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1일 오전 8시에 낫으로 무장하고 광주 톨게이트 인근에 매복하고 있다가 20사단 인솔대를 습격하여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농민들은 누구였는가? 사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누군지 알아내는 것이 영영 불가능한가? 그러나 몇 시간 후에 다른 곳에서 그들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오전 8시에 낫 들고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괴한들이 9시에는 600 명을 인솔하고 아세아자동차공장을 습격하여 군용트럭 등 수백 대의 차량을 탈취하였으며, 10시에는 그 차량들을 몰고 다니며 전라도 44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정오 무렵에는 전남도청 및 전남대 인근에서 무장폭동을 주도하였다. 그 중 다행히도 정오 무렵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있었다. 그 사진의 두 가지 단서는 지프차 탈취범들이 그 날 타고 다니던 20사 지프차 및 낫으로 20사 인솔대 장병들 몸을 찍고 강탈하여 쓰고 다니는 철모 화이버일 것이다.
무장봉기 주동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 날 정오 무렵 금남로에서 엄청난 무장반란이 일어날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주동자들은 각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과 실탄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하여 오전 9시 반부터 전옥주 일행을 도청으로 들여보내며 장형태 도지사와 협상 제스처를 썼는데, 국내 기자들은 모두 이 속임수에 속아 도청 안에 들어가 장 도지사 동정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관광호텔에 있던 몇 명의 외신기자들은 금남로에서 무장반란이 시작되는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할 수 있었다.
1980년 5월 21일 도대체 광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아래 사진은 5월 21일 오전 11시경 노동청 쪽의 풍경이다. 전 날 밤 시위대가 버스로 순경 4명을 압사시킨 곳에서는 또 다른 차량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20일 오후 시위대는 광주에서 눈에 띄는 대로 차량 징발을 하여 차량 돌격이라는 도시 게릴라 방법에 사용하였다. 즉, 도청 주변 군경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어 전경과 군인들 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리게 하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군경 편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한 도시 게릴라전 현장에는 마치 쓰나미가 할퀴고 간 듯이 박살 난 차량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사납게 달려드는 차에 깔리면 죽는데 누가 막아낼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순경 4명이 깔려죽고 여러 명이 중상을 당한 후에 겁이 나서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21일 새벽이 오기 전에 군경 저지선은 모두 시위대에 의해 돌파되었다. 군경저지선 돌파의 목적은 그 다음 수순인 군사작전이었다. 군용차량을 탄 무장폭도들의 군사작전이 시작되는 순간이 광주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데, 이 순간을 포착한 국내기자가 없어서 한국인은 이 순간을 보지 못했었다. 5.18특별법이 제정되고, 5.18 재판이 열렸을 만큼 지난 34년간 한국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5.18에 대하여 떠들어댔지만 정작 이 중요한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 없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 바로 그 다음 날짜 뉴욕타임즈지에 실렸었으나, 그 사진 한 장만으로는 외국인들이 그 무장폭도들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놀랍게도 그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 바로 그 다음 날짜 뉴욕타임즈지에 실렸었으나, 그 사진 한 장만으로는 외국인들이 그 무장폭도들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지프차 탄 복면 무장폭도들의 정체는 바로 서너 시간 전에 20사단 인솔대를 습격하여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괴한들이었다.
<역사로서의 5.18> 2권 193쪽부터 204쪽에는 농민 50 여명이 오전 8시에 광주 톨게이트 인근에서 낫 들고 20사단 인솔대를 습격하여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사실이 상술되어 있는바, 위의 귀중한 사진에 담겨있는 소중한 단서를 해독하려면 먼저 이 사건을 알아야 한다. 지프차에 탄 폭도들이 쓰고 있는 20사단 철모 화이버가 이 폭도들이 어디서 그 화이버를 구했으며, 네 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 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이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에서 21사단 인솔대로부터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농민들이 11시경에 어디론가로 이동하고 있다. 지프차에 탑승해 서있거나 앉아있는 네 명의 폭도의 상의는 같은 무늬 계열의 상의, 즉 똑같은 공장에서 제조된 상의이다. 만약 이들이 진짜 농민들이었다면 민간인 개성에 따라 복장이 다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복처럼 복장이 통일되어 있을 때 이것은 군복처럼 일종의 단체복이다. 옷의 상태를 보아도 동시에 지급된 단체복이요, 머리에 백색 수건으로 띠를 띤 것도 통일되어 있다. (5월 21일 오전에 머리에 백색 띠를 두르고 있었던 괴한들은 20일 광주로 침투한 목포의 김대중 계열의 깡패조직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힌츠페터와 김영택이 목격한 목포 별동대가 광주에서 무기 분배 를 클릭하면 자세히 확인할 수 있음.) 도대체 남한 어느 동네 농민 복장이 저렇게 통일되어 있었다는 것인지 참으로 이상하지 아니한가?
