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와 나가노목사
일본의 유명한 목사님중 평생을 빈민을 위한 삶을 사신 존경받는 목사님인 가가와 도요히코라 (Kagawa Toyohiko)라는 목사님이 계시다.
이 분은 중국에서 까지 빈민사역을 했던 크게 존경 받으셨던 분이셨는데
어느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사랑했는지는 일화에서도 볼 수 있다.
아주 심한 변비환자가 변비때문에 거의 숨이 끊어지는 그런 위급한 상황이 되자
그 환자 항문에 자기 입을 대고 침으로 그것을 녹이면서 빨아내어 사람을 살린 일화이다.
그런데 이런 가가와 도요히코를 만들어낸 분이 일본의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였다.
그가 북쪽의 카나사와 지역에 텐트를 치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5년이 지나도 교인이 없었다.
5년 만에 한 폐병환자가 찾아왔는데 그가 바로 가가와 도요히코였다.
처음엔 폐병환자인지 몰랐고 같이 식사를 하는데 청년이 기침을 하다가 피를 밥상에 쏟아 놓았다. 순간 나가노 목사님이 이걸 쫓아내야 하나 아니면 씻겨주고 밥을 먹여야 하나 고민을 하다
그래도 5년 만에 제발로 찾아온 사람인데 내가 내쫓을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세수대야와 수건을 가져다 그것을 다 치우고 씻어주고 같이 밥을 먹었다.
그리고 폐병환자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가 방황하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주님께 자기 생애를 드렸으며 신학교에 다니다가 폐병환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학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가노 목사님이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해주었는데
그날 밤 성령이 임해서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의 생애를 그렇게 괴롭게 했던 폐병도 완전히 치유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평생 병들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역을 하며
일본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까지도 큰 존경을 받았다.
나가노 목사님에게는 그가 평생 사역하는 동안에
회심시킨 오직 1 사람이 가가와 도요히코였다.
그는 비록 1 사람을 회심시켰지만 그 1 사람은 너무나 큰 인물이었다.
일본 사회에 기독교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인가를 온 몸으로 보여준 1 사람의 성자가
나가노 1 사람을 통해서 마침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었다.
헌신된 사람은 또 다른 헌신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더 넓혀주길 원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길 원하고,
날마다 하루하루의 자신의 삶이 생생한 하나님의 능력의 증언의 날이 되길 원한다면
먼저 우리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자신을 날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여야 한다.
가가와 도요히코 (賀川豊彦 1888∼1960)
일본 사회운동가. 고베[神戶]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미국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메이지학원[明治學院]·고베신학교에시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신학생 시절, 고베시의 빈민굴에서 살며 전도를 시작했고, 프린스턴대학에서 수학한 뒤 빈민굴로 돌아갔으며, 1920년 《사선(死線)을 넘어서》의 출판으로 유명해졌다. 21년에 조선소 노동쟁의를 지도하며 노동운동가로 활약하였고,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 후 도쿄[東京]로 옮겨가 복지시설을 개설, 구제활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사업을 벌였다. 노동운동·농민운동·소비조합 및 협동조합운동 등을 창시한 그리스도교적 사회주의자였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그 반전평화사상(反戰平和思想)으로 헌병대와 경찰에 구류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히가시쿠니[東久邇]내각에 참여하여 참회운동을 일으키고,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가하여 고문(顧問)이 되었다. 저서가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고, 유럽 및 아시아 여러 나라로 초빙되어 전도와 강연을 하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가가와의 특징은 속죄애(贖罪愛)의 실천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치·사회·경제에로의 구체적인 응용의 시도였다. 저서로 《한 알의 밀》 《빈민 심리 연구》 등이 있다.
[출처]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와 나가노목사|작성자 청산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와 나가노목사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20세기 초, 일본에서 갓 안수 받은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일본은,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는 어느 곳에 가서 교회를 개척할 것인가 일본 지도를 펴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동서남북 100킬로미터 이내에 단 한 명의 교인도 없는 곳을 찾고 보니 북쪽 가나사와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젊은 청년 목사는 곧 그 지역으로 가, 텐트를 치고 개척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놓고 창립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는데 교인이 오지 않았습니다. 6개월이 지났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도할 때는 열심히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6개월 동안 교인이 오지 않으면 "하나님 뜻이 아니구나"하고 옮기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나가노 목사는 그 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곳에 보내 주신 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자리를 무려 5년을 지켰습니다. 아내와 아이만을 두고서요.
