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전서
1장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으면서 생계를 겨우 이어가는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성경에 베드로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는 없고 장모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처가살이를 한 것 같은데 그것도 동생까지 데리고 처가살이를 한 것 같다.
벳세다에 가면 베드로의 가족 이야기는 없고 벳세다에서 조금 떨어진 가버나움에 장모의 집이 있다.
고향은 벳세다라고 하지만 처갓집이 벳세다에 있었던 것이다. 지식이나 모든 면에서 평범한 어부였지만 마침내 사도가 되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 지극히 낮아지셨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신분에서 가장 높이 된 자가 베드로일 것이라고 말을 한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베드로를 평가할 때 학문 없는 범인인데 저들의 지식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닌가! 하고 놀라는 장면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의 내용을 보면 대단한 경지에까지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신앙서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열심히 한다고 지식 갖춰지는 시대가 아닌데도 베드로 전후서를 읽어보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을 느낀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해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자주 당부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힘써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은혜로 믿어진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그릇으로 성화되기 위해서는 전심전력으로 너희 진보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하는 바울의 이야기나 베드로의 생각이 같다.
예수님께서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바울도 읽는 것과 권하는 것에 착념하라고 하신 것처럼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는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베드로가 같이 강조 하고 있다.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당시 보다 지금은 훨씬 더 심각한 수준에까지 왔다. 지금은 마귀가 부끄러운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는 막가는 종말로 치닫고 있는 시대이므로
예수님만 믿으면 마귀가 근접을 못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귀신이 하는 소리이다. 예수 믿는 다고 하지만 귀신이 들어 있는 자가 많다. 각성하지 않으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CTS에서 구원파가 이단이라고 방송을 했더니만 구원파 사람들이 2000명이 몰려와서 CTS를 훼방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시대가 되었고 어느 누구도 이단에 대한 확실한 기준과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하지 않고 청년들은 교회에서 온갖 전자 악기로 소리만 내다가 예배당 밖을 나가면 아무 능력도 힘도 없는 믿음이다.
신약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지만 베드로 전서와 후서는 베드로가 쓴 편지 인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기록 했는지는 학자들 간에 불확실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이 편지는 바벨론에서 기록했다고 되어 있는데(5장 13절) 성경대로 믿지 않고 자꾸만 해석을 하려고 하니까 논쟁만 계속되는 것이다.
벧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성경대로 바벨론에서 기록 하였다고 생각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로만 카톨릭에서는 여태까지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하면 베드로는 AD45경부터 이미 로마에 와서 자리를 잡고 사역을 하면서 로마교회는 베드로가 세웠다는 엉터리 주장을 한다.
커바디스 영화를 보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니까 주님께서 “네가 버리고 간 십자가를 지기위해 로마로 간다.”는 대사는 교회사를 기준으로 쓴 대본이 아니다.
이것은 18세기에 살았던 카톨릭 신자의 “헨리크 생키에비치”라는 작가의 작품인 “커바디스 도미니”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것을 마치 교회의 역사처럼 인용하여 설교를 한다.
지금도 교황청 밑바닥에 가면 베드로의 무덤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성경 어느 곳에도 역사책 어느 곳에서도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내용은 없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바벨론을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답시고 바벨론을 로마로 인식하려고 한다.
베드로가 어떻게 순교했는지 로마에 갔다는 증거가 도무지 알 수 없다. 소설에 나오는 내용은 로만카톨릭에서 지어낸 이야기이므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중세 1000년을 카톨릭이 써온 교회사에 이어서 개신교의 역사를 이어가기 때문에 이것은 순 엉터리 교회사이고 개신교에서는 다시 교회사를 집필해야 한다.
중세 로만카톨릭이 성경대로 믿으려고 하는 위그로파, 왈도파(the Waldensians), 알비파들을 800년 동안 종교재판을 하여 죽였는데 그런 것은 교회사에 단 한 페이지도 나오지 않음
베드로전후서가 바벨론에서 기록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를 비교해 보면 두 서신에서 묻어나오는 단어와 사상과 내용이 너무 비슷하여 마치 같은 방에서 기록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유다는 페르시아에서 순교 했으므로 베드로는 유다와 가까이 있으면서 자주 교재하고 함께 공감하면서 유다서를 쓸 즈음에 베드로를 거기서 썼다고 유추 할 수 있다.
