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시 혹은 모국어의 힘 -권석창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월간지 혹은 계간지를 통해 발표되는 많은 양의 시를 읽으면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해할 수 있는 시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더 많다는 사실에 얼마간의 부끄러움과 함께 반성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시라는 갈래의 글쓰기 자체가 기존의 의사소통의 언어가 생성할 수 없는 시 고유의 의미나 이미지를 생성해내는 특별한 언어 구조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시도 의사 소통을 전제로 하는 언어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어떤 이는 난해시의 정의를 어렵지만 분석하면 의미의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지만, 요즘 창작되고 있는 어려운 시들은 60년대에 논의되었던 난해시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어려운 시라 생각된다. 가령 이상의 난해시는 기존의 시의 문법을 벗어난 것이기에 기존의 시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에게 낯선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기법이 도입될 때는 새로운 기법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요즘 필자가 읽고 있는 어려운 시에서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 쓰기의 진지함 혹은 언어에 대한 엄정성이 요구되는 시기가 아닌가 한다. 민중시가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던 시기에는 어려운 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민중시 이후에 전개되는 시들 가운데 어려운 시가 갑자기 많아진 양상도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지속을 반복한다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문학의 흐름도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요즘 발표된 시들 가운데 쉽게 읽히는 시들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여름은 유난히 긴 장마 끝에 유난히 긴 무더위가 이어졌다. 참으로 힘겨운 여름이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난민에 포격을 가하고, 북미 관계는 긴장이 고조되고, 일본은 자꾸 독도가 자기 땅이라 하고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여 우리를 화나게 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해방이 된 것 같고 민주화가 온 것 같았는데, 남북관계의 긴장은 지속되고 있고, 일본 제국주의는 다시 부활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여름은 더 무더웠다. 일제 강점기의 어느 여름도 올해 여름처럼 이렇게 무더웠으리라. 광복이 되고 민주화가 되었다고 우리의 역사가 마치 진보하는 것처럼 희망을 가졌는데 광복된 지 61돌이 되었는데 민족문제는 아직도 무더위와 같이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한다. 고은의 '수하'는 해결되지 않은 민족사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어렵지 않은 시의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나는 8.15다
나는 6.25다
나는 4.19다
나는 5.18이다
나는 6.15다
정지! 수하? 나는 밤 세운 짓고땡이다
- 고은, 수하(誰何), 사람의 문학, 2006. 여름
수하(誰何)라는 말은 군에서 수상한 자를 발견했을 때 '누구냐?'라고 묻는 말이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고비를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6.15다'라는 은유는 화자와 역사적 사건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는 시의 화자의 정신이 우리 현대사와 얼마나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며 화자가 선택한 숫자들이 시인의 역사 의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섯 개의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들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이며 수난의 해결 과정이기도 하다. 8.15에서 6.15까지의 우리 현대사는 몇 개의 숫자로 기록된 것이지만 숫자 이면에는 피의 역사이며 죽음의 역사가 내재되어 있다. 시인은 '나는 숫자다, 라는 은유를 통해 그 역사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여기까지 시는 엄숙하게 전개되다가 '나는 밤 세운 짓고땡이다'에 와서 급격한 전환을 이룬다. 피 흘려서 이루어 온 우리의 역사를 짓고땡과 병치시킴으로써 현대사의 아이러니를 자조적으로 변조시켜버리고 있다. 민주의 제단에 혹은 민족의 제단에 희생된 사람들에 의해 여기까지 온 우리 현대사가 올 여름 장마처럼, 더위처럼 머뭇거리고 있는 현실에 대한 원로 시인의 일갈이다.
