 내부의 축이 더 약해졌다. 이런 구조에서 1980년대 말 외부의 한 축이 완전히 붕괴되자 두 체제를 갈라놓은 구조가 함께 사라졌다. 물론 미국의 원심력은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한 축의 힘으로 분리구조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에, 한반도는 처음부터 내, 외부의 4개축이 모두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구조다. 우선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남북체제의 분열구조를 강력하게 구축시켜 놓았고, 전쟁이후에도 남북한의 독재정권들은 정통성의 부재를 상대방에 대한 적대정책으로 상쇄하려 했기 때문에 미소의 냉전구조를 오히려 증폭시켜 왔다(Kim 1998, 282-283). 물론 80년대 말 남한이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민주화를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약화시켰으나, 동맹질서의 하부구조로서의 남한은 미국의 막강한 범위에 의해 함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서독처럼 실제적인 변수가 되지는 못했다. 이런 경향은 탈냉전의 도래와 더불어 그대로 드러났다. 소련이라는 축이 사라졌고 남한의 적대정책 역시 약화되었으나 나머지 북한과 미국의 축은 오히려 강화되어 서로를 밀어내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의 전체적인 구조변화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를 탈냉전시대에 냉전을 살고 있는 냉전의 섬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다(이종석 1998, 11). 냉전구조의 붕괴가 상호협상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 축의 자멸로 이루어짐으로써 탈냉전은 냉전을 완전히 털어 내는 데 실패했고(김명섭 2002, 236), 이에 대한 가장 큰 피해는 한반도이다.
이렇게 보면 동북아를 포함한 미국의 최근의 대외정책은 냉전구조의 재생산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동북아는 이런 구조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냉전기간에도 그랬듯이 시범케이스로 기능하고 있다. 지난 50년 이상 분단상태로 잠재적인 전쟁의 폭발력을 항상 지녀 온 한반도는 확실히 미국이나 남북한 당사자에게 모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분단논리의 허점이 있다하더라도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해 온 것도 어느 정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억제 기능의 이면에는 역설적으로 어떤 형태의 현상타파도 거부하는 강력한 현상유지의 압력이 존재해 왔다. 특히 남한에게 미국은 지난 55년 중 유일하게 미국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던 단 1년 동안에 유일하게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안보적 관성을 부여했다.4)
이렇게 한국에서의 미국의 존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범위였다.5) 양극시대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일극체제에도 미국의 패권전략은 한반도에서 국제관계를 규율하는 가장 큰 틀이다. 특히 한반도 분단질서는 어떤 다른 대안적 정책옵션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때로 이런 한미관계의 특수성은 과연 우리에게 대외정책의 자율성이 있는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김준형 2002). 이렇게 한반도는 미국의 봉쇄정책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전위대 역할을 했다. 봉쇄정책은 그야말로 소련을 악의 세력으로 그리고 미국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보호자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남한 역시 이런 전체적인 틀 안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북한과의 체제경쟁은 늘 선악의 대결이었다. 거기에는 강대국들의 권력투쟁이라든지 민족분단의 아픔 같은 것들이 끼어 들 공간이 없는 철저한 흑백논리였다. 한미관계는 실제로는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움직였어도 항상 도덕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져 왔다. 한미관계는 명분상 어떤 가치보다 우선되어야 했으며, 항상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재해석되고 외교적 수사 등으로 채색되는 경향이 존재했다.
이런 경향은 한국의 과거 독재정권이 미국에 대한 정보를 걸러내고 은폐함으로써 더 강화된 점도 있다. 사실 냉전기간 중에는 그런 경우가 아주 드물긴 하지만 때때로 한미간의 의견차이가 발생할 때마다 그 문제의 해결여부와는 상관없이 항상 따라나오는 공식입장은 “한미관계 이상 무”였다. 아무리 긴밀한 동맹이라도 당연히 국가 간의 의견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양 국가에 어떤 문제점도 허용될 수 없는 성역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6) 그 이면에는 바로 근본주의 속성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근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회귀적(reflexive) 접근인데, 여기서 말하는 근본은 바로 남한을 일제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구원해준 해방자나 혈맹으로서의 미국을 기억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미국과의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익의 관점이 있을 수 없는 거의 도덕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이런 근본주의 속성이 탈냉전에 들어서면서 일시적인 변화를 보이는데, 그것은 먼저 미국 측이 한반도 정책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임으로써 촉발되었다. 앞에서 설명된 바 있는 미국의 초기 개입정책의 포용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북한과의 쌍무적 대결구조를 형성하던 것에서 미국과 북한이 접촉하고 이 과정에서 남한과의 공조가 과거와 같이 자동적인 일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불거졌다. 지금까지는 적어도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미국과 한국은 하나의 행위자처럼 행동하였다. 그러나 이런 2자 구조가 김영삼 정부시절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3자 구조로 변화를 했고,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3자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 가운데 내부역학이 달라진다(김유남 1999, 21-22). 김영삼 정부의 한미공조는 남북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북미관계의 진전에 따른 문제였으나, 김대중 정부 이후로는 그 상황이 역전되어 핵개발 의혹으로 인해 북미관계가 경색되자 이를 둘러싼 햇볕정책과 미국의 강경책의 이견을 조율하는 것이 초점이 되었다. 과거와는 달리 남한정부가 자율성을 회복하고 근본주의 속성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데 반해, 여전한 미국의 범위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 9․11 이후 개별국가의 주권보장이라는 유엔의 원칙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필요에 의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소위 부시 독트린의 ‘제한적 주권론(Conditional Sovereignty)’이 북한에서는 이라크와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는 반면, 남한에서는 동맹의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내용은 다르지만 동시에 적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갈퉁 2002).
