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기도
우리가 독방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종종 동요하는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지금 그대의 상황과 함게 그대 자신을 하느님께 내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피정의 목적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성숙시키는 것,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던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체험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를 충만한 사람이 되게 하고, 기도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의 참된 존재를 깨닫는다 라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게 한다.
하느님께 내 마음을 더욱 많이 내맡기어 그분께서 나의 모든 것을 결정하시도록 하는 일,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일, 이것이 바로 피정의 목적이다.
되찾은 은전의 비유- 그 한 닢으로 자기 자신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소란스러운 걱정거리들과 문제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온통 빼앗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는 다양한 것들을 우리 삶에 모으는 중심을 상실하였다. 우리는 기도하고 미사 성제에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우리는 내적 중심을 잃었다. 우리는 진지한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참된 자기를 잃은 것이다.
우리 안에 새겨 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찾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먼저 등불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우리는 집 안을 청소해야 한다. 집 안에는 먼지와 온갖 더러움이 가득 쌓여있고,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참된 모습이 가려져 있다.
피정한다는 것은 자기 집을 비우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인과 우리 집의 모든 공간에 거주하실 수 있게 하는 일이다. 피정은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 내명의 어디엔가 감추어져 있는 은전을 찾으시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불길한 에감, 고통, 상처, 실망, 아픔 등을 언젠가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늘 노력하고 시도한다. 그러나 시도하자마자 이내 다시 중단하고 만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깊은 진실을 드러내려는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에 지나치게 열중하느라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흘려버린다. 하느님께서 우리 이웃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도 듣지 못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음성을 마음속에 받아 들일 경우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의 말을 들을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를 들을 수 있다. 많은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격과 거부의 말을 듣게 될까봐 불안해 하며 아예 귀를 막고 산다.
에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두 귀에 사랑스럽게 손가락을 넣으심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내뱉는 공격적인 말들 속에도 우리와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 갈망이 감추어져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어떤 사람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실제로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우선 신뢰가 자라야 한다.
우리는 아주 종종 우리의 많은 말 속에 우리 자신을 감춘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되도록 깊은 침묵을 지킨다.
침묵은 우리 자신, 그리고 하느님을 대면하게 한다.
우리는 말하는 우리의 혀만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도 다스려야 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나지 않으려고 간혹 머릿속에 머물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는 가운데 우리에게, 우리가 말하고 듣는 모든 말의 핵심이 하느님임을 가르치신다. 우리는 듣는 법을 익힘으로써 성경의 모든 말씀 안에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말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침묵 중에 입과 귀를 닫는 것은 우리가 진지한 마음으로 말하고 듣는 가운데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더욱 예민해지는 법을 배우게 한다.
침묵 중에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내보인다면 우리의 상처와 아픔들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정말 기도하기를 바란다면,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 전부를 그분께 바쳐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상처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이 상처들은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이며,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개방하는 일도 요원해 질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 나를 배척하고 외면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는 점점 나 자신을 고립시킨다. 마치 이스라엘에서 나병환자를 대하던 것처럼 나를 대한다.
많은 사람들은 한정된 생활공간에서 자기 불안, 자기 거부, 다른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지 못하는 아픔과 더불어 살고 있다.
우리도 나병환자처럼 우리의 무기력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받아들인다고 단순히 결정할 수 없다. 이것은 그렇게 결정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치유의 시작은 우리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나병환자처럼 무릎을 끓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외치며 도움을 간정할 때 치유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외적으로 다루시지 않는다.
환자가 당신 안에 들어오게 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와 함께 느끼신다.
그분은 나와 함께 느끼신다. 그분은 나에 의해 상처 입으신다. 그분의 상처 안에서 그분의 상처를 통하여 나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갖다 대신다. 나병환자와 당신 자신 사이에 있는 간격을 메우시는 행동이다. 그분은 환자가 천천히 당신에게 건너올 수 있는 다리를 놓으신 것이다.
기도 안에서 나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손이 나의 모든 것을 만지시게 한다.
우리의 존재 일부와 비참한 것들을 기도 중에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내맡긴다면 우리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부분에 그분의 사랑이 흘러오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건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이 홀로 만나는 사건이다.
기도란 자기 마음의 골방에 들어서는 일, 거기에서 세상의 소음에 문을 닫는 일을 의미한다. 기도는 매우 은밀한 행위이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숨어 계신 채로 기거하신다.
기도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고요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고, 거기에서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숨기는 일을 뜻한다. 그래서 하느님과단독으로 머무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서로에게 숨기는 부분은 우리 자신의 생명력을 앗아간다. 기도란 내 안에 있는 불을 보호하여, 하느님 사랑의 불길에서 내가 다가서야 할 사람에게 불꽃을 전하는 일이다.
성령에 의한 삶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삶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슨 말을 할까 의식하며 고민할 필요가 없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사랑의 하느님을 갈망하는 일을 의미한다.
신앙은 들음에서 온다. 우리의 삶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로 만족해야 하는 일정한 시기가 있다.
묵상은 말씀의 씨가 마음 속에 뿌려져 마음을 충만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뜻힌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면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들이 동의하는지 등에 대해 묻지도 않은 채 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행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를 비판하면 즉시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게 합니다. 하느님을 가진 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만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차단하게 되고 우리의 삶은 어렵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에 대해 거의 기뻐할 수 없다. 우리는 늘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항상 머리로만 산다.
우리가 더 낫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머릿속으로 숙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삶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을 스스로 방해하고 멀리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는 베드로가 언급하듯이 아무것도 모르고 빈둥거리며 살았다. 우리는 욕망대로 살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행하였다.
내가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면, 나는 내가 무엇을 행하고 내가 무엇으로 사는지를 분명하게 의식하게 될 것이다.
헛된 삶은 착각이다. 베드로 1서에 의하면 구원이란 우리가 삶에서 스스로 만든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
”성자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예수 호칭기도를 계속 반복하여 바친다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그분 아드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두 팔을 벌리신다. 그분은 공생활 중에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하셨다.
껴안는 것은 사랑의 본질적인 표현 행위이다. 껴안는 행위에서 나는 다른 사람을 붙잡을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또 다른 사랑을 찾아볼 수 있다.
붙잡는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놔두는 사랑을 바라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두 팔을 활짝 벌리심으로써 당신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다. 그것은 당신 자신을 희생하시는 사랑이다.
예수님의 활짝 벌린 두 팔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마음을 온전히 개방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께서는 열린 마음에서 모든 사람에게 부어졌다. 예수님의 열린 마음을 묵상하는 모든 사람은 이 사랑을 마실 수 있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사랑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로 움츠러들었고 자신의 마음을 닫아버렸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당신 사랑을 통해 인간에게 사랑하는 능력을 다시 주신다. 그분은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당신 몸을 구부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감추었던 그들의 상처를 자애로이 보살피셨다. 이것이 발 씻김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상처가 가장 심한 부위를 만지시고 치유하고자 무릎을 끓으신다.
땅의 먼지와 오물로 인해 더러워진, 무척 초라한 우리의 발을 씻기 위해 무릎을 꿇으신다.
우리 인간이 가장 쉽게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약점을 아킬레스건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가장 큰 상처는 죽음의 상처이며, 죽음에서 가장 철저하게 드러나는 고독의 상처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당신의 몸을 구부리시어 우리의 상처 부위를 당신의 사랑으로 어루만지시고 치유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