문자대로 바벨론에서 썼다고 생각하지 않고 영적으로 로마를 바벨론으로 표현 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를 묵시문학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
바벨론에서 기록한 시기는 AD64~AD65 경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네로가 AD64~AD67년까지 기독교를 박해함으로 성도들에게 환란이 닥치게 됨으로 우리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 금보다 더 귀하게 정금같이 된다는 표현이라든지 환란과 핍박이 올 때 그리스도인이 소망을 든든히 하여 죽어도 소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천국의 소망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네로의 박해를 의식하고 기록한 것이다.
자기 자신도 순교를 피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떠날 기한이 가까워 졌다고 표현함)될 때 베드로 후서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기록한 연대: 예루살렘의 멸망인 AD70년 까지는 가지 않고 AD64~AD67년경에 기록하였고 기록 목적: 박해시대에 절대로 믿음과 소망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우리 믿음은 약하고 보잘 것 없지만 우리는 택함을 받았으므로 택함을 강조하면서 구원 받을 소망을 잃지 말 것을 당부 한다.
연약하여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 하지만 우리는 영생받기로 작정된 사람으로 결국(시기에 차이는 있지만)은 믿게 되고 구원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택함을 굳게 하라!” 바울의 마음에 있는 것들이 묻어 나오는 표현이다.
수신자: 터키 전 지역(폰투스, 갑바도기아, 아시아...)을 대상으로 편지를 기록하고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 번에 걸쳐 흩어졌다.
첫째는 북왕국이 망할 때(BC721) 흩어지고 두 번째는 남왕국 유다가 망할 때(BC586) 흩어지고 세 번째는 예수 믿고서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흩어졌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많이 흩어졌는데 흩어진 사람들 중에 예수 믿은 사람들
성령강림절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주를 영접하고 흩어진 사람들
스테반 집사가 순교할 당시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사람들
바울이 전도하여 믿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나그네라는 것이고 흩어진 것이 비극이지만 복음전파의 차원에서 보면 진보가 된다. 흩어진 사람들이 모두 전도자이므로
외국선교사들의 모임에서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서 공산화가 되어 핍박으로 인하여 복음에 열심인 사람들이 온 세계로 흩어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다.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택한 받은 사람인데 오히려 나라도 없이 나그네가 된 것은 복음을 위해서이다.
민들레 씨앗도 바람만 불면 최대한 멀리 흩어지기 위해 깃털 같은 것에 메달려 날아 온 세상에 퍼지는 것처럼 교회도 계속 흩어 보내야 한다.
교회에서 겨우 예배드리고 앉아 있지 말고 교회를 목회자 자신의 왕국을 만들지 말고 교인들을 교육시켜 흩어 보내야 한다. 교회에서 교인을 끌어 모으기만 하면 복음 전파가 되지 않는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기독교의 신학은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이다. 십자가만 너무 강조하다보면 부활의 신앙이 위축되게 된다.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기업이 하늘에 있으므로 땅에서의 기업이 잘되면 좋고 잘 안되어도 부업이므로 크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하늘에 있고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의 본업이다.
음행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늘나라에서는 우리에게 맡겨질 엄청난 할 일(기업)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면 뭐 합니까? 맨 날 찬송만 하나요? 맨 날 놀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하는데 천국에 가면 어떤 일이 주어질지 모르지만 엄청남 기업을 운영할 일이 있고 바쁘다. 우리에게 일이 짐이 되고 능력이 없어서 힘든 것이지만 실상은 일은 즐거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따기 전부터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는 엄청난 사명이 있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놀고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천만에, 하나님 나라는 놀고먹는 곳이 아니다.
에덴동산에 있을 때 이미 모든 만물을 관리하는 사명이 있었듯이 천국에도 엄청난 일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별을 몇 개를 관리 할지 모르고 열 고을을 차지하라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세상에서 열심히 하늘 기업을 위해 일한 사람들은 많은 고을을 차지할 것이고 요령만 피우고 빈둥거린 사람들은 기업이 없을 것이다.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흩어진 사람들은 고향땅을 울면서 떠나 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쫓겨남이 비극이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하여 보호하심을 입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이 멸망(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하던 AD70년에 예루살렘 도시에서 110만명이 개죽음을 당한다.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일생은 잠깐이다. 영원한 것에 비하면 우리의 일생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험과 시련을 통과하여 정금 같은 신앙이 되었을 때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시험과 시련이 오면 강하지고 순수해진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편안하면 나태해지고 부패하는데 어려움이 닥치면 교회가 순수해진다.
만약에 이 지역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한두 사람이 순교하게 되면 가짜믿음은 모두 교회를 떠나고 알맹이만 남는다.
목숨을 걸고 외치는 저들의 말이 진리가 아니겠는가! 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믿게 된다.