최근 한미관계는 여중생 사망사건과 관련된 추모시위, 이라크 파병반대, 그리고 최근에는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반미시위, 특히 미군사격장 기습시위로 전례 없이 경색되고 있다. 부시가 규정한 악의 축은 단순히 불량국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근본주의에 입각하여 그 악은 종교적 차원을 가진다. 그들에게 김정일은 사담 후세인이나 빈 라덴 같은 악마적 존재이며,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서라도 정의전쟁을 통해서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다. 미국 정부 내의 강경파들은 자주외교를 부르짖고,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미온적인 노무현 정부를 빈 라덴을 숨겨준 탈레반 정권이라고 부르는 인사들마저 있다. 미국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테러리스트와 함께 하는 자라고 선언한 부시의 선언을 기억해보면 현재의 흑백논리는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관망하는 자를 포함해서 미국에게 충고를 하는 것도, 동맹의 상호성을 중요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미국은 현재 한국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다시 동맹의 2자구도로 돌아간 것이 거의 확고해 보이며, 일본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형세다. 이는 한국에게 미국과 북한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라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노무현 정부의 미온적인 자세가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북한이 제네바 협약을 파기하면서 핵개발을 재개함으로써 남한의 입지를 더욱 곤란하게 하고 있다. 미국의 힘과 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현재의 미국은 일반 강대국의 위치를 넘어서 제국이 되고 있지만 역시 한계는 존재한다. 문제는 미국의 힘의 반영이 먼저인가 아니면 한계의 노출이 먼저인가 하는 시간싸움으로 귀결된다. 현재는 힘의 우위가 확실해 보이지만 시간을 최대한 벌면서 다자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 한다. 이라크 전쟁이 미국 패권의 능력을 보여주었다면 북한의 경우에는 미국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힘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전쟁에서 질 가능성으로 공격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을 인질로 잡고 있는 점 때문에 이라크 전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7)
Ⅴ. 미국과 내일
맬러비(Malaby)의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의 글은 9․11이후 미국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는가 적나라하게 대변해준다. 그에 따르면 탈냉전이 기대와는 달리 폭력과 갈등, 환경파괴, 민족국가의 실패 등의 질서붕괴의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에 이런 무질서를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인 미국은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전 세계를 책임지는 제국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Malaby 2002). 소련과 비견될만한 분명하고 실재하는 위협의 부재는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축복만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냉전 이후 10년 간 미국은 냉전과 탈냉전 사이를 오가며 어떤 질서를 구축할 것인가에 대해 다소 혼란스럽게 이중적 자세를 취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9․11 테러사건은 미국에게 소련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위협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이는 미국에게 분명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대외정책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클린턴 8년 간 대외정책의 혼란가운데서도 미국이 절대로 놓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미국의 강력한 힘에 의한 지도력이 없이는 국제체제의 안정은 불가능하다는 신념이었다. 따라서 탈냉전 이후에도 20세기에 일관되게 작동해 온 소위 적과 동맹을 동시에 통제한다는 이중봉쇄전략을 고수해 왔다(Cumings 1993, 9-22).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물론 압도적인 군사력과 위협의 존재이다. 유럽과 동북아에 각각 10만명의 미군이 상주하고 있고, 전 세계 141개국에 25만의 미군이 파견되어 있으며, 40여 개국에 군사기지나 기지 조차권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예산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9개국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으며, 소위 깡패국가라는 7개국의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22배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후자, 즉 위협의 부재로 인해 전자의 행사가 자유롭지 못했지만, 9․11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니 오히려 냉전시절보다 미국의 이중동맹의 메커니즘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으로 실행되고 있다. 이를 위해 부시 정권은 출범부터 동맹을 유난히 강조해 왔다. 소련의 위협을 테러나 대량살상무기의 위협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전형적인 동맹질서라기보다 제국의 건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강력한 국가는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이 원하는 대상만을 동맹의 대상자로 삼기 때문이다(조페 2002). 다만 미국의 제국을 건설하고 세계질서를 재편할 때까지의 명분을 위해 과거의 동맹구조를 이용하는 것이다.
