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
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
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
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
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
둡다고만 할 수 없다.
떨어지기 위하여 높이를 가진다
비어 있는 하늘에도 지형이 있다. 하늘을 휘며 팽팽하게
고여 있던 물소리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
지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지상의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다. 높이를 가진 모든 것이
떨어지는 계절이다. 작심한 듯 또 망설이듯 저마다 다른,
저마다의 몸짓으로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날 내가 보았던 것은 멀리서 또 가까이에서 떨어지고
있는 수천의 가을 잎새가 아니라 다시 파란 하늘의 높이를
찾아 올라가고 있는 맑은 물의 한정 없는 가벼움이었다.
바람꽃
논두렁 끝 한 그루 복사꽃이 피는 것은 은빛 잔털 반짝이
는 햇쑥 냄새가 쌀쌀한 바람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꽃이 피
는 것은 동이 트는 것 같이 정밀하다. 땅바닥에 고여 있던 어
둠이 서서히 두께를 잃고 엷어지면서 지면에서 떠올라 나
무 둥치를 타고 그물코처럼 가늘게 퍼지는 실가지 끝으로
사라지듯 잎 진 가지 끝에서 꽃망울은 바람에 묻어 있는 들
내음을 시시각각 살피던 어느 한순간 갑자기 황홀한 파국을
결심한다. 먼 산에 이내 같은 바람꽃이 피어나기 일순一瞬
전前을 겨냥한 화려한 폭발.
허만하 시집《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에서
Lavanda Di Notte by Guido Borel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