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의 자유
성경 말씀: 예레미야 34:8-11; 요한복음 8:31-36
요약
복음서에 예수님의 자유가 보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유는 보통 사람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자유와 다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내포하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없이 서사될 수 없고, 예수님의 자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없이 서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표현되는 예수님의 자유가 복음서에서 보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유는 생명의 자유입니다.
힘의 자유
사람이 개인적으로 세상에 태어나니, 자유를 자신이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은 세상 조건에 종속되니,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세상 조건을 반영합니다. 세상조건에 대한 반영은 그것에 자신의 힘의 구사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유가 힘에 의해 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무얼 하는 동안 자유를 의식하고, 그들이 하는 것은 자신들의 힘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힘을 추구하며 삽니다. 세상에서 그들의 성공은 그들이 누리는 힘으로 표현됩니다.
개인이 세상 조건에 힘을 구사하는 자유는 다른 개인들에게 억압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누리는 자유는 개인들 사이에 갈등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개인들의 자유에 수반하는 힘은 서로 상쇄로 표현되게 됩니다. 따라서 법의 테두리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유는 참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참을 알지니 참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고 하십니다. 예수님으로 드러나는 자유는 참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으로 말해지는 자유는 생명을 뜻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한 말씀의 성육신된 생명입니다. 성육신된 생명은 참으로 드러나 세상에 자유를 보입니다. 즉 성육신된 생명은 참이고 자유입니다. 성육신된 생명의 참과 자유는 세상에 개인들의 참과 자유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된 생명은 세상에 자유를 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말해지는 자유는 예수님 개인의 자유로 생각되게 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는 개인이 아닌 예수님의 생명으로 서사됩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전기가 아닙니다.
복음이 예수님의 전기로 써지지 않으면, 어떻게 써집니까? 복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기억으로 써졌습니다. 즉 복음은 영성으로 서사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실성이 아닌 영성으로 말해집니다.
영성으로 서사된 예수님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부각됩니다. 즉 복음에 서사된 예수님에게 그분의 개인성은 부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분 개인성에 의해 부여되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의 기억은 없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복음을 서사한 기억자들로부터 독립됩니다.
복음서에 서사된 예수님은 대상적으로 정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서사자들과 함께합니다. 복음서는 성령님으로 예수님과 서사자들의 함께로 서사됩니다. 복음의 영성은 예수님과 서사자들의 함께의 영성입니다. 복음에 서사된 생명은 함께의 생명입니다.
복음으로 서사된 예수님은 예수님과 서사자들의 영적 함께를 보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잘 보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복음으로 예수님을 말함은 자체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가지로 보입니다.
참의 자유
그러므로 예수님의 자유는 예수님의 개인적 자유로 오인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힘의 자유를 누렸다는 시각이 고정되게 됩니다. 그 시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라보아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외면되게 됩니다.
예수님의 자유는 생명의 자유와 참의 자유입니다. 이 경우 예수님은 복음으로 서사된 생명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은 예수님의 독자적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제자들과 함께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예수님 개인의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말해짐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 언약의 삶이 펼쳐집니다. 새 언약의 삶은 복음에 서사된 예수님의 생명의 활동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의 활동으로 자유로 보입니다. 이렇게 새 언약의 자유가 말해지게 됩니다.
새 언약의 삶은 자유의 삶입니다. 세상 조건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삶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자유로 말해집니다. 이것은 초대 사도들에 의한 복음의 전파로 이루어진 교회로 보입니다. 그들의 선교로 세상에 파급되는 것은 생명의 자유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새 언약의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이는 생명은 새 언약의 생명이고 예수님이 보이는 자유는 새 언약의 자유입니다. 복음은 초대 사도들의 선교의 내용입니다. 그들의 선교 활동으로 새 언약의 삶이 세상에 이루어집니다.
초대 교회는 새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를 보입니다. 새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는 복음서에서 읽어지는 예수님의 자유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은 새 언약의 삶에서 예수님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대 땅에 사신 분으로 뜻해지지 않습니다.
새 언약의 삶으로 초대 교회의 출현은 세상에 드러난 새로운 삶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자유의 결실입니다. 힘과 조건에서 독립된 생명으로 솟아나는 자유를 보입니다. 즉 초대 교회의 삶은 힘이나 조건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를 보입니다.
새 언약의 삶은 새 생명으로 번성합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씨의 비유로 가르치시는 뜻이 있습니다. 새 언약의 삶은 생명을 지닌 씨로 번성합니다. 초대 교회는 초대 사도들의 활동의 결과가 아닌 그들의 생명으로 싹튼 것입니다.
초대 사도들의 선교는 생명의 자유로 표현됩니다. 즉 그들의 선교는 새 언약의 삶으로 자랍니다. 생명의 자람은 자유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자람은 영성으로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씨를 바유로 드십니다. 영성의 자람을 씨의 자람의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개인은 자신의 활동으로 자신의 자유를 보입니다. 개인은 태어난 수명으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실존적 자유가 말해지지만, 그것은 세상에 있음 자유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자람의 자유를 보이지 않습니다. 생명의 자람은 영성으로 다루어집니다.
자유의 궁극성
존재의 자유가 아닌 생명의 자유가 보아져야 합니다. 존재는 자체로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유는 세상에 있는 것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자람이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바위에 부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다람쥐에 부여됩니다.
자유는 복음서의 예수님 온전히 말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으로 보아질 때, 자유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존재로 보아지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으로부터 절단입니다. 따라서 자유는 그것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시각에서 억압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더 이상 존속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을 생명으로 그것에 임하는 그분의 자유를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의 죽음은 씨의 죽음입니다. 즉 예수님의 생명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자유는 생명에 내재됩니다. 생명의 자람으로 보입니다. 즉 씨의 내재된 생명은 죽음으로 싹틉니다. 그러므로 씨의 죽음은 생명의 자람입니다. 그리고 자유의 표현입니다. 생명의 자람은, 어떤 양태로든, 자유로 보입니다. 생명이 의식되지 않는 한, 자유가 또한 의식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 언약에 죽음이 생명에 내재됩니다. 생명의 죽음은, 존재의 죽음과 달리, 씨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자유의 종식이 아닌 자유의 표현입니다. 생명의 자유는 죽음에 의해 제한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향한 자유는 제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복음을 말하는 의미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예수님의 생명을 하나님과 함께함으로부터 가로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함께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점을 보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의 자유는 씨의 자유와 더불어 극복의 자유입니다. 자유는 극복의 뜻을 내포할 때 온전합니다. 조건적인 자유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어떤 구속적 뜻도 온전한 자유에는 부과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뜻과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을 조건성이 아닌 영원성으로 말합니다.
생명의 자유는 궁극성을 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 언약의 삶의 궁극성입니다. 그 궁극성은 복음에 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한 예수님의 서사는 생명의 자유의 궁극성을 보입니다. 새 언약의 삶의 자유의 궁극성입니다.
생명의 자유의 궁극성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영성으로 자유를 보입니다. 자유가 영성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그것은, 어떻게 표현되든, 세상에 굴절되기 마련입니다. 영원이나 궁극성은 영적으로 인도되지 않고 말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새 언약의 삶을 삽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새 언약의 삶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들의 누리는 자유는 그들의 세상에서 조건적 고난과 관계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누리는 자유는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유를 추구하기보다 기도하게 하옵소서.
나만이 누리는 자유를 추구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누리는 자유를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따라 세상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길로
인도되는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하는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그렇게 죽음 너머로 인도되는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