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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기사와 주유소가 열어준 행복의 문
청량리발 첫 열차편으로 도착한 원주의 시간은 1월 6일 7시 42분.
소초면(所草)행 시내버스(41번)의 기사가 낯익다 싶었는데 그가
먼저 날 알아보았다.
전번에 나를 위해 위법을 서슴치 않았던 바로 그 기사다.
그 때 승차했던 정류장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는 하차지점까지 짚어주며 늙은이의 남은 장도를 축수했다.
관심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고맙기 그지없는 그 기사야말로 원주시의 홍보대사다.
생전 2번째인 원주시내버스인데 거푸 그의 버스라니.
이 연속된 재회야 말로 확률로도 희소한 일이므로 인연으로 돌릴
수 밖에 없겠다.
수선혜님의 인연론대로 다시 만나게 되면 참 좋겠다.
소초면은 본시 원성군의 한 면으로 흥양리 '소새바우'에서 면명을
따온 이래 이제껏 바뀐 적이 없단다.
면사무소 앞에서 시작한 시각은 8시 30분.
아직 출근시간대라 선지 42번국도 원주방향이 차량으로 붐볐다.
수암2리(壽巖)에는 상도곡, 수동, 식송동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식송동은 옛 식송역(植松驛)이 있던 마을이다.
버스정류장 안내판에서 식송동을 확인은 했으나 수암2리 농업인
건강관리실 일대일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히 집혀지지 않았다.
옛 식송점(상,중)과 수암주유소(하)
치악산이 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일까.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현대오일뱅크 수암주유소로 들어갔다.
늙은이가 추워 떨고 있는 것이 역력해 보였던가.
난로의 화력을 돋우고 따끈한 물을 내놓았다.
낙동정맥 검마산휴양림의 김운년님 생각을 불러온 온정이다.
(백두대간과 아홉정맥41, 42회글 참조)
자택이 서울 종암동이라는, 나보다 두살 연하의 부(父)와 자(子)가
경영한다는 주유소다.
부자가 집을 떠나 먼 예서 사업하는 까닭이야 나그네가 관심 가질
일이랴 마는 서울이라는 공통분모의 힘일까.
연배 또는 아버지의 연배라는 이유일까.
부자가 내게 각별했다.
내가 걷고 있는 옛 대로에 관심을 공유하겠다는 뜻인가.
해남, 진도의 울돌목(鳴梁)이 외가라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걷는데 도움될 것을 주고 싶으나 휴지뿐이라며 배낭 안에 판촉용
휴지를 잔뜩 넣어주기도 했다.
젊은이는 곧 라일락향기(닉네임)가 되어 우리 카페에 왔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객관적인 데이터(data)가 있는가.
단지, 느낌일 뿐이다.
버스 기사와 주유소 부자가 늙은 길손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그들이야말로 원주의 하루를 행복하게 했다.
행복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강원감영의 메시지
42번국도는 소초면을 벗어나면 소초로에서 소일로로 바뀐다.
태장동 우곡소류지의 북쪽 소일마을을 통과하므로 그랬는 듯.
태장동은 정순옹주(福蘭: 이조9대성종과 숙의홍씨의소생)의 태실
(胎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성종은 정궁(正宮)만 연산군의 생모 폐비 민씨를 포함해 3인이며
무자인 남씨를 포함해 10후궁 등 13명의 여자를 거느렸던 왕이다.
이조 27왕중 1위다.
처음엔 태장동(胎藏)이었는데 일제때 한자표기가 태장(台庄)으로
바뀌었다나.
원주천을 건넌 후 일산동 강원감영(江原監營) 길을 물었으나 하나
같이 모르거나 버스 또는 택시를 타란다.
모두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거나 차만 타고 다니기 때문일까.
걸어서 가는 길을 제대로 대지 못할 뿐더러 걷는 사람을 괴이쩍은
시선으로 대하기 일쑤다.
사람들의 그릇된 안내, 거리 안내판의 오도(誤導) 등으로 장님 뒤
따르다 개울에 빠지듯 헤매는 고생 끝에 감영에 도착했다.
감영은 (道)관찰사가 주재하던 관청으로 현 도청에 해당한다.
'강원도'는 영동의 강릉도(江陵)와 영서의 교주도(交州)를 통합할
때 양도의 중심지인 강릉과 원주의 첫자를 조합한 이름이다.
이조 태조 4년(1395년)의 일이다.
500년 역사의 웅장한 강원감영이 날벼락을 맞은 것은 1895년.
고종32년에 조선 8도(道)가 23부(府)로 개편될 때 원주는 충주부
예속으로 다운시키고 감영을 춘천으로 이전해 버린 것.
요새라면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춘천은 축제마당이 되겠지만 원주는 인동까지 가세하여 유례없는
관민 일체의 반대투쟁을 벌일 것이 명약관화다.
철시는 물론 삭발 단식자가 속출할 것이다.
