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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금숙의 시가 자라는 방 1]
[주(註): 나금숙 시인의 ‘시가 자라는 방’을 연재합니다. 시인이 넘치는 나라에 살면서도 정작 시와 만날 기회가 없는 안타까움을 떨치고 문학뉴스가 지금 우리 시대의 시와 만나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황인찬 시인
퇴적해안
황인찬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어릴 적 보았던 새하얀 눈밭
살면서 가장 슬펐던 것은 아끼던 개가 떠나기 전
서로의 눈이 잠시 마주치던 순간
지루한 장마철, 장화를 처음 신고 웅덩이에 마음껏 발을 내딛던 날,
그때의 안심되는 흥분감이나
가족들과 함께 아무 것도 아닌 농담에 서로 한참동안 웃던 날을
무심코 떠올릴 때 혼자 짓는 미소 같은 것들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것들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평범한 주말의 오후
거실 한구석에는 아끼던 개가 엎드려 자기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얘가 왜 여기 있어 그럼 지금까지 다 꿈이야?
그렇게 물었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만 엎드려 있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린다
나는 개에게 밥을 주고 오래도록 개를 쓰다듬었다
ㅡ<2021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중에서
해안에는 늘 파도가 친다. 잔잔할 때도 있지만 밀물과 썰물이 늘 드나드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제목에서 정(靜)과 동(動)을 아우른다. 움직이는 해안이 있고 무언가 쌓여 적체된 것이 있다. 시인은 난생 처음의 첫 기억에서부터 돌아 나온다. 첫 기억이 새하얀 눈밭이라니 부럽다. 네 살쯤인가? 나는 큰오빠의 등에 업혀서 도랑물을 내려다보던 기억이 첫 기억이다. 대나무가 우거진 언덕배기 꽤 큰집에 소리 지르는 빚쟁이들이 들이닥쳤던가?
오빠는 어른들의 재촉에 황급히 어린 나를 업고 내리막길인 골목을 내려와 거기 서 있었나본데 나는 도랑의 물풀까지 첫 기억 속에서 선명하다. 어쨌든 시인은 시간을 거슬러 기억해낸다. 가장 오래된 기억, 가장 슬펐던 기억과 더불어 가족들과 아무 것도 아닌 농담에 환하게 웃던 사소한 기억을 찾아낸다. 그런데 그는 어디 있는가?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거실에 다시 재생되는 현전을 그는 의아해 한다. 어느 것이 현존재인가? 아끼던 개가 떠나갈 때 슬픈 눈을 잠시 마주쳤던 그때가 현재인가? 다 지나가버려서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마치 가상현실 속에서처럼 다시 경험하고 있다. 아니면 거울 속에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울 밖의 나, 거울 속의 나, 누가 실재 현존의 나일까?
이 시는 묘하게 현장을 꿈속으로 거울 속으로 끌어가고 과거를 현실 속으로 단숨에 끌어온다. 대단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함께 잔디밭에 누워 하늘의 뭉게구름을 보듯이 한가롭고도 나즉나즉한 화법으로 시공간을 이동시킨다. 자신이 가장 머물고 싶고 가장 간직하고 싶은 장면으로 시를 끝맺으면서 우리를 불가능을 꿈꾸게 하고 가능하게 한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시이고,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종교"라고 한다. 몇 십 년 전으로 회귀하는 것은 먼 미래에 대한 방향성과도 연결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사랑하는 개의 곁에서 이별 없이 밥을 주고 오래도록 쓰다듬을 수 있는 행복은 모든 정신이나 추상성이 실은 육체를 입어야 한다는 오래되고도 새로운 진리를 다시금 확장시켜주고 있다.
추상이나 정신으로만 진리가 현전화될 수 있다면 어찌 신이 사람의 아들로 성육신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현전, 실존의 문제를 파고든 근대철학이 귀착해야 하는 방향성이 이 incarnation이라고 볼 때, 이 시는 영원히 떠나간 개를 부활시켜 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는 일상의 양식인 밥을 주고, 곁에 앉아 오래도록 쓰다듬는 몸의 감각을 구체적으로 재생시킴으로써 무화되고야 말 존재를 시간 속에 영존하게 한다.
더구나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다. 그 눈은 시원의 뜰에 내리던 눈이다. 항상 시작일 수 있다고 속삭이는 눈이 내리고 있다. 과연 시의 역할이 이만하면 어떠한가? 우리로 시에 대한 욕망을 잔잔하게 중심에서부터 들끓게 하는 발화가 이 시에는 있다.
나금숙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나금숙 시인은 시집 『그 나무 아래로』와 『레일라 바래다주기』를 상재했고, <시산맥>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시와 문화> <시인정신> 편집위원과 <서울포엠> 수필반 강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