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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정보자료 小白菜 청경채_彭麗媛 펑리위엔
류상욱 추천 0 조회 294 14.09.23 14:16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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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9.23 22:17

    첫댓글 쉬었다 갑니다...

  • 14.09.24 11:13

    와~!^^

  • 14.09.27 11:57

    《杨乃武与小白菜》양내무와 청경채

    片尾曲《小白菜》 演唱:陈海燕

      “小白菜,泪汪汪,从小没了爹和娘 청경채, 눈물이 글썽거리며,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어서
      童养媳,苦难讲,就怕逼着去拜堂 민며느리 어려움을 이야기 하는데 혼례를 올리라고 채촉할까 걱정스러워
      半夜里,秋风凉,望着月亮哭断肠 한밤중 가을 바람이 차가운데 달을 바라보며 애절하게 울었네
      小白菜,泪汪汪,苦水比那溪水长,比那溪水长” 청경채 눈물이 글썽거리며 괴로운 삶의 냇물은 저 계곡 물보다 더 길구나 저 계곡 물보다 더 길구나

  • 14.09.27 11:24

    杨乃武与小白菜

    출전: 프리 백과사전 「위키페디아(Wikipedia)」

    「杨乃武와 小白菜」는 청나라 말기에 楊乃武와 畢秀姑(小白菜)가 간통해 남편을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았던 원죄 사건이다. 청나라에서 4 대 의문 사건의 하나로 꼽힌다.
    양내무는 자가 書勲 또는 子釗 이라고 하며, 절강성 여항현 여항진 징청항(浙江省 余杭県 余杭鎮 澄清巷)의 사람으로, 대대로 양잠업과 뽕 재배를 경영하던 거인이었다.
    畢秀姑는 葛家의 민며느리로, 미목 수려하고, 자주 백색의 옷에 녹색의 앞치마를 하고 있었으므로 「小白菜」라고 불리우었다. 양내무는 畢秀姑에 글자를 가르쳐 매우 친밀했어기에

  • 14.09.27 12:05

    세상은 「羊(楊에 통한다)이 배추(白菜)를 먹는다」라고 소문이 돌았다.
    畢秀姑의 남편의 葛品連은 , 1873년 10월 3일에 병으로 사망했으나.
    검시의 결과, 비소에 의한 독살이다고 인정되었다고 하여서.
    知県의劉錫彤 은 양내무와 필수고가 공모해 갈품련을 독살했다고 의심하여, 3회에 걸쳐서 양내무를 고문을 가했지만, 자백을 시킬 수 없었다.
    劉錫彤은 보고서의 「사망자의 입과 코로부터 유혈이 있었다

  • 14.09.27 11:34

    라는 것을「7개의 구멍으로부터 유혈이 있었다」라고 고쳐서, 杭州府에 보냈다.
    杭州知府 陳魯는 한층 더 고문을 했기 때문에, 마침내 양내무는 자백에 몰렸다.
    그 결과 진노는 양내무에 참수형을, 필수고에 능지형을 명하고, 浙江 按察使 蒯賀蓀에 보고했다.

    楊家는 이것에 불복으로서 항변서를 제출했다.
    양내무의 누나 楊淑英(菊貞)은 일찌기 刑部 右侍郎의夏同善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던 적이 있어,
    항변서는 하 동선과 刑部 分管浙江司 刑獄 林文忠을 통해서, 軍機大臣 兼 総理各国事務 衙門大臣 翁同龢의 수중에 닿아,

  • 14.09.27 11:42

    그들은 사건이 원죄라는 의혹을 갖게 되었다.
    서태후는 刑部를 통해서, 절강순무 양창준에 재심을 명해 감찰어사 王昕를 파견했다.
    王昕는 양내무가 비소를 샀다고 자백한 애인당에서는 비소를 판 사실은 없는 것을 밝혀냈지만,
    양창준은 체면를 유지하기 위해서 「간통해 독살했다」라고 상주했다.
    조정은 절강학정 胡瑞瀾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한층 더 심리를 담당하게 했지만, 胡瑞瀾은 형법으로 무지하고, 劉錫彤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고문에 의해서 자백을 강요했다.
    畢秀姑는 유두에 구리 철사를 통과 하게하는

  • 14.09.27 11:45

    고문을 받아 다시 양내무에 부추겨져 살해했다고 자백을 했다. 胡瑞瀾은 양내무에 참수형을, 필수고에 능지형을 명했다. 그러나 감찰어사 辺保泉는 호서란의 심판을 탄핵 했다.
    1874년, 양숙영과 양내무의 아내의 詹彩鳳은 다시 북경에 올라와, 하 동선의 소개로 절강적의 관원 30여명에 無実을 호소했다.
    하 동선과 왕해는 양내무의 無実을 상주했다.
    1876년, 刑部 尚書 桑春栄이 스스로 심리를 담당하게 되어, 갈품련의 관을 열고 검시를 다시 했다.
    刑部에 재직 60년의 검사관이 조사했는데, 독살은 아니고 병사인 것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해 다음 해 2월에 사건의 종결이 선고되어 양내무와 필수고는 석방되었다.

  • 14.09.29 12:56

    그러나 옥중에서의 고문으로 장애를 입었으나, 명예 회복도 없었다.

    양내무는 양잠업과 뽕재배로 여생을 보내다, 1914년 9월에 병사했다.
    필수고는 출가해 비구니가 되어, 법명을 혜정 이라고 하였고, 1930년에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유죄를 주장한 호서란과 양창준은 左宗棠이 인솔하는 湘軍出身「 両湖派」의 인물로, 그들에게 혐의를 씨운 翁同龢 夏同善 張家驤 등은 강소성과 절강성 출신의 「江浙派」의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사건은 「 양호파」와「江浙派」의 정쟁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결국, 원죄가 증명되어 호서란과 양창준 이하 30여명의 관원이 면직이 되어, 좌종당과 「 양호파」는 큰 타격을 받았다.

  • 14.09.29 09:45

    女儿歌
    딸의 노래


    六月里黄河冰不化 유월달 황하의 얼음은 풀리지 않았는데
    扭着我成亲是我大 내 결혼을 서두는 것은 내가 다 컸기 때문이라
    五谷里数不过豌豆圆 오곡 속에 완두가 손꼽히지 않고
    人里头数不过女儿可怜 사람들은 딸의 불쌍함을 생각하지도 않네
    女儿可怜女儿哟 딸 불쌍한 딸이여
    六月里黄河冰不化 유월달 황하의 얼음은 풀리지 않았는데
    公家人不知我会唱歌 관청 사람들은 내가 노래를 할 줄 안다는 것을 모르네
    干石板栽葱头扎不下根 돌밭을 갈아, 양파를 심어도 뿌리가 내리지 못하여
    想说心事开口难 근심을 말하려 하지만 입 열기가 어려워라

  • 14.09.29 12:55

    开口难女儿哟 입 열기가 어려워라 딸아
    天上的沙鸽对对飞 하늘에는 멧비둘기가 짝지어 나는데
    不想我的那亲娘再想谁 우리 어머니를 그리워 하지 않으면 누구를 또 그리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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