부동산 경기를 비롯하여 상권이 곤두박질침으로서 주민들이 패닉
(panic)상태에 빠지고 말텐데 아니 그러겠는가.
지금, 국력 낭비중인 세종시 사건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어땠을까.
고소원이나 불감청이었다며 쾌재를 부르지 않았을까.
층층시하의 말단에게 상전은 적을 수록,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편하고 좋다.
관찰사는 종2품고위직으로 9품까지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이 몽땅
떠난다면 향리(鄕吏)들에게 이보다 더 잘 된 일이 있겠는가.
상민, 천민들도 가렴(苛斂)과 부역(賦役)당하고 굽실거릴 일이 그
만큼 줄어드는데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나의 사건이 180도, 극과 극으로 변신한다.
역사의 변천이 이리도 무상한가.
포정루(布政樓)는 강원감영의 정문으로 지방관의 어진 정사가 잘
시행되는지 살펴보던 누각이란다.
루문을 들어서는데 목에 명패를 건 노인이 반가이 맞았다.
원주시 문화관광 해설사 최석홍 옹이다.
연배이면서도 입장은 다르지만 모처럼 오붓한 역사산책이었다.
사적공원 조성사업으로 사적 제439호 강원감영을 복원중이란다.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도유형문화재 제3호)과 정문인
포정루를 보수하였으며 중삼문, 내삼문, 행각 등을 복원하고 내아
(內衙:청운당)를 해체보수하여 개방했단다.
강원감영의 포정루(상), 선화당(중), 해설사 최석홍翁
최옹의 해설은 이즈음의 표현으로 톡톡튀는 젊은 이에 당할 수는
없겠지만 진지하고 연륜과 관록이 묻어있어 흐뭇했다.
역사의 전승자라는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진 그에게서 오늘의 골칫
거리인 노인문제의 한 해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강원감영'이 이 시대에 보내고 있는 다양한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는 점이라 하겠다.
평해대로 스캐치7(지정)
감영을 나온 이후 고심을 거듭하며 걸었다.
만종역 앞을 지났으므로 양자중 택일해야 하는 사제삼거리가 코앞
인데도 아무 결정 없이 걸었으니 우유부단인가.
동교하선(冬橋夏船:大東地志)의 안창역(安昌驛) 길이 둘이다.
42번국도를 따라 가다가 문막에서 '동화첨단의료기기산업단지'를
관통해 섬강을 건너가는 길이 있다.
다른 하나는 만종역 직후 사제사거리에서 바로 42번국도를 이탈,
질마재를 넘고 지정면소재지를 지나 섬감을 건너는 길이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아마도, 횡성 전재의 트럭 접촉사건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서 대형
차량들의 횡포가 심한 길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보통리 질마재를 넘었다.
삼표레미콘공장 일대가 약간 소란할 뿐 한가로운 88번지방도로다.
지명으로는 어색한 '보통리'가 오히려 관심을 끄는 것은 역설이다.
당초에는 섬강(蟾江)가에서 떨어졌다 해서 모퉁이라 했단다.
모퉁이가 보퉁이, 다시 보통리로 변음된 것을 1914년의 행정구역
정비때 普通里로 한자표기했다는 싱거운 유래다.
질마재(상), 간현관광지(중상, 중하, 하)
지정면소재지 간현(艮峴)역이 제법 붐빈다.
간현국민관광지 덕일 것이다.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雉티岳악이 여긔로다"
송강(松江鄭澈)의 '관동별곡'에 나오는 '섬강'이 여기란다.
92.6km의 섬강은 횡성군 태기산에서 발원해 간현관광지를 이루고,
안창, 문막을 거쳐 부론면 은섬포(銀蟾浦)에서 남한강에 합수된다.
섬강철교 북동쪽 1km지점의 커다란 바위가 두꺼비가 기어 오르는
형국이라 해서 섬강(蟾江)이라 부르게 되었다나.
섬강(지정대교)을 건너 안창 들녘을 걸는데 큰딸네가 사준 빵으로
식사를 갈음함으로서 시간이 많이 절약되었다.
안창1리회관 앞을 지나는데 두 촌로가 나왔다.
하도 반가워 먼저 알음을 튼 후 안창역터를 물었다.
안창1리의 전주이씨 이기석님은 70세라며 형님으로 모시겠단다.
주호인지 벌써 취기가 있는 그는 타고난 친화형(親和型) 이미지로
지역의 인기있는 영감인 듯.
안창1리(상), 폐초등학교(중상), 옛 안창역(중하), 신설교량(하)
그는 안창과 문막 동화(의료기기산단)간의 섬강에 신설된 다리 이
쪽지점 역말이 안창역터라고 설명했다.
이 교량의 효과는 안창과 문막의 편리는 물론 솔치넘어 경기 동북
지역까지 뻗히겠다.
