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망제단비(五代 望祭壇 碑)
五代 望祭壇 碑 (비석 원문)
嗚呼嗟哉로다 세상에서 抑冤하고 悲憤한 일을 當하는 사람이 허다하지마는 宜寧 南公 諱 怊의 子孫 된 우리들이야 어찌 다 말로 다 表現할 수 있으랴
公은 朝鮮朝 開國功臣 領議政 諡 忠景公 諱在의 5代孫이요, 駙馬 宜山君과 貞善公主의 孫으로서 赫赫綺麗之門에 生長한 몸이 一朝에 竄逐流配의 身勢가 되었으니, 그 抑鬱하고 悲痛한 心情이야 그 누구가 想像인들 할 수 있으리요.
長兄 諱 怡는 靑年時節에 兵曹判書가 되었으니, 그의 弟氏인 公이 꿈엔들 厄運이 닥칠 줄이야 生覺치 못했을 것이다.
나는 왜 공의 諱字가 怊로 命名되었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 恨스럽다.
奸臣 柳子光은 將軍의 擢進하는데 猜忌해서 白頭山 詩句中에 未平國을 未得國으로 고치고 慧星論에 除舊布新之象이라고 한 것을 가지고 逆謀가 있다고 庸君暗主를 弄絡해서 親鞫한 가운데서 刑場의 이슬로 化하게 되었고, 將軍이 刑에 臨할 때에 曰徹天之恨은 大丈夫가 어린애 같은 柳子光의 誣構에 죽는 것이다 하셨다.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 華麗하던 忠勳勢家가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고 孤絶 珍島配所로 가시게 되었으니 父母의 산소도 瞻掃치 못하고 그 悽慘한 光景이 눈에 보는 듯하다.
그 辛酸한 곳에서 4대가 存沒하도록 簒逆之族이란 陋名은 벗겨지지 않고 及其也 壬辰倭亂(?)을 當하여 공의 5대손 휘 應生이 避亂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珍島에 있는 4대의 封瑩도 省楸를 못하고 8년 兵亂의 긴 歲月과 靖亂後에도 盜賊의 發扈로 道路가 艱難하여 瞻掃之誠을 이루지 못하고 避亂地인 舊 靈山縣 동쪽 龜尾洞 現 九山里에 奠居하심으로 드디어 失墓하게 되고, 이 4대 墓所가 在珍島鄕校後麓이란 記錄만 있으니, 우리는 이 5대의 墓所를 찾을 수 없는 것이 徹天之恨이 되었다.
天運이 循環하여 純祖 戊寅年에 傍後孫 領議政 諱 公轍이 廷中에 建白하여 兵曹判書 諡 忠武公의 抑冤을 伸雪하고 官爵도 復元되고 次孫承嫡할 것을 自上判下함으로서 우리가 昭簡公까지의 奉祀孫이 되었고, 哲宗 乙卯에는 龜尾洞에 龜峯書院을 刱設해서 忠景公을 主壁으로 昭簡公과 忠武公을 配享케 되었고, 貞善公主 不祧廟 宜山君도 春秋香火를 올리게 되었고, 縣監公 諱 愾의 墓所는 脩護되고 있는데, 惟獨 우리 所蒙 諱 份과 諱 怊, 諱 仲謹, 諱 세유世兪, 諱 仁壽의 墓所는 永永 失傳되었으니, 有子孫이란 體面이 있을 수 없다.
宗會決議로 五代 望祭壇碑를 昭簡公 墓下에 設壇하기로 하니, 諸宗이 庶民自來하듯 相役함으로 可謂不日成壇되었다.
於是乎上으로 祖先의 英靈에 安慰를 드리며, 아래로 後孫된 우리들의 忿愾했던 心情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設壇의 經緯를 大綱 적고 係之以銘曰 於赫宜南은 簪纓世家라 忠景은 翊贊하여 陪陵配廟하고 賓府封君은 曰惟宜山이라 忠武는 神勇하여 擢拜兵曺라 奸凶子光이 陰搆毒螫이라 詩語慧論으로 誣獄이 旣成이라 二弟連坐에 一珍一庇라 覆巢之恨에 瞻掃不能이라. 四代居珍하셨으나 墓所失傳이라. 叩地叫天하나 寂寂無音트니 天運이 循環하여 雪冤復爵이라 五代失墓가 爲子孫恥라 宗議設壇에 不日成之라 英靈不眛에 是憑是依하소서. 爲子孫者여 虔致守護할지어다
서기 1984년 5월 일
昭簡公 17世孫 斗熙 謹撰 海州 吳昌根 謹書
5대망제단비(해역문)
아! 탄식스럽도다.
세상에서 억울 원통[抑冤]하고 비통 분개[悲憤]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허다하지마는 의령(宜寧) 남공(南公) 휘(諱) 초(怊)의 자손 된 우리들이야 어찌 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공은 조선조 개국공신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충경공(忠景公)이고 휘(諱)는 재(在)의 5대손이요, 부마(駙馬) 의산군(宜山君)과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손자로서 혁혁하게 아름다운 가문에서 생장한 몸이 하루아침에 쫓겨나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 억울하고 비통한 심정이야 그 누구가 상상인들 할 수 있으리요.