금강산에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간다 나도 백두산 천지 한 번 보고 눈감고 싶구나
아버지 말을 듣고 내 무능한 경제를 한탄하는 밤
삼팔선아, 너를 지우려면 이제 더 많은 삼팔선을 나는 그어야겠구나 - 손택수, 삼팔선, 실천문학, 2006. 여름
삼팔선을 지우기 위해서 더 많은 삼팔선을 그어야겠다는 역설이 이 시의 핵심이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은 이 시대의 시인이라는 자가 현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한 가닥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현실을 떠나서는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일찍이 어느 비평가가 지상의 연줄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연은 추락하고 만다고 지적했듯이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어떤 문학적 사유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남북 교류마저도 없던 냉전 시대의 통일에 대한 논의는 민족으로서의 그리움, 통일에 대한 염원 등 추상적 언어로 채워진 시들이 주류를 형성했으며 이로 인해 용공, 혹은 친북이라는 비난에 시달림을 받기도 했다. 그리하여 통일을 주제로 한 시는 그 시선이 현실에 직접 닿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6.15를 거쳐 실질적인 남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기에 추상적인 메시지만으로는 현실 문제를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음을 시인들은 자각하고 있다. 손택수의 현실 인식은 전 시대의 통일 논의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지점, 혹은 보다 객관적인 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삼팔선을 지우기 위해서 더 많은 삼팔선을 그어야겠다는 역설은 보다 객관화된, 보다 균형 잡힌 시인의 현실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중학교 1학년 짜리 아들 녀석 살살 구슬려 설날 할머니한테 받은 세뱃돈으로 아삼삼 한 마리 값으로 두 마리 주는 통닭 시켜 먹으면서 "아들아, 아빠가 이래 돈은 못 벌어도 네 국어 책에 실린 시를 쓴 시인들하고도 잘 아는 사이이고 무엇보다 니네들 학교 국어 선생님들보단 한결 위대한 정통파 시인 님 이시다" 낄낄낄 "그냥 통닭이나 먹어 아빠..." - 육봉수, 노동자 시인, 사람의 문학, 2006. 여름
육봉수의 '노동자 시인'을 읽으며 두 가지의 어구가 떠올랐다. '시로 쓴 시인론'이라는 말과 '윤동주'라는 말이다. 동주는 일제 강점기의 주권 없는 백성으로 살면서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살기 어려운 현실에서 쉽게 시를 쓰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그가 더욱 괴로웠던 것은 예수처럼 저물어 가는 하늘에 붉은 피를 흘리며 자기 희생을 하지 못 하고 시밖에 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실제 윤동주의 이력에는 현실에 직접적으로 저항한 기록이 없다. 윤동주 시는 시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고민이며 궁핍한 시대에서 시인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고뇌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서시', '쉽게 씌어진 시', '십자가' 등의 시만 보아도 읽을 수 있는 사실이다. 육봉수는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시인이다. 육봉수는 시인으로서 노동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노동 현장의 체험을 바탕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러기에 그의 관점에서 보면 체험 없이 시를 위해 삶을 자료로 쓴 시를 보면 그것의 허구성이 금방 드러나고 말 것이다. 아들과의 대화 형식을 빌어 쓴 위의 시는 두 개의 대조 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과서에 실린 시와 화자의 시가 대조를 이루며, 시인이란 이름을 중요시하는 화자와 현실의 복잡함에 물들지 않은 아들이 대조를 이룬다. 이 시의 화자는 노동자 시인으로 치열하게 시를 쓰지만 현실에서는 아들의 용돈으로 통닭을 사 먹는 존재로 희화화되고 있으며 천진 무구한 아들에 의해 풍자되고 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시로 쓴 시인론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요즘 살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정부에 전가시킨다. 군사 정권 시기에는 침묵하던 입들이 민주화된 정권에서는 터진 봇물처럼 말의 홍수를 이루고 있다. 