5년만에 찾아온 첫 교인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에 장막의 커튼을 젖히고 첫번째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5년 동안의 그 어떤 설교보다도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에 그 청년을 데리고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 도중에 이 청년이 '욱'하더니 피를 쏟았습니다. 폐병 환자였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순간적으로 속에서 갈등이 일었습니다. '이런 괘씸한 사람이 있나? 이 사람을 지금 당장 쫓아 버려야 하나, 아니면 내가 이 핏덩이를 쓸어 내고 계속 함께 밥을 먹어야 하나?'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처음 보내주신 사람인데...' 나가노 목사는 자기 손으로 핏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가 청년과 다시 먹었습니다.
그 청년은 일본의 유명 정치인의 사생아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출신이 그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괴로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음을 접하게 되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폐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 파문을 당했습니다. 나으면 다시 오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생각할 때 '성경은 거짓말이구나, 예수도 거짓말이다, 나는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 나의 폐병을 옮길 만큼 경솔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단 한 사람이라도 폐병 환자인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대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자살의 문턱에서 구원받은 영혼
이 청년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자살 전에 우연히 한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쪽 가나사와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고 하는 목사가 있는데, 거기를 한번 찾아가 보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니 나가노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날 저녁에 밥을 먹다가 피를 쏟았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피를 닦아 내고 다시 밥을 차려왔습니다. 그 순간에 이 청년은 다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청년의 폐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고베와 도쿄에서 수없이 많은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을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내어놓았습니다.
변비 환자들의 성자(聖者)
빈민들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변비입니다. 항문에 변이 차돌처럼 굳어 있어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장갑을 끼고 손으로 후벼 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그 빈민들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후벼 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그 빈민들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후벼 주었지만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거지처럼 더러운 빈민의 항문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고, 차돌 같이 굳어 있는 변을 침으로 녹여서 빨아 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기자가 가가와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배운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패전한 일본인들이 중국에서 무사하게 철수한 까닭!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중국의 빈민들을 위해서도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을 모셔서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도 했습니다. 1945년에 일본이 패망했습니다. 일본 군대와 함께 민간인들이 철수합니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나라에서 일본 민간인들이 철수할 때 현지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랜 세월 동안 그 땅을 착취한 사람들인데, 갈 때 어떻게 테러를 당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지독하게 당한 곳이 사할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패망 당시에 중국 땅에 있던 일본인의 숫자는 200만 명에 달했으나, 그 중에 단 한 사람도 테러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천황의 항복 성명과 동시에 장개석 총통이 포고령 제1호를 내렸습니다. 철수하는 일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전 이후 포고령 1호입니다. 그 배후에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감동이 있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나가노 목사의 기적
여러분, 나가노 목사는 평생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밖에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경제 논리로 보면 실패한 목사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없었더라면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는 없습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빈민들의 항문을 빨아줄 때, 그 심중에는 나가노 목사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가가와 목사가 중국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칠 때, 그 속에는 나가노 목사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우라 아야꼬 여사는,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도 위대하지만, 그 한 사람을 배출한 나가노 목사가 더 위대하다고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으면 '결과'를 기다리지 않는다
여러분, 나가노 목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의 중요성을 안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장막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내일을 위한 예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5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각혈하는 폐병환자까지 수용할 정도로 큰 진설병을 지니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성적인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감성만을 가진 신앙의 소유자였더라면, 5년 동안 수십 번 텐트를 옮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으로, 의지적 결단으로, 하나님을 위해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결코 결과를 보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 목회의 결과를 보기 원했더라면, 머리 숫자만을 중요시했더라면, 각혈하는 청년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기에 섬김과 봉사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나가노를 통하여 가가와 도요히코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퍼온 글
[출처]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와 나가노목사|작성자 하나님의 자녀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