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사그라져 가던 2008년 9월 중순경
가깝게 지내는 한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이 기자는 학교 때 철학공부를 했으니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읽어봤을 거 아닙니까? 난 얼마 전
그게 번역됐기에 뒤적이다 보니 완전히 '촛불 비판서'예요.
마치 홉스가 우리의 '촛불'을 보고서 작심하고 쓴 듯한 구절들이 수도
없이 나오더라니까요. 이담에 촛불이 한국 사회에 던진 의미를 되새김질하기 위해서라도 '리바이어던'은 반드시 읽어두세요."
철학사나
사상사에서 요약된 내용은 수도 없이 봤지만 '리바이어던'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필자는 그날 바로 두권 분량으로 번역된 '리바이어던'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사상사나 철학개론서를 보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자연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국가라고 하는
괴물(리바이어던)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골자로 잘 요약돼 있다.
그래서 그 교수의 전화를 받은 직후만 해도 "아!
촛불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분석틀이 그 책에 들어 있나 보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1651년에
저술되었다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시로 책을 잠시 덮고 호흡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1651년이면 우리나라는 효종 2년이다. 언감생심
북벌(北伐)을 하겠다고 절치부심하던 때였다. 그런 허세라도 부리지 않고서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국가의 기본조차 지탱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357년 전의 홉스는 놀랍게도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양심(良心)이란 말이 사람들에 의해
타락되어 버렸다며 이렇게 개탄한다. "자기 나름의 의견에 완고하게 집착할 경우, 혹은 불합리한 의견을 집요하게 주장하는 경우에 자신의 의견에
양심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붙인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에 대한 분석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남의 의견을 바꾸어 놓으려
하거나 혹은 자기 의견에 반대하면 불법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홉스의 통찰은 계속 이어진다. "기껏해야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정도에 불과한 것을 (양심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진리를 알고 있다는 듯이 주장한다."
촛불이 양심의
상징이라 했던가?
2008년 촛불의 또 한 가지 요소는 군중(群衆)이다. 좌파 쪽에서 지금도 '참여민주주의의 싹'이라고 칭송해마지
않는 그 군중이다. 홉스는 "자신이 영감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런 정념에 사로잡혀 아주 기괴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뿐일 때는 그의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는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지난해 우리가 똑똑히 보았듯이
그것이 덩어리를 이룰 때다. "그런 사람들 다수가 모여 공모했을 때에는 그 군중의 격노가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때리고 돌을 던지는 것보다도 더 큰 광기(狂氣)의 증거가 어디에 있겠는가?" 군중의 이름 뒤에 숨으려는 익명의 개인도 홉스는
놓치지 않는다. "만일 이것이 군중에게 존재하는 광기라고 한다면 그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에게도 광기가 존재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에는 2008, 2009년 한국 사회를 독해하는 데 필요한 구절과 대목들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어 있었다.
그건 어찌 보면 근대국가를 보는 수준에 관한 한 우리가 아직도 한참 뒤처져 있다는 뜻이다. '리바이어던'이란 책은 크게 '인간에 대하여'와
'코먼웰스(국가)에 대하여'로 나뉘어 있다.
'인간에 대하여'는 한마디로 국가를 만들 수 있으려면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를
다룬다. 거기에는 허상에 매달리고 독선을 주장하고 판단력이 결여된 인간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 나온다. 양심의 이름으로 포장된 독선이나
군중의 광기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들이다.
무슨 말인가.
지난해 우리가 겪은 '광란의 여름밤'은 국가를 논하기
이전 단계에 일어날 수 있는 한심한 수준의 이야기이지, 국가를 더욱 성숙시키는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더 부끄럽고
창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