물론 경제 성장에 걸맞는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비난하고 있는 말만큼 우리의 생존이 위태로운가는 보다 객관적 잣대로 검증해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모습은 살기 어렵다는 말의 홍수 속에서도 명품을 찾고, 최고를 찾는 자본주의의 마법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저녁이 오면 고기가 고기를 필요로 할 것이다 쟁반이 날아다닐 것이다 쟁반을 타고 고기는 날아다닐 것이다 쟁반을 타고 고기는 사라질 것이다 막무가내 어둠이 세상에게 검은 옷을 입힐 것이다 개털옷을 입힐 것이다 머리통이 커다란 세상은 아침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 옷을 입고 벗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빨다 만 뼈다귀를 내버려두고 잠든 개코 위에 똥파리 같은 아침이 날아와 앉을 것이다 코를 벌름거리며 입 언저리에 남아 있는 어둠을 핥을 것이다 우리는 개가 되었던 밤을 추억할 것이다 개가 되었던 밤을 서서히 잊을 것이다 엉덩이라 부르는 두 쪽 살덩어리를 씰룩거리며 돌아다닐 것이다 - 유홍준, 저녁이 오면 고기가, 실천문학, 2006. 여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머리통이 커다란 개털 옷을 입은 괴물에 비유하고 있는 언어의 상상력이 뛰어난 시로 읽힌다. 자본주의는 소비와 향락을 부추기고 불필요한 재화를 낭비하게 하고, 먹지 않아도 좋을 고기를 무지막지 먹어 대고, 무분별한 에너지의 사용으로 결국은 이 지구라는 별을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으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우주적 자각 없이 큰 머리 통 속에 욕망을 가득 담고 밤이면 개처럼 향락에 몰입하고, 똥파리 같은 아침이 오면 남루한 자신의 모습을 잠시 추억하다가 다시 잊어버리고 새로운 밤을 맞이할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우리는 잘 알고 잊지만, 이러한 현대인의 초상을 개털 옷을 입은 개의 모습으로 비유한 시인의 상상력이 아니면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금방 잊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시를 통해서 현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시적 상상력과 적절한 비유의 힘이 현실을 시로 변용시키는 시인의 사명이 아닌가 한다. 현실을 시로 변용시키는 데는 반드시 언어의 힘이 매개한다. 우리 시를 우리 시답게 하려면 우리말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말은 힘이다. 시는 말의 힘을 통해 시인의 매시지를 전달하는 언어구조다.
빗방울이 개나리 울타리에 솝-솝-솝-솝 떨어진다
빗방울이 어린 모과나무 가지에 롭-롭-롭-롭 떨어진다
빗방울이 무성한 수국 잎에 톱-톱-톱-톱 떨어진다
빗방울이 진디밭에 홉-홉-홉-홉 떨어진다
빗방울이 현관 앞 강아지 머리에 돕-돕-돕-돕 떨어진다
- 오규원, 빗방울, 문학과 사회, 2006. 여름.
앞의 유홍준의 시가 비유의 언어를 통해서 힘을 얻고 있다면 오규원의 시는 음운의 힘에 주목하고 있다. 빗방울이 사물에 떨어져 어떤 소리를 내는가 하는 것은 우리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빗방울이 어떤 사물에 떨어질 때 각기 다른 어떤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이 시의 화자는 언 듯 듣기에 비슷한 자연의 소리 속에서 가장 미세한 귀를 열고 자연의 소리에서 가장 유사한 모국어를 발견해 내고 있다. 화자가 찾은 모국어의 음운은 유홍준의 시에서처럼 개가 되었던 밤을 추억하며 잊고 있었던, 자연의 깊이를, 혹은 우주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힘이 있다.
검은 지붕 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이 필 때 붉은 고무대야에 수돗물을 틀어놓고 찌든 이불을 치댈 때 흰 구름이 지붕을 덮고 나무를 덮고 마을을 덮고 지나갈 때 까칠까칠한 수염의 가장이 숫돌에 칼끝을 문지를 때 지붕으로 뛰어 올라온 닭이 벌어진 꽃의 이름을 깨물을 때 기둥에 매달아놓은 옥수수종자가 아장아장 아이에게 말을 걸 때 둥근 집의 살림은 댓돌 위의 신발처럼 늘어났다 - 이기인, 지붕 위의 살림, 사람의 문학, 2006. 여름
위의 시에 열거된 이미지들은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그러나 몹시 그리운 이미지들이다. 숫돌에 낫을 가는 까칠한 수염의 가장, 고무대야에 발로 밟아 이불을 빠는 모습, 기둥에 매달려 있는 옥수수, 마당에 모이를 쪼고 있는 닭, 댓돌 위에 벗어놓은 신발 등의 직서적 이미지들은 지금은 현실에서 실종되어 버렸고 언어만 남아 있다. 시인은 이런 모국어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흔들릴 때 과거로의 여행을 하게 해 준다. 이기인이 선택한 우리말들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람의 문학, 2006.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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