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에도 치열하게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시인들이 있어, 제23회 한국시문학상 수상자 2인을 선정하게 되었다. 허진석 시인의 「그라나다의 황혼 -사이보그 20」 외 2편과 박분필 시인의 「양남 주상절리에서」 외 2편이다.
허진석 시인은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타이프라이터의 죽음으로부터 불법적인 섹스까지』 『X-레이 필름 속의 어둠』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를 상재하였고 동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사이보그」라는 부제가 붙은 허진석 시인의 시들에서, “사이보그”는 미래사회의 과학기술 발달로 인해 인간과 기계의 융합을 넘어 종의 경계까지도 허물어질 것으로 우려되는 시점에서, 사람과 기계와의 경계가 지워질지도 모를 불안감을 시적 은유로 풀어놓는다.
수상시 「그라나다의 황혼 -사이보그 20」에서는 그라나다 왕국의 꿈의 궁전 알람브라가 떠오른다. 그러나 몇 곳 불 밝힌 “뾰족탑”, “늦은 오후의 아잔adhān”이 들려오는 곳, 시인은 마치 미끼도 없는 낚싯대를 드리웠던 강태공처럼, 거대한 도시의 밤, 그 호수에 “미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기다림”과 “서두른다”는 역설, 낚싯대를 잡은 시인의 입장과 “물고기”의 입장도 역설적이다. 밤 12시, 곧 “본초자오선”이라는 경계, 그 선을 넘어가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아름다운 궁전이 있는 풍경 속에서 오로지 불안만을 낚고 있음도 역설이다. 인류의 불안한 미래를 먼저 체험해보는,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이미지의 시이다.
박분필 시인은 1996년부터 『시와 시학』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시집으로는 『바다의 골목』 『산고양이를 보다』 『창포잎에 바람이 흔들릴 때』와 동화집으로 『홍수와 땟쥐』 『하얀 날개의 전설』을 상재하였는 바, 『문학청춘』 작품상, KB 창작동화공모전 대상 수상, 한국예술위원회기금을 수혜하였다.
박분필의 시 3편에서도 경계와 경계를 넘는 시인으로서의 적극적인 탐구심에 포커스를 맞추어 읽어본다.
수상시 「양남 주상절리에서」는 막막한 우주와 지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명상을 보여준다. 주상절리의 주름치마, 부채꼴, 꽃봉오리 모양 등, 육각 또는 오각의 수직단열의 돌기둥들, 이곳은 신생대 제3기 에오세(5400만 년 전)〜마이오세(460만 년 전) 사이에 경주와 울산 해안지역 일대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지구의 오랜 역사에 의한 자연작품의 장소.
이곳을 태초의 지구의 탄생과 생명의 발아를 기억하는 도서관으로 상정해보면, 아직 “해석”되지 못한 지구와 사람의 생성의 “신비”를 찾아내고 싶어질 수 있다. 어떤 “기억”도 “사랑”도 염원도 “저 떨림”, “저 무늬들”로 축약된 곳에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하여 시인은 갈매기가 되어 직접 그 ”고서“를 뒤적여보고 싶다. 생명의 생성과 그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심이 사람과 지구의 시간과 공간 사이의 경계를 넘어간다.
허진석/ 그라나다의 황혼
낮과 밤이 거창하게 임무를 교대한다
그림자를 걷어낸 시간
지리는 관념이 되어 스크린에 흐르고
지상의 몇 곳
뾰족탑이 불을 밝힌다
이단의 기도는 장황하고 상투적이라
늦은 오후의 아잔adhān처럼
가까운 곳에 떨어져 내린다
시간을 거슬러 날아도
이내 밤은 깊다
생각은 물고기처럼 서두른다
시선 저편
점액질의 바다 멀리
새빨간 형광찌가 떠오른다
곧은 바늘
미늘 없는 기다림이다
케미* 불빛이 번진다
잡어 입질이 심하다
본초자오선 너머
밤이 밤다워지니
생명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 밤낚시 도구. 형광물질을 사용한 조명으로, 찌 끝에 매달아 잘 보이게 만들었다.
양남 주상절리에서
박 분 필
단행본들을 부챗살로 펼쳐놓은 바다 속 장서관
파도는 낡아가는 책을 보수하는 유능한 사서다
표면의 광택을 파고 든 인간의 기억, 희망, 사랑을
담았다 쏟아내고 쏟았다 담아내기를 수 십 만년
몇 초가 영원처럼 흐르는 저 떨림, 저 무늬들,
회색과 초록색이 뒤섞인 파도의 갈피 속에 미처
해석되지도 기록되지도 못한 역사까지 껴안은 채
물의 필체와 물의 언어만을 고집해 온 고서들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뭉치고 엉키는 시간과 공간
잿빛갈매기들 조용히 날아내려 고서를 뒤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