알곡과 쭉정이는 확실히 갈라지게 되고 교회는 순수하게 된다.
지금은 교회 나와서 세상의 팔자를 고쳐보려고 하니까 순전히 욕심쟁이만 교회 모여 있을 수 있다. 초대교회는 이런 것은 상상 할 수 없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아가야 함으로 언제든지 죽을 각오하지 않으면 따를 수 없는 시대였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항상 기뻐 할 수 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성경을 얼마나 깊이 있게 보았는지 짐작케 된다.
우리가 받는 이 구원에 대한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가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지만 자기 입으로 예언을 하고서도 자신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으므로 연구하고 상고한다. 분명히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한데 어느 때에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어느 시점을 알게 한 경우는 없고 때가 되면 혹은 그날(하욤)이 이르게 되면 언제나 그날로 표현하고 있다. 예언서에 끝도 없이 나오는 말이 그날에 이렇게 될 것이다.
선지자들의 입으로 예언을 했지만 그날을 모르므로 상고하고 연구했다는 것인데 그들이 애쓴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너희를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예언자들이 부지런히 예언을 하고 상고한 것이 바로 우리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하면서 감격하는 표현이다.
옛 선지자들은 예언만 하고 체험을 못했지만 직접 체험한 사람은 우리들이므로 선지자 그들의 봉사는 결국은 우리를 위한 봉사였다고 베드로는 감격하고 있다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마귀처럼 되었던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회복하여 거듭나게 되는 것은 예언자들이 자신들이 예언을 해 놓고도 어느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몰랐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시고 성령님이 오셔서 알게 해주게 해준 것이 천사들도 신비로워서 살펴보기를 원하는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천사들도 신기하여 살펴보기를 원하는 은혜를 오늘 우리가 받고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엄청남 말을 하면서도 요한계시록을 몰랐고 다른 복음서도 다 알지 못했을 것이고 성경 66권의 완성된 계시를 한손에 가지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베드로도 완성된 계시(성경)의 일부분 밖에 몰랐을 것인데 현재 우리들은 완성된 계시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장차 하늘에서 어떤 기업을 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알고서도 우리의 삶을 보면 한심하다.
만약 베드로가 완성된 복음을 모두 알았다면 이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근신=삼가 하는 자세=분에 넘치지 않는 온건한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을 막가는 인생처럼 살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세를 믿지 않고 죽으면 그만 이라 생각하고 심판대 앞에 설 자신의 모습을 생각지 못하므로 사람의 눈만 속이면 못할 짓이 없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사고이고 더 나아가서 속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뻔뻔스럽게 대놓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소망 없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이다. 향락을 위해 제멋대로 살아간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레위기에 나오는 말씀인데 성경 66권 중에 제일 재미없고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으로 생각하고 배우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유치부 어린이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레위기이다.
레위기가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린이에게는 사실은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내용이 아주 단순하게,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매우 쉽다.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을 어린 아이시기에 배워야지 어른들은 배우고 싶지 않고 잘 따르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재미없고 딱딱하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재미와 딱딱함을 잘 모른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부터 마땅히 행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한다. 즉, 어린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에 레위기를 가르쳐야 한다.
어린 아이는 어른들의 말에 절대 의존적이므로 이 때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시기가 있는데 그 때 레위기를 가르쳐야 한다. 조금 머리가 굵어지면 부모 말을 듣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굳어 버려서 교육이 어렵다.
돼지고기를 삼가고 현미를 먹게 되면 이렇게 많은 질병이 걸리지 않는다.
낙지 문어 오징어를 먹는 나라이므로 신부전증 환자가 제일 많다. 한두 번 먹는다고 당장 병에 걸려 죽지 않으므로 담대하게 자꾸 먹는데 결국은 건강을 해치게 된다.
자외선에 노출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국 사람과 흑인들은 대체로 햇빛에 강한 편이다. 피부가 뽀얀 사람들은 태양의 자외광선에 더욱 약하다.
자외선이 얼마나 치명적이냐 하면 우리의 유전인자를 교란시키고 파괴하여 유전병이 생긴다.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진리를 순종함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 저희를 말씀 안에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 니이다! 이렇게 기도하셨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성화 되어 감으로 영혼이 깨끗해 질 수 있는데 성화된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단계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계속적인 성화의 마지막 단계는 사랑의 단계이다.
