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 구재기]
박제천의 [방산서실芳山書室]
방산서실芳山書室
박제천
산을 하나 장만했다
저절로 서실이 생겼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하느님께 빌렸다
그 산의 바람과 구름과 햇빛이 다 내 것이 되었다
아직 달빛과는 필담筆談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풀이며 나무들 하나하나가 오래된 가족이었다
그래도 벌레들은 땅속에서 아직 낯을 가렸다
잘들 지내보자, 돌멩이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메아리는 재빨리 대답했다
친구야,
정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산이 나를 허락한 거였다
산이 하는 말을 열심히 받아 적는 게 내 몫이었다
나라는 도화지에 산이 그리는 그림,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마힐摩詰 왕유의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듯이
―계간《문학과창작》2016년 봄호
▪시 읽기 / 구재기
인간이 산을 하나 장만했더니 저절로 서실이 생겼으나, 이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빌린 것이라 한다. 산은 곧 자연이다. 한 인간으로서는 자연을 어찌할 수 없다. 자연 속에 깃든 인간은 자연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나 자연은 오직 조물주(=하느님)만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에게 소요되는 것만큼만 공급해줄 뿐 소유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래, 자연 속 인간은 ‘방산서실芳山書室’이라는 ‘서실書室’ 하나를 장만할 뿐이다. 그곳이 인간이 자연화自然化할 수 있는 유일한 성전聖殿이다. 자연과 무한 필담筆談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자연은 서실에서 화자의 필筆을 안내하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의 필담을 계속하지만 자연은 결코 모든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는다. 자연(산)은 ‘그 산의 바람과 구름과 햇빛이 다 내 것이 되었다’고 인간으로 하여금 만족을 주는 듯하지만, 실은 하느님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을 하나 장만했다’고 하더라도 조금은 밝혀내지 못하고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는 그 무엇이 자연 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비록 달이 있는 밤이라 하지마는 ‘아직 달빛과는 필담筆談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영원한 장식으로서의 자연이기 때문이요, 하느님만이 알고 있는 자연의 비밀이기도 하다.
인간이 가지는 자연은 그 자체의 모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연 속에 빠져들어 ‘바람과 구름과 햇빛이 다 내 것이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달빛과는 필담筆談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있으며, 산에 있는 ‘풀이며 나무들 하나하나가 오래된 가족이었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벌레들은 땅속에서 아직 낯을 가렸다’고 한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아무런 힘이 없다. 자연은 영원한 불변이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일 뿐 인간의 생각과는 관계가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자연은 그런 의미에서 완전하다.
결국 인간은 ‘잘들 지내보자’고 자연을 기만하려 한다. 그러나 자연인 ‘돌멩이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오직 인간에게 되돌려주는 인간의 목소리인 ‘메아리는 재빨리 대답했다/친구야’라고. 인간은 자연에 순종함으로써만이 자연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산이 나를 허락한 거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자연에 들어 자연, 즉 ‘산이 하는 말을 열심히 받아 적는 게’ 인간인 ‘내 몫’이요, ‘저절로 서실이 생겼다’는 까닭이 된다. 그래서일까, 남송의 동파 소식蘇軾이『동파지림東坡之林』에서 당의 왕유王維의 산수화『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에 대하여 <마힐의 시를 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시와 그림은 원래 하나이며 자연스럽고 청신해야 한다(味摩詰之詩 詩中有畵 觀摩詰之畵 畵中有詩 及詩畵本一律 天工与清新)>’라고 한 평評이 자연스레 떠올려진다. 이는 소동파가 왕유의 시와 그림을 함축적으로 정의한 것, 이를 테면 즉 서실과 그림(자연), 시와 그림의 동일화同一化를 엿보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추천 구재기)
— 《시와 소금》201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