큰 형인 휘(諱) 이(怡)는 청년시절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니, 그의 아우인 공이 꿈엔들 액운(厄運)이 닥칠 줄이야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나는 왜 공의 휘자(諱字)가 초(怊)로 명명(命名)되었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간신 류자광(柳子光)은 장군이 발탁되어 나아가는 것을 시기해서 백두산(白頭山) 시구 가운데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未平國]'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未得國]'으로 고치고 혜성론(慧星論)에 '옛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펼치는 형상[除舊布新之象]'이라고 한 것을 가지고 역모가 있다고 용렬하고 어두운 군주를 농락해서 친히 국문한 가운데서 형장의 이슬로 화하게 되었고, 장군이 형(刑)에 임할 때에 "철천의 한은 대장부가 어린애 같은 류자광의 무고에 죽는 것이다."고 하셨다.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 화려하던 충훈(忠勳)의 세가가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고 외 딴 진도(珍島)의 유배지로 가시게 되었으니 부모의 산소도 살피지[瞻掃] 못하고, 그 처참한 광경이 눈에 보는 듯하다.
그 고생스러운[辛酸] 곳에서 4대가 살다가 돌아가시도록 찬역(簒逆)의 일족이란 누명은 벗겨지지 않고 급기야 임진왜란을 당하여 공의 5대손 휘 응생(應生)이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진도에 있는 4대의 봉영(封瑩)도 보살피지[省楸] 못하고 8년 병란(兵亂)의 긴 세월과 병란이 안정된 뒤에도 도적의 발호로 도로가 어려워[艱難]하여 묘소를 살피는 정성[瞻掃之誠]을 이루지 못하고 피란지인 옛 영산현(靈山縣) 동쪽 귀미동(龜尾洞) 현재 구산리(九山里)에 머물러 살게 되어 드디어 실묘(失墓)하게 되고, 이 4대 묘소가 진도의 향교 뒤 기슭에 있다는 기록만 있으니, 우리는 이 5대의 묘소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철천(徹天)의 한이 되었다.
천운이 순환하여 순조(純祖) 무인년(戊寅: 1818)에 방후손(傍後孫) 영의정 휘 공철(公轍)이 조정에 건의하여 아뢰어 병조판서 시호 충무공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신설(伸雪)하고 관작(官爵)도 복원되고, 차손(次孫)이 적자를 계승할 것을 임금으로부터 판결이 내렸기 때문에 우리가 소간공(昭簡公)까지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고, 철종(哲宗) 을묘년(乙卯 :1855)에는 귀미동(龜尾洞)에 귀봉서원(龜峯書院)을 창설(刱設)해서 충경공(忠景公)을 주벽(主壁)으로, 소간공(昭簡公)과 충무공(忠武公)을 배향케 되었고, 정선공주(貞善公主) 부조묘(不祧廟:나라에 공훈이 있는 이는 그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봉안하고 향사(享祀) 하게 하는 특전) 의산군(宜山君)도 봄가을로 향화(香火)를 올리게 되었고, 현감공(縣監公) 휘 개(愾)의 묘소는 길이 보호되고 있는데, 유독 우리 직계[所蒙] 휘 분(份), 휘 초(怊), 휘 중근(仲謹), 휘 세유(世兪), 휘 인수(仁壽)의 묘소는 영영 실전(失傳)되었으니, 훌륭한 자손이 있다라는 체면이 있을 수 없다.
종회의 결의로 <오대망제단비(五代望祭壇碑)>를 소간공(昭簡公) 묘소 아래에 설단(設壇)하기로 하니, 여러 조원들이 서민자래(庶民自來:주 문왕(周文王)이 영대(靈臺)를 지으면서 서두르지 말라고 하였지만, 백성들이 마치 자식들처럼 달려와서 금세 낙성하였다.)하듯 서로 일을 하였으므로 얼마 되지 않아 제단을 이루었다.
이에 위로는 조선(祖先)의 영령(英靈)에 안위(安慰)를 드리며, 아래로 후손된 우리들의 분개(忿愾)했던 심정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설단의 경위를 대강 적고 다음과 같이 명을 붙인다.
아, 혁혁한 의령 남씨는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네於赫宜南 簪纓世家
충경경은 태조를 도와 능묘를 모시고 묘정에 배향되었네忠景翊贊 陪陵配廟
부마로 군에 봉해진 분은 의산군이네賓府封君 曰惟宜山
충무공은 신묘한 용략으로 병조판서에 발탁되었네忠武神勇 擢拜兵曺
간흉 자광이 몰래 해독을 얽어奸凶子光 陰搆毒螫
시구와 혜성론으로 무함한 옥사가 이미 이루어졌네詩語慧論 誣獄旣成
두 아우가 연좌되어 한분은 진도, 한분은 비인(庇仁)으로 귀양갔네二弟連坐 一珍一庇
둥지가 엎어지는 한으로 성묘도 할 수 없었네覆巢之恨 瞻掃不能.
4대 동안 진도에 살아 묘소도 실전 되었네四代居珍 墓所失傳.
땅을 치고 하늘에 울부짖어도 고요할 뿐 소리가 없네叩地叫天 寂寂無音
천운이 순환하여 원통함이 신설되고 관작도 회복되었네天運循環 雪冤復爵
5대를 실묘한 것은 자손의 부끄러움이네五代失墓 爲子孫恥
종회에서 설단하기로 의논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었네宗議設壇 不日成之
영령은 어둡지 않으시니 이곳에 기대고 의지하소서英靈不眛 是憑是依
자손된 자들이여 공경을 다하여 지키고 보호해야 하리爲子孫者 虔致守護
서기 1984년 5월 일
소간공 17세손 두희(斗熙)가 삼가 짓고, 해주 오창근(吳昌根)이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