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교수의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중에서 -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날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학교 입장이 난처하다면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가 할 일이 아니겠느냐면서 오히려 필자를 격려해 주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본 것은 신채호, 장도빈, 정인보 선생 등의 사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제기한 바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
학문 연구를 하는데 강단과 재야라는 분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러한 구분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외국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도 했으며 현직이 대학 교수였는데
필자를 강단 사학자에서 제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즈음은 우리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 또는 민족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하면
세계화의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남북 통일을 위한 민족 동질성 회복의 차원에서나, 우리 문화와 외래 문화가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우리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우리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 윤내현,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中 -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의 저자 이희진박사는
청산해야 할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을 때,
역사가 어떻게 뒤틀린 길을 가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분야가 한국의 역사 학계라고 진단한다.
이병도가 키운 제자들이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기득권을 수호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키운 결과가
바로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기득권 수호 투쟁이 어떻게 학계의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학자들을 패거리 집단으로 전락시키며,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만도 못한 짓을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는 파렴치한이 되고 있는지를
저자는 처참한 내부 고발자의 심정에서 진술하고 있다.
이들에게 연구 기금과 학회지 발간 및 활동비를 지원하는 관료들이
결국 이들과 야합하게 되는 과정을 이 책에서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가 무사안일과 출세주위에 물든 관료들의 손을 통해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선심 쓰듯 뿌려지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갈 것이다.
또 이러한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언론이다.
이희진박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려 들어갔던 고려대학에서 인문학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제 발로
역사학을 전공하는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필 역사학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와중에 못 볼 꼴을 많이 보게 될 고대 한일관계사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연구성과도 박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한 『가야 정치사연구』부터 『가야와 임나』,
『거짓과 오만의 역사』등 그 분야에 집중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고대사연구자들이
얼마나 일본학자들에게 의지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뭘 모르던 시절,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되는 미천한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여기저기 발설한 죄로 지금까지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이러한 인생역정과 관계가 깊다.
일제 식민사학은 어떻게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나?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교수를 지낸, 역사학계의 원로 김용섭 선생님께서 발간하신
『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라는 회고록에서 해방 이후 어떻게 일제 식민사학이 역사학계의 주류로 자리잡고
아직까지 강단 권력을 휘두르며, 우리 역사와 민족을 좀먹게 했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6.25전쟁 이래로 남한에서 제기되는 역사의 편찬 문제는,
아직은 깊은 연구에 기초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청산 없이, 일제치하의 역사학자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학자들은 일본인 학자들에게 역사학을 배우고, 그들과 더불어 학문 활동을 같이해온, 이른바 실증주의 역사학 계열의 학자들이 중심이었다.(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p35)
따라서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역사학계의 원로로서 주요 대학의 교수직을 독점하였으며,
그들의 저술은 역사학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었던 것은
이병도의 『조선사대관』과 그가 이끄는 진단학회의『 한국사』(전 7권)이었다.(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p35~36)
해방이 되었을 때, 서울에는 전통적 역사학에 기초하여 우리 역사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신채호 계열의 정인보, 안재홍등 민족주의 역사학 또는 신민족주의 역사학의 학자가 건재하고 있었다...중략...
그렇지만 6.25전쟁 이후에는 이들 모두가 납북 또는 북상을 하였고, 따라서 그 학문적 전통이 대대적으로 계승 발전되기는 어려웠다.(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우리나라 한국고고학을 이끌었다고 불리는 김원룡이라는 분이 있다. 전 서울대 교수신데 쓰에마쓰(末松保和) 라고 불리는 도쿄 극우파 국사학과 교수를 공항까지 마중 가서 서울대로 모시고 다녔다.
이 분이 한 짓이 원삼국론이다.
중국이 지금 북한을 유사시 먹기 위해 내는 이야기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철기문화를 부정하면서 철저하게 우리나라를 남한에 가두게 하는 이론이다.(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역사학의 거두로 불리는 이병도 교수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분은 더 심하다.
이 분은 일본 정부에 돈 받아서 우리나라 역사왜곡에 힘을 쓰셨다. 그 덕에 지금 우리가 그 왜곡된 내용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우리나라 역사교육을 장악하고 있고 그들과 조금 다른 학자들에게는 이단아, 원색 비난으로 대응하고 있다.”
김용섭(80) 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의 회고록에 따르면
학과 동료 교수이기도 한 고故 한우근과 김철준 교수에게 각각 두 번씩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김철준 교수가 한 번은 나를 보고 웃으시며,
‘김 선생,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 그 다음은 노발대발하시며, ‘이병도 선생에 대해서 무슨 글을 그렇게 써!’하시며 질책하셨다. 마치 부하 직원이나 제자를 대하듯 나무라셨다. 전자는 경고성 발언이고 후자는 절교성 발언이라 생각되었다.”(770쪽)
한우근은 여러 사람이 동석한 가운데 김 교수에게 “김 선생, 우리 이제 민족사학 그만하자.”고 했다고 회고했다. “
“(한 번은) 너덧 명의 중년ㆍ노년 교수가 내방하였다.
노크를 하기에 문을 열었더니, 김원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제 때 경성제대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쓰(末松保和) 선생님인데, 김 선생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768쪽)
스에마쓰는 조선총독부 관리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하는 등
식민주의 역사학을 제창하고 수립한 중심인물로 꼽히며, 당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인 김원룡은 경성제국대학 시절 그의 제자였다.
이런 식으로 학교 안팎에서 압력이 거세지자 “
나의 문화 학술운동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서울대학교의 관악산 이전을 계기로 나도 이 학교를 떠났다”고 회고록에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