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으면서
1999년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국가정보원은「반제청년동맹」수사와 1997년 10월 검거한 최정남 부부간첩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의 이름이 나온 것을 토대로 김영환과 주변 인물들을 내사했다. 또 국정원은 1998년 12월 18일 남해상에 침투했다가 北韓으로 복귀하던 중 우리 해군 경비함에 격침된 반잠수정 안에서 김영환 등의 전화번호가 암호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김영환은 홍콩으로 출국하려다 공항에서 긴급체포도었고, 관련자 조유식(前 月刊 말紙 기자), 하영옥(무직), 심재춘(대학강사), 김경환(月刊 말紙 기자) 등도 차례로 연행되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1999년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전향한 김영환, 조유식은 석방되고, 하영옥, 심재춘, 김경환은 구속되었다. 김영환은 본명보다는 主體思想을 전파한 「강철 서신」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主體思想의 대부로 평가받았다. 그런 그에게 1989년 7월 北韓 공작원 윤택림(현 대외연락부 5과장)이 접근, 密入北하여 김일성을 만나게 되었고,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지하당 구축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환은 北韓의 기대와는 달리 방북 이후, 主體思想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이 때부터 점점 北韓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에서 내부 조직원인 하영옥 등과 갈등을 빚게 되고, 결국 자수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모두 27명이 수사를 받았는데, 김영환을 따르던 10명의 전향자는 자수로 처리되고, 17명이 구속되었다.
현재 김영환은 같은 주시파 운동권 출신인 홍진표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실장, 한기홍 北韓민주화네트워크 대표 등과 함께 北韓민주화운동과 탈북자 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탈북자와 인권단체들에게 반김정일 활동에 필요한 이론과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그의 연락책이었던 조유식은 전향 후, 현재 알라딘 24 라는 인터넷 서점을 운영하여 크게 성공했다. 한편, 하영옥, 심재춘은 석방되었으며, 현재 김경환만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이상이 386 운동권들이 기억하는 주요 사건들이다. 사실 386들이 기억하는 공안사건들은 당시 구속된 인원 수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이번에 코나스 특집기획으로 밝힌 사건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언론에도 잘 알려졌던 대형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의 고찰을 통해서 독자들은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갈라진 인생 행로와 그들이 현재 보여주는 모습의 원인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접한 자료들을 보면서, 386 운동권들 만의 특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이들의 대화 방식은 과거 정치인들의 권위주의적이거나 스테레오 타입의 대화와는 달리 세련되고 논리적이며 대중적이다. 하지만,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거나 합의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가 자신의 주장과 사상을 타인에게 주입시키고 타인과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는 과거 운동권의 발전 과정에서 빈번했던 이념과 노선을 통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습관으로 변한 것이다. 또한, 불특정 다수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용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특정 인물을 논할 때에는 비판적인 시각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경향 또한, 머리 속에서는 타자에 대한 관용과 사랑을 인식은 하지만, 그것을 실제 행동화 하기에는 가슴 속에 공간이 적다는 것이다. 이런 행태 속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시대의 유일한 양심이라고 생각했던 학생 운동권 시절의 정서, 그 시절에 대한 감성적 접근, 그들이 승리라고 부르는 현 시대에 대한 자긍심과 보상심리 등이 조합된 결과로 보인다.
둘째, 이들은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배타적이다. 이것은 주로 현재 정치권과 시민단체활동을 하고 있는 운동권 출신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엘리트 의식은 명문대 학생이라는 레테르가 주는 사회적 지위와, 당시에는 철저히 금기시 되어 있던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함으로써 남들이 모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우월감 등이 절묘하게 조합된 것이다. 그리고, 배타적 사고와 행동은 이런 사상이 금기시 되는 데서 자신과 동지가 되는 사람들과만 접촉하는 것이 안전했었던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엘리트 의식과 배타적 사고방식은 종종 소영웅심리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지금의 정치권에서 386 정치인들의 무오류성과 기성세대의 무지를 주장하는 행동의 원인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습관은 소위 열사를 규정짓는 그들의 기준을 볼 때에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전교조 활동을 하던 사람이 단체관광하다가 버스 전복 사고로 사망해도 열사이고, 노조 활동을 하던 사람이 수술 중 의료사고로 사망해도 열사이며, 군대에서 사고로 사망해도 의문사이며 열사인 것이다. 즉, 그들과 같은 시각,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인정되고 용서되지만, 아닌 사람은 아무리 좋은 행동을 해도 나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이분법적 가치관과 기준은 청소년 초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으로 미루어 본다면,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386 운동권으로써 타인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정신적인 성장이 멈춰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특징들의 가장 큰 원인이 성장 환경에 있다고 판단한다. 386 운동권 세대는 지금처럼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궁핍함, 굶주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벗어나면서 성장한 세대다. 이들의 부모님들은 현재 60 대 이상의 노년층이다. 이 분들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경제 발전을 위해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분들이다. 하지만, 그 노력의 이면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되는 어두운 면 또한 존재한다. 그 중에는 자식들이 자신과 유사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는 것에 대해 무작정 감사하기만 할 것이라는 믿음도 포함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들에게 산업화와 경제성장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기성세대의 노력과 결과는 별 것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가 가시적인 결과를 얻어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들이 늘 자신들이 이룩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민주화의 성취라는 것도 학생운동권끼리만 할 때에는 제대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다가, 지금 475세대와 그 선배들로 일컬어지는 '넥타이 부대'들과 일반 시민들이 현장에 나선다음에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결과적으로는 그들은 '말'만 무성했고 타인을 희생시키기는 했지만, 스스로가 '실행'을 통해 이루어낸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박정희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기성세대에 대한 컴플렉스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386 운동권들은 기성세대들에 대한 반감과 청년 특유의 오만함, 열정을 통해서만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규정지으려 했다, 또한, 당시의 경제, 사회 발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당연히 이루어 지는 것으로 믿었다. 즉,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기성세대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음에도, 386 운동권들은 기성세대들이 이루려 했던 목적보다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분적 희생에만 주목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마치 전혀 다른 문화권의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양 세대 간의 대화 단절과 이해부족은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까지 초래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황당하게 들릴 지는 몰라도 바로 사람들과의 대화인 것이다. 386 운동권들은 남을 설득하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데에는 능숙하지만, 제대로 대화하는 방법은 배우지도, 써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습관은 지금도 청소년들에게 중고등학교, 대학, 보습학원 등에서 대를 이어 전수되고 있다.(konas) written by. 전경웅 <enoch2051@hanmail.net> 2004-12-24 | |
첫댓글 정말 상세한 자료들이군요. 운동권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