옛길은 역사 산책로
해가 빠른 속도로 서녘으로 달리는데다 머뭇거리다가는 붇들리고
말 것 같은 예감에 서둘러 작별하고 나섰다.
곧 의민공사우(懿愍公祠宇) 앞이다.
이조14대 선조의 국구(國舅:仁穆王后의 아버지)로 연흥부원군(延
興府院君)인 김제남(金悌男1562~1613)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그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사(賜死:
光海君5년)되었으며 3년후(1616년)에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사자(死者) 공포증이라도 있었던가.
부활을 믿는 것도 아닌 때에 곧 썩고 말 시신의 목까지 베다니?
미구에 닥칠 그 업보가 두렵지도 않았던가.
능촌마을 표석(상), 의민공사우(하)
실은, 선조가 세자(世子) 광해군 대신 유일한 정궁(正宮:仁穆王后)
소생인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등과 비밀리에 의논했다.
그러나, 선조의 돌연한 승하(昇遐)로 광해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서
득세한 대북파(大北派)에 의해 소북파(小北派)가 숙청된 것이다.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이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몰락하고 그의 관작(官爵)이 복원됨으로서
출생지인 여기(安昌1里)에 사당과 신도비가 건립되었나 보다.
안창1리의 핵은 능촌(陵村)이다.
능촌이라는 이름은 김제남의 묘가 있다 해서 붙혀졌단다.
동서고금을 망라해서 피로 염색되지 않은 권력이 있던가.
그러니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E.H. Carr)라기 보다 영원한
악순환의 과정이다.
정죄(定罪) 숙청(肅淸)과 신원(伸寃) 복권(復權)이 반복되는....
그럼에도,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비처럼 계속해서 뛰어들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88번지방도로와 안창 ~ 문막 동화산업단지 새 길의 새 삼거리, 옛
안창역터 한 쪽에 '을미의병봉기기념탑'이 서있다.
대원군의 협력을 받은 일본이 명성황후(고종妃)를 시해한 이른 바
을미사변(1895년)과 단발령에 항거한 의병들의 봉기다.
안내판에 의하면 을미년 11월 28일(陰)의 안창역 봉기가 을미의병
활동의 효시란다.
을미의병봉기기념탑(상), 해설판(하)
민비를 시해한 토우 카쯔아키(藤勝顯) 일당은 일본공사 미우라(三
浦梧樓)의 하수인이다.
그가 황후 시해에 사용한 칼, 히젠토(肥前刀)가 일본 후쿠오카(福
岡) 구시다진자(櫛田神社)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여러 해 전에
재일동포 역사학자 최서면(崔書勉)님에 의해 확인되었다.
최근, 한 단체가 이 칼의 국내환수 또는 폐기를 주장한단다.
"'一瞬電光刺老狐'(단칼에 늙은 여우를 찔렀다) 라고 새겨져 있다는
히젠토는 우리나라 국치(國恥)의 상징이다. 지난 100여년간 발생한
양국간의 비극적인 업보를 상징하는 이 칼이 폐기되거나 한국 측에
인도돼야 한다. 범행 도구였던 흉기이므로 당시 조선정부에 압수되
었어야 했다. 범인이 명성황후를 이 칼로 살해했다고 자백했는데도
일본의 신사에 기증돼 민간이 소유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
는 주장이다.
Shally의 법칙에 따른 하루였다
아무튼, 옛길은 아주 훌륭한 역사 산책로다.
그러나, 산책에 안주할 해가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마침내, 다리에 바람이 일 시간이 된 것.
솔고개(松峙) 오르는 고갯길은 심심산골이다.
빨리 사라져 가는 해에 미련 버리고 피치(pitch)를 올렸다.
어쩌다 오고가는 차량은 판대유원지와 한솔오크밸리를 드나들 뿐
거의 적막강산인 고갯길 88번도로였다.
송치마루에서 끊으려던 계획이 양동 한하고 연장될 수도 있겠다.
편승할 차량이 없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날로 더 흉흉해가는 세상인 탓인지 낮과 달리 밤의 편승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늙은이의 이점도 확인될 수 없으니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송치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시점에 고갯마루에 막 올라섰을 때, 안창
쪽에서 올라오는 한 승용차가 스스로 내 옆에 멎었다.
홀로인 갖40대 중년녀가 겁없이 한적한 고개에서 차를 세우다니.
그녀도 사람을 구경할 수 없어 무척 답답했던가 보다.
흔한 네비도 없이 시골길에서 길을 모르니 그럴만도 했겠다.
우리는 곧 윈윈(win-win)관계가 되었다.
그녀는 나를 통해 갈길을 확인했고, 나는 어렵지 않게 양동역까지
진출하게 되었으니까.
원주의 찜질방을 찾아가려 하는데 양동역발 원주행 열차시간에는
저녁식사할 시간이 배려돼 있다.
정녕, 아침에 행복의 문을 열어준 이들 덕인가.
셀리의 법칙(Shally's Law)에 따른 하루였으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