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확실한 감정의 표시다. 라는 글을 읽었다. 정말 눈물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확실한 징표일까. 나는 요즈음 성경을 읽다가 찬송을 부르다가 눈물이 자꾸 흐른다. 아예 옆에 휴지를 가져다놓고 ,성경을 읽으며. 찬송을 부른다. 메마른 감정은 아니라고 보지만, 눈물이 없는 사람은 감정이 없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싶다. 우리 아버지들 어디 눈물 흘리던가. 혼자서 석탄 백탄 타는 가슴 하고 벽을 치는 것은 보았다.
눈물은 언어로 표명될 수 없는 내면의 함성, 그것이 눈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라고 정의 하지만, 언어로 표현 못하고, 응어리 남아 있을 때는 그것이 한이 되고 못이 된다. 한이 되고 못이 되어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 눈물조차 흘릴만한 여유도 없던 그들의 삶이었다. 절망에서 심한 갈증으로 아픔이 내면의 함성은 각양 각가지로 표현 되었다.
내면의 함성이 자살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내면의 함성이 승화되어 가는 인격으로 나타나며
아름다운 노래로. 그림으로 , 글로서 표현되어 진다.
절망의 함성이 무엇으로 표현하느냐 에 삶의 완성으로 가는지, 아닌지, 갈림 길이 된다. 절망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값비싼 인생을 논할 수 있을까, 사랑을 앓아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사랑의 고매한 경지를 알까,
죽을 만큼 사랑한 사람이 가지는, 아름다음 영원한 영혼의 향이다. 내면의 함성을 무엇으로 표현 하는 것이 따라, 어떤 삶을 살아 갈 것인가 결정이 된다.
도스도엡스키는 그 절망과 굶주림과 고통은 아름다운 연인을 탄생 시키었다. 만인의 연인을 만들어 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그 뼈저린 가난이, 가난한 나라 지하자원도 풍부 하지도 못한 조그만 땅덩이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절망이, 시린 가난에 내면의 함성은 공부, 공부 하지 안했는가.
우리나라가 잘사는 나라가 된 동기는 공부한 머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산업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조국을 방문하면 해마다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거리게 된다.
처음 이민 와서 한국 사람이 아앰재패니 하던 때도 있었다. 이젠 당당히 아앰코리엔 하고 있다. 내면의 함성들이 눈물로가 아니라 우리도 잘살자 라는 언어로 표현 되어 나온 것이다, 나는 이민 와서 바로 육군부대 청소를 한 적이 있다. 장군 실을 청소 하면서 한국에 군복무를 하신 분들이 감사장을 받던지, 공로상을 받은 상패를 보면 “안 되면 되게 하라 ” 쓴 상장을 본다. 그 말이 참 좋았다. 내면의 함성이다, 안되면 되게 하라, 우리의 내면의 함성이다.
우리나라는 좁은 땅덩이, 인구는 많고, 부족한 상항에 그렇게 울부짖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가 6.25의 폐허속애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그런 어려움 속에서, 이북에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들은 가는 곳마다 십자가를 세우고, 새벽기도를 시작하고, 북한산에 가서 부르짖었다.
못살겠으니 살려달라고 울부짖은 것이다. 내면의 함성이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너도 나도 그 함성은 서울의 산을 반들반들 하게 만들었다.
새벽 네 시면 교회당에 모여서 울부짖으며 살려 달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억눌리고 가난에 쪼들린 우리 어머니들의 축적된 함성은 마침내 대한민국을 교육으로 치닫게 되고, 강국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가진 내면의 함성을 어디에 쓰느냐에 삶이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