부시 정권은 9․11 이후 직면했던 불확실성을 아프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으로 국민들에게 확실성을 제시하고자 하였고, 이런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미래가 계속 그의 의도대로 확실하고 안정스러울 것인 가에 대한 것은 그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오히려 미국의 장기적인 전망은 불확실하다. 지금까지 분석했듯이 미국은 스스로가 새 질서의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파괴자이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무력이 미국의 미래에 어느 정도 확실성을 부여하겠지만 이는 결코 오래 갈 수가 없는 내부적 모순이 있다.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은 미국에게 군사적인 우위의 효과가 평상시보다 훨씬 더 크게 발휘되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2차 대전 직후에 가졌던 절대적인 패권으로 복귀하는 힘까지 준 것은 아니다. 동기는 부여했으되, 하루아침에 미국의 힘이 소련과 체제경쟁을 하던 때에 비해 180도 변화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미국의 ‘예외적 군사팽창’은 클린턴 행정부가 갖은 노력으로 복구해 놓은 균형예산을 다시 적자예산으로 돌려 세웠다. 앞으로도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일들이 남아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계속 수행해야 하고, 미사일방어(MD)를 추진해야 하며, 또한 동맹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들어야 할 경제적 부담은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군사력만으로는 결코 패권을 절대 오래 유지할 수 없다. 민심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미국은 여기에서 실패하고 있다. 미국은 아무도 믿지 않고 자신들의 도덕성에만 의존한다. 대량무기는 다른 국가는 가질 수 없고 미국만이 보유할 수 있으며, MD의 개발이 완성되면 더 이상 공포의 균형질서는 사라지고 미국의 핵독점 시대가 열린다. 자기들은 현명하게 그리고 자유수호적인 차원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어떤 국가도 그런 무기들을 현명하게 사용한 적이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다(월러스틴 2002, 168-169). 이는 국방성의 NPR(Nuclear Posture Review)에서 핵의 선제공격가능성을 말하면서 스스로도 모순된 것임을 확인하였다.
결국 9․11 이후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군림은 일시적으로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고 능력이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므로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절대적 패권의 절정이자 동시에 쇠퇴를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또한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전쟁개념의 근본적인 변화에 가장 늦게 적응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그렇듯이 미국의 거대한 사이즈는 변화에 민첩하지 못한 특징을 자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21세기 국제분쟁의 새로운 유형을 걸프전쟁을 통하여 가장 먼저 도입한 미국이지만, 그리고 최근 이라크 전쟁에서도 확인되었듯이 여전히 현대전에서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보이겠지만,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다음세대의 전쟁의 특징으로 가장 많이 꼽는 비대칭전에서 미국은 가장 큰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다.8)
국가 대 국가, 그리고 전면전이라는 재래 전쟁의 유형에서는 강자가 유리하지만, 변화하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분쟁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이 정복이나 패망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경우에는 미국의 힘이 아무리 강하고 압도적이라고 하더라도 안보에 대한 우려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큰 안보불안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북한을 침공하지 못하는 이유도 패배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남한을 볼모로 잡겠다는 비대칭전의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만델바움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과거 국제체제에서 강자의 특권이었던 전쟁의 수행이 점차적으로 약자의 전술로 변해갈 가능성이 높다(Mandelbaum 1988-1999, 35). 그러므로 9․11 테러사건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
레인이나 헌팅턴은 공히 그래서 냉전 이후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인 것은 확실하지만 세계질서들을 혼자서 효율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보인 기간은 91년 걸프전을 전후로 한 짧은 기간일 뿐이고 그 이후 일-다극체제로 그리고 10~20년 이후에는 다극체제로 전환될 것이라고 예측했다(Huntington 1999 ; Layne 1993). 또한 찰머스 존슨은 미국대외정책의 일방적이고 근시안적 성향은 지금까지 발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수많은 예기치 않은 정책실패, 즉 블로우 백(Blow Back) 현상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원래 블로우 백이란 로켓포가 발사되면서 추진 연료로 인해 생기는 화염바람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적에게 발사한 미사일의 화염바람으로 아군이 피해를 입을 수 있듯이 미국의 개입정책들이 결국 미국에게 블로우 백이 되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Johnson 2003). CIA가 키운 칠레의 피노체트나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말할 것도 없이, 빈 라덴과 탈레반은 바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소련에 대한 저항을 지원할 때 미국이 키운 인물들이다. 소련이라는 당시의 ‘악’을 제압하기 위해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을 10년 간 이용한 블로우 백이 9․11이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가리켜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며 가장 강력한 로켓포를 쏘아 올렸다. 가장 강력한 로켓포 인만큼 그 블로우 백의 위력 역시 가장 강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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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원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