동아일보 광주주재 사진기자가 찍은 아래 사진에서 20사로부터 탈취한 지프차를 탄 농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20사단 9번 지프차에는 낫으로 9번 지프차 운전병에게 상처를 입히고 빼앗은 철모 화이버를 쓴 폭도가 서 있다. 운전석에 앉아 운전하는 농사꾼 역시 철모 화이버를 쓰고 있다. 도대체 낫 든 농민으로 위장한 폭도들에게 태극기가 무엇을 의미하였기에 지프차 위에 태극기를 세워 두었을까? 이 경우 폭도들의 태극기는 정체 위장용이었으며, 태극기를 꽂은 지프차가 폭도들의 지휘 차량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국군 철모 화이버를 쓰고 서 있는 폭도의 면상을 사진 크기를 줄이지 않고 관찰해 보자. 어느샌간 지프차를 탈취한 농사꾼들의 복장이 바뀌어 있다. 이 폭도의 경우에도 멀리서 일반의 눈에는 공수부대 군복과 식별이 안되는 얼룩무늬 제목을 입고 있다. 목에는 언제고 복면을 할 수 있는 수건을 두르고 있다.
그러면 국군 철모 화이버를 쓰고 서 있는 폭도의 면상을 사진 크기를 줄이지 않고 관찰해 보자. 어느샌간 지프차를 탈취한 농사꾼들의 복장이 바뀌어 있다. 이 폭도의 경우에도 멀리서 일반의 눈에는 공수부대 군복과 식별이 안되는 얼룩무늬 제목을 입고 있다. 목에는 언제고 복면을 할 수 있는 수건을 두르고 있다. 바로 이 폭도가 1980년 5월 22일 뉴욕타임즈 대문기사 사진 맨 앞의 폭도이다. 정체 위장용 및 폭도들의 지휘차량 표시로서 태극기가 걸려 있는 똑같은 지프차를 타고 있는 동일인물이다. 그때는 폭도가 태극기로 정체를 위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폭도의 철모 화이버가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광주사태 34 주년에 폭도의 정체가 드러났다. 지프차를 탄 이 폭도 일행이 바로 오전 8시에 낫 들고 21사단 인솔대를 습격하여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농사꾼들이었다. 농사꾼은커녕 일반 시민들도 달리는 지프차 본넷 위에 유유히 앉아있지 못할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달리는 지프차 본넷 위에서 당황하여 중심을 잡지 못하면 옆으로 굴러 떨어져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모험인 것이다.
농민처럼 낫을 든 괴한들이 20사로부터 탈취한 열 네 대의 지프차들 중 위 사진은 도청 함락에 동원된 지프차들이다. 같은 시간에 몇 대의 지프차는 전남대를 함락하기 위해 전남대 인근에 동원되었다. 그 쪽에 있던 아래 지프차가 금남로 쪽에 있던 위 지프차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범퍼에 역시 20사단에서 갓 탈취한 지프차임을 보여주는 번호 20C가 있고, 역시 정체 위장용 태극기가 걸려 있으며, 멀리서 보면 군복처럼 보이는 제복을 입은 무장폭도가 달리는 지프차 본넷 위에 능숙하게 앉은 채로 M-16소총을 들고 있다. 이 사진은 시민군이 M-16으로 무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물이요, 시민군 중 M-16으로 무장하고 달리는 지프차 본넷 위에서도 능숙하게 M-16을 파지하고 있는 이 복면폭도가 바로 그 날 낮 12시경 전남대 인근 평화시장에서 임산부 최미애씨를 사살한 시민군이다. 21일 민간인 총기 희생자 발생 원인에 대하여 여기서 드러나는 사실은 그 날 오전 8시경 20사로부터 지프차를 탈취한 그 무장세력이 바로 최미애씨 가해자였다는 사실이다.
5월 21일 광주 시가지에서 M-16을 난사하며 다니던 이 무장폭도의 사진은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 6월 2일자 뉴스위크지에 실렸다. "한국에서 반란이 일어나다"(Rebellion in Korea)라는 제목의 표지 기사 하단의 복면 무장폭도는 위 사진의 복면 무장폭도와 동일 인물이다. 일간지 뉴욕타임즈 사진처럼 주간지 뉴스위크 표지 사진도 지프차 본넷에 앉아있는 복면 무장폭도들이 뒤를 따르는 무장단체 지휘관들이었음 보여준다.
1980년 5월 21일 정오 무렵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이 두 사진을 한국인들은 전혀 보지 못하고 외신에만 실린 채 오랜 세월 파묻혀 있었다. 5월 22일자 뉴욕타임즈 지에 실린 사진을 일본인 사진기자가 찍은 것으로서 먼저 5월 22일자 마이니치 신문에 실렸다. "폭도들이 광주를 완전 장악했다"(Rioters Take Full Control Of Kwangju)라는 제목의 이 기사의 존재가 한국인에게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5월 23일 힌츠페터가 두번째로 광주 방문을 하던 날 일본에서 가져와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벽보에 게시된 때부터였다. 광주 시내 벽보에 이 신문이 나붙은 때와 거의 동시에 미국 시간으로 5월 22일 같은 사진이 뉴욕타임즈 지에 게제되었다.
