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적곡 마로입니다.
김 진 선생님의 경우에도 상당히 고심을 하셨던 문제이고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만 낙랑군과 최씨 낙랑국의 문제는 여전히 고민거리 중 하나지요.
일단 최씨 낙랑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고민거리입니다.
하여 여기서는 확실한 사실 몇 가지만을 토대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보고자 합니다.
우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래 올린 그림과도 같이 이병도 혹은 일제 사가들이 주장하는 한 사군설입니다.
말 그대로 서한(西漢)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깨뜨리고 한반도의 대부분을 뭉텅 집어삼켰다는 주장이지요.
그러나 한 사군 중 낙랑군을 제외하고는 그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보수적인 성향의 한국 역사학계에서조차도 수긍하는 바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아래 이병도 방식의 점령은 말이 안 되는 바가 적지 않지요.
무엇보다 기원전 108년 멸망 이전에도 위만 조선의 힘이 한강 이남 지역까지 뭉텅 점령할 수 있을 정도였는지도 의심스럽고 서한도 위만 조선을 온전하게 점령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한 낙랑군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물과 유적이 확연히 남아 있는데 그들의 흔적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요.
단지 서한의 입장에서도 낙랑군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이 얼마나 경제적 가치 있는 땅이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한 사군이란 다들 잘 아시겠지만 지도에서도 나오다시피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현도(혹은 토)군(玄토郡)·진번군(眞番郡)을 말합니다.
이병도 학설에 따른 한 사군의 영역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북부 지역의 행정구역은 모두 오늘날의 북한 행정구역을 따라 설정했습니다.)
낙랑군 - 평안남도 일대 및 평양직할시
임둔군 - 함경 남·북도, 양강도, 강원도(북한지역은 물론 남한지역까지 모두)
현토군 - 평안북도, 자강도+집안지역
진번군 - 황해 남·북도+한강이남 마한지역
여기서 신빙성에 의문이 가장 많이 남는 지역은 물론 진번군입니다.
무엇보다 서한이 자기네한테 대들고 반항한다는 명분으로 침략했던 나라가 위만조선인데, 가만히 앉아 있거나 아니면 무역로를 막는다고 서한에 호소했던 예성강 이남 혹은 (한반도) 북부 지방 이남지역의 영역들을 집어 삼킨다는 소리가 어처구니 없지요.
실제 서한의 사정도 점령한 위만조선 지역 다스리는 것조차 머리 아픈데 어느 세월에 한강 이남까지 집어 삼켰겠습니까?
임둔군도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당시 갱제…가 아닌 경제 형태를 보아도 서한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지역은 역시 쌀을 생산할 수 있는 평야지대입니다. 고대 동아시아 경제는 어차피 매사가 쌀이었으니까요.
앞의 4월 14일자 글과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서한의 입장에서 보면 낭림산맥 서쪽지역 즉 평안남·북도, 황해남·북도 및 자강도 정도가 정치적·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땅들입니다.
반면 낭림산맥 동쪽지역 즉 함경남·북도, 양강도, 강원도는 서한 입장에서 그리 큰 가치가 없는 땅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래도 쌀을 생산할만한 지역 중 하나인 함경남도의 경우 함흥평야나 영흥평야 정도가 당시 기술력으로 보아 쓸모 있는 땅입니다만 거기를 차지하려면 낭림산맥이니 함경산맥이니 하는 산들을 넘어야 하지요.
이쯤되면 서한 입장에서도 에너지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기네 땅이랑 가까운 황해(서해) 지역의 땅만 잘 개간해도 잘 먹고 잘 살 판에 무엇이 아쉬워서 함경도를 개척하려 할까요?
중국의 역사책에 의하면 낙랑군은 서한의 왕인 소제(昭帝) 때인 BC 82년에 진번군을 병합하여 그 일부에는 새로 낙랑군 남부도위(南部都尉)를 분치(分置: 나누어서 설치)하고, 그 관하에 소명(昭明)·대방(帶方)·함자(含資)·열구(列口)·장잠(長岑)·제해(提奚)·해명(海冥)의 7현을 두고 그 가운데 소명현(昭明縣:信川)을 남부도위의 치소 즉 구 진번군의 중심 도시로 삼았다고 합니다.
글 쓴 사람인 저도 머리가 핑핑 도는데 읽는 분들은 더하시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이른바 한강유역의 마한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진번군의 영역을 황해남도(잘 해봐야 황해북도까지) 일대로 축소하고 그 진번군 마저도 낙랑군에 통합시켰다는 말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저는 이러한 기록들이 서한의 장난질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즉 역사 기록처럼 '서류상으로는' 서한의 야심 혹은 흑심은 한강 이남도 넘보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진번군이라는 군현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던 탓에 요즈음 은행 합병하듯 낙랑군에 통폐합 시킨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좀 더 대담한 의문을 제기한다면 저는 사실 진번군이라는 군현이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마저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아주 없었다고 하기에는 진번군은 경제적 가치가 있는 황해남도의 재령 평야와 연백 평야를 소유하고 있으므로(그러니 서한 사람들이 쉽게 포기 했겠습니까) 좀 신중히 생각할 문제입니다만 적어도 진번군의 통치가 신통치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지요.
여하튼 확실한 사실은 이병도의 주장만큼 한 사군이 광역 군현이었는가 하는 데 대해 문제점이 많다는 점 입니다.
또, BC 75년에는 앞서 BC 82년 현도군에 폐합되었던 임둔군의 고지(故地)도 병합하였다 합니다.
서류상으로야 통폐합입니다만 실제 26년만에 진번군이니 임둔군이니 하는 행정구역이 생긴지 얼마나 되었다고 낼름 없어지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과연 이들 군현이 한반도에 있었는지 혹은 제대로 설치조차 되었는지 의문스럽지요.
여하튼 임둔군을 합병한 현토군은 그 관할구역이 너무 광대하고 멀어서 단단대령(單單大嶺:함경남도 長津郡과 咸州郡 사이의 황초령黃草嶺) 이동(以東: 즉 함흥평야 일대입니다.)의 옛 땅에는 낙랑군 동부도위를 분치(:나누어 설치)하고, 그 관하에 동이(東이)·불이(不而)·잠대(蠶臺)·화려(華麗)·사두매(邪頭昧)·전막(前莫)·부조(夫租) 등 이른바 영동(嶺東) 7현을 두었다고 합니다.
한문 많은 문장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가시기 바랍니다. 머리 아프니까요. 다만 풀어서 말한다면 임둔군이라는 지역도 역시 진번군과 같은 때 현토군에 통폐합되었다는데 임둔군의 경우 진번군보다도 경제적 가치가 더 떨어지는 지역입니다.
그런데다 산넘고 물건너야 하는 곳인만큼 서한 사람들에게는 더 매력없었던 땅일 가능성이 높지요.
한데도 '서류상'으로는 서기 전 82년에야 그곳을 폐지했다고 하는 중국 역사책도 그렇거니와 강원도 지역을 뭉텅 차지했다고 주장한 일제 학자들, 현대 중국의 학자들 및 이병도가 너무 드러내놓고 거짓말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여 문화교류는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경제적 가치도 별반 없는 땅을 뭉텅 집어삼켰다고 함은 아무리 보아도 허풍이 지나친 듯합니다.
글이 길어져 다음으로 미룰까 합니다.
회원 적곡 마로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