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율법과의 관계-서철원
p.12.
바울은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루터처럼 구원 서정적으로 곧 칭의 관계에서 어찌 내가 구원에 이를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 아니라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p.16.
개혁교회는 루터교회처럼 칭의를 강조하나, 이에 더 나아가 성화를 강조하므로 칭의에만 과도히 집착하지는 않았지만 이신득의가 그 출발점이요, 기초임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p.22.
루터에 의하면 회개가 율법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율법의 의에 절망하여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꺼꾸러지고 겸허한 탄식으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고, 세리와 함께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죄인인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눅18:13)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리가 의로워져서 집으로 갔다. 왜냐하면 이 의(p.24)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자비, 진리, 의, 힘과 지혜이다. 이 의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고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이름은 죄, 속임, 헛됨, 어리석음이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모든 죄가 용서되고 의가 그들에게 전가된다."
위에서 우리가 루터의 말들을 직접 인용해서 살펴본 것처럼 먼저 율법을 선포하여 사람들로 절망에 이르게 한 후 복음을 선포하여 그들을 믿음에 이르러 의가 전가된다. 이 이해에 의하면 이방인들이 처음 믿음에로 들어올 때 복음선포가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율법이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먼저는 율법을 선포하고 그 다음단계로 복음을 선포하여 이방인들을 믿음에로 인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성취하사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복음만 선포하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기 때문이다.
p.31.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다. 이 진리는 그리스도 이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시대에도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롬3:20). 또 바울에 의하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모든 세상으로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하심이다(롬3:19).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타락한 인류를 사람의 종교적 방식으로가 아니라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 그를 믿는 믿음의 방식으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모든 족속을 불신앙 아래에 가두시고, 죄의 권세 곧 율법의 정죄 아래 있게 하셨다.
p.36.
바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단지 믿음의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구속사적으로 본다.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불가능의 정황에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통상 한 동양인의 관념대로 하나님은 (p.37)내게 한 씨를 주셔서 끊기지 않고 대를 잇게 하시는구나 하고 인간적인 혈통이 이어짐을 감사하고 믿은 것이 아니라, 이삭을 주시기로 약속하실 때, 그것도 젊은 시절 다 지나고 인간적 가능성이 있을 때가 다 지나 후,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심은 혈통이 이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세상 구원의 섭리가 있음을 보았다.
바울은 이 진리를 갈라디아서에서 밝힌다.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많은 자손이 아니라 한 자손을 지칭하시고 이를 네 자손이라고 하신 것은 이삭이 아니라 이삭의 씨를 통하여 구속주를 주시겠다는 섭리로 아브라함은 보았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아브라함은 보고 기뻐하며 웃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에서 그리스도의 출생을 보았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하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삭의 후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다. 세상 구원자를 아브라함의 씨로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가 믿었는데 그 약속을 믿음은 바로 구원자를 믿는 것이었다. 바로 이 믿음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기셨다 이 진리를 바울은 갈 3:6-18에서 전개한다. 그러므로 이 처음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430년 후에 율법이 와도 변경되지 않았던 것이다.
p.39.
갈라디아서 3:19에서 율법은 범법 때문에 더해 졌는데 오직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만 유효하다. 즉 율법은 지킬 수 없고 범함만 많게 되므로 율법 전에 주신 약속 곧 율법과 구분된 의의 길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길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열망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즉 율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서 어서 율법의 완성자가 오십사 하고 바라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p.44.
바울은 몽학선생의 사례를 당대 로마세계의 사회 제도에서 차용하여 왔다. 로마시대의 자유인은 많은 노예들을 소유하였다. 이 노예들은 주인의 완전 소유물로서 물건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으나 그들 중에서 능력있는 자들은 주인에게 간택되어 여러 가지 중요한 가정의 일들을 맡았다.
그 주요한 일들 중의 하나가 주인의 모든 권한과 소유를 상속받을 주인의 아들을 교육시키는 일이다. 이 교육을 위해 특별히 학식과 덕이 겸전한 노예를 골라 세상의 지식을 전수하도록 몽학선생 곧 가정교사로 세웠다. 그 가정교사는 주인의 아들 곧 자기의 주인이 장성하여 주인이 정한 날 상속 잔치를 베풀 때까지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이 교육기간에는 아들이라도 완전히 노예의 지도와 규율아래 있어서 노예처럼 살고 노예의 지배 아래 있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 노예와 동일한 생활을 하였다. 전적으로 노예의 지배 아래 있음으로 노예의 지시아래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노예 가정교사가 받는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상속권을 물려주기로 작정한 날이 오면 노예는 그 아들을 주인에게 돌려 드리며 주인께서 지시한 대로 모든 교육을 다 마쳤으므로 주인의 상속자 되기에 합당합니다라고 하면 주인은 그날 큰 잔치를 배설하고 크게 기뻐하던 중 자기의 손에서 반지를 빼어 아들의 손가락에 (p.45)끼워주므로 모든 아버지의 권한과 소유가 그 아들에게 이양된다. 그러면 방금까지 선생이던 노예들도 다 그 앞에 무릎 꿇어 주인으로서 합당한 공례를 그 아들에게 행한다. 그 이후에는 그 가정교사들이 전혀 자기들의 학생이던 주인에게 아무런 권리나 세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p.83.
위에서 살핀대로 종교개혁의 신경들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관해서 가르치기를 그리스도 이후에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고 그 기능은 종결되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 때부터 율법을 의식법, 시민법(정치법), 윤리법으로 나눈 것을 좇아 분류하고 의식법은 폐지되었고 시민법은 지금도 다 타당한 것이 아니고, 윤리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규범으로서 타당하고 강화되었다는 가르침을 따랐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구원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고 믿음으로 하는 진리요, 바로 이 구원을 위해 율법이 몽학선생으로 주어졌다는 진리에는 명확히 도달하지 못했다. 단지 제2서서 신앙 고백서만 이 진리를 밝혔다. 따라서 루터의 가르침에는 지금 복음의 역사 후에도 구원의 길로서 율법이 그 권리와 권세를 주장하는 것처럼 되어져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런 수준의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p.84)그러나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진리가 신경에 표현되었다. 이 표현에 있어서 종교개혁 신경들이 신약의 가르침의 빛 아래에 서 있다.
p.130.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기능 종결과 폐지를 말하는 히브리서와 종교개혁 신경들도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기를 율법 중 윤리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더욱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마 5:18에 말씀하신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은 통상 윤리법에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