우리가 지금껏 살폈듯이 5월 21일 오전 농민 복장으로 낫 들고 20사단 인솔대를 습격하여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무장단체가 정오경부터 금남로 일대와 전남대 인근에서 무장봉기를 총지휘한 세력이었다. 이 무장폭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마이니치 신문과 뉴욕타임즈와 뉴스위크에 박혀 있었으며, 광주사태 34주년 앞 두고 사진 속의 인물들의 실마리가 잡힌 것은 폭도들의 낫으로 내려 찍으며 20사단 인솔대 운전병들에게서 빼앗은 철모 화이버를 쓰고 있는 모습이 1980년 5월 22일 뉴욕타임즈 표지 기사에 박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역사학도
http://www.study21.org/518/photo/5-21.htm
* 윗글을 읽고역사로서의
5.18 제2권: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를
읽으시면 이해에 훨씬 도움이 되실 것이며, 이미 읽으신 분들에는 윗글이 많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 영화
'화려한 휴가'가 조작한 뉴욕타임즈지 기사
☞ 복면에
가려진 5.18의 비밀을 복면 암호 해독으로 풀기
☞ 힌츠페터와
김영택이 목격한 목포 별동대가 광주에서 무기 분배
☞ 목포
김대중 계열 별동대 5월 20일 총기 무장하고 광주 침투
☞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영상물에 나타난 시민군 최초무장시점
첫댓글 졸라도 시발넘의 발갱이새키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저 사람들이 북한 특수부대원들이다 이거여?
위에 글쓴 사람은 전라도 사람인가 보네?ㅋㅋㅋ 그러지 않고는 저런 알러지 반응을 보일지 않지.ㅋㅋㅋ
북한군 특수부대가 맞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나는 충청도 산골의 한 절간에 재수생으로 있었지요. 그 절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주지와 공양주가 주인이고 화목하니가 하나 있었지요. 그리고 이런저런 시험에 대비하여 시험공부를 하러 온 사람 대여섯과 요양차 머문 사람 하나가 상주했고 이따금 들르는 육사8기생 출신 퇴역대령이라는 함경도 할배가 머물렀지요.
그 주지와 함경도 할배와 요양차 머문 사람 셋은 광주사태 이전의 서울역 시위상황부터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밥먹는 시간에 자연스럽게 이야깃 거리가 되곤했지요. 그 깊은 산속에서...대한민국 라디오는 청취도 안되는...
한 방을 쓴 요양객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상세하게 알 수 있느냐고. 그는 이북 방송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대한민국 방송은 들리지 않으니...
함경도 할배는 NHK와 이북방송을 함께 듣는다고 했어요.
저는 첩첩산중의 절간에 드어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의 봄과 광주사태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들어 알게 되었지요.
어떻케 그들이 44 군데 무기고를 알았을까?
그것은 김대중 간첩이 다 북에다 알려주고 남한을 아주북한에다 접수시킬려는 천인공로할 더러운
빨갱이 짓을 한것 입니다 한국 간첩 대통령10년 세월에 돌이킬수 없는 빨갱이 들이 날뛰고 있지요
우리나라에서 파견한 북에 첩보 활동하는 156 명을 다 처형시키게한 더러운 부관참시를 해도 시원찮은 김대중 Dog Baby 인것입니다
지금 한국에 정치하는 놈들중에 박원순이 문재인이 등등등등 빨갱이들이 정치하는 세상이지 이것을 다 잡아들일 자료는 오직 군사 쿠데타 인데 그것도
미국이 협조하에 되니 또 군에는 얼마나 많은 빨갱이들 법조에는 또 얼마나 많은 그들이 포진해 있는지 상상을 초월
5.18은 그 시절 법과 관행에의해 긑난 문제를
김 영삼 그 분이 역사 바로세우기란? 이유로
5.18광주사태를 민주화 운동으로 지정했다고합니다.
둔갑을시켜 뒤집어 대한민국 역사를왜곡시킨 사실이
다 드러난 이 시점에서 재조명하여 후손들에게 올바로 인식시켜줘야겠지요.
YS는 자신이 민주화를 주도한 장본인이기에 유리하므로
민주화 운동으로 지정했겠지만 이미 둔갑을시킨 사실은 명확히 다 드러났습니다.
정치권 자들이 다투고있는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내가하면:민주화 운동 남이하면;독재주위
그러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남한은 이미 이 승만 정부대에도
미국과 더블어 민주주위 국가였다는것을 잊어서는아니됨.
5.18이 문제가되는것은 중요인물;조사천
그 분을 홍보용으로만 이용하였지
그 분의 일지는 감쪽같이 속였다는것이죠/
발포명령은없었음.조 사천씨가 탄 장갑차가 군인을 밀어
1명사망.1명부상을내고도 광주의 중심부를 질주하고다니니
시민군이 쏴버렸음.전쟁이나 다름없었던 그때 그 상황/
호남인들은 전 두환의 발포명령이라 트집을 잡지만
이미 책자나 인터넷에 뚜렷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참 글올린 넘도 한심한 넘이다 518에 직접목격했고 희생당한
죽은자도봤다
이렇게 가짜로 올려서 영웅이되고 싶냐 씨발탱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