인생이 너무 짧아 인생이 무엇인가 깨닫고 갈등하는데 거의 시간이 지나버리고 늙으면 어떤 일을 해보려고 해도 마음만 있고 쉽게 되지 않는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며 살기에도 인생이 너무 짧다.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속을 썩이고 마음을 상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가정의 달이 매년 돌아오지만 이혼율이 43%나 되는 것은 교육이 너무 잘못되어 있다. 학력이 높아졌다는데 뭐가 높아진 것인가? 지적레벨이 향상되면 인간성 윤리도덕성 경건성이 높아질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공부를 많이 시키면 시킬수록 못되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것들의 원인은 인간관계를 배우지 않았다. 인간관계훈련이 없다. 인간관계의 주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인데 남을 기쁘게 하는 말은 곧 칭찬으로 우리는 칭찬에 너무 인색하다.
우리는 어차피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생들이므로 우리가 마주 앉아서 흉과 허물을 들추어내면 시간이 부족하다.
완전함으로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지만 타락한 인생이 어떻게 그렇게 좋은 모습이 조금이나마 보이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칭찬하고 격려하고 북돋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칭찬에는 고래도 춤춘다)
왜 칭찬을 하지 못하는가하면 남을 높이면 자신이 낮아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열등의식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약점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약점이 있어야 하고 남의 약점만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평생 남을 칭찬하지 못하고 칭찬받지 못하는 불행한 인생이 된다.
학교에서 어떤 교사가 학생들의 인상이 너무 어두워 있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가정에서 부모들의 기대치가 너무 커서 뼈빠지게 일을 해서 학교 보냈는데 성적이 이 모양이냐! 하는 부모들의 기대치 중압감에 눌러서 얼굴을 펴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반면에 아이들 아이들나름대로 부모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천사 같은 이상적인 부모를 기대하지만 부모들이 그렇지 않으므로 부모에 대한 불평불만이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다.
칭찬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칭찬하는 것이지만 이 교사는 어차피 부모의 욕심이 지나치므로 부모에겐 희망이 없고 아이들을 하나 아니면 둘만 낳아서 돈을 너무 투자했기 때문에 기대치가 너무 높아 자녀들을 칭찬하기 어려우니까 거꾸로 아이들이 부모님을 칭찬하기로 하고 칭찬한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여 제출하고 발표하기로 했는데 부모에게 칭찬을 했더니 부모들이 몸둘바를 모르고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용기를 얻게 되어 반에서도 서로 칭찬하게 되고 선생도 칭찬하게 되면서 달라지게 됨
성경은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만 되어 있고 서로 칭찬하지 말라는 말씀이 없어서 많이 아쉽다.
칭찬에 너무 인색하다. 열등의식 때문에 칭찬을 하지 못한다.
타락한 인생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한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칭찬할 수 있도록...(칭찬도 연습이 필요하다.)
마귀도 이단사이비에게도 배울(칭찬) 것이 있다. 인내심과 열심은 칭찬?
칭찬이야 말로 돈을 한 푼 들이지 않고 가정과 교회와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허물은 모두 아는 것이고 약점 이미 알고 있는데 그것을 들추어내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남의 허물이 보이면 나 자신에게 저런 허물이 없는가 하고 자신을 살피면 되는 것이다.
타락한 인생이 좀 잘 하는 것이 있다면 대단하게 여기고 칭찬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2장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신령한 젖(헬라어-로기콘은 이론이 되는 혹은 말이 되는- 합리적인 말)은 너무 의역이고 원어에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고 되어 있다. 로고서에서 나온 것이다 영어성경은 말씀에 젖을 사모하라고 해석하고 있다.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의 이름이 리빙스톤(산돌)이 있다.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믿는 성도들은 제사장이다.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님이야 말로 걸려 넘어지는 반석인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 때문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명한 스타처럼 나타났으면 주목하고 믿을 수 있을 것인데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이 비천한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교만한 자는 모두 넘어지는 것이다.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출애굽19:5~6에 나오는 말씀인데 옛날에는 히브리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 백성이지만 그들이 실패한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택하신 소유가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거룩한 나라 백성이 된 것이다. 제사장의 직분이 바뀌었다. 이제 교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제사장의 역할은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빛의 나라로 인도하신 아름다운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기(선전요원=선교하고 전도하는) 위해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는 것은 예수님부터 강조되어 초대교회 기독교 윤리의 기본이었다. 오늘날 이런 말이 강조 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지금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도 하시던 말씀이고 바울사도가 강조했던 이야기로 모든 사도들이 성도들의 삶을 지도할 때는 꼭 당부하던 이야기이다.
우리의 인생은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그네와 행인 같은 존재들로 하나님의 사명이 있어서 얼마동안 사명이 다할 때까지 머물다 가는 곳인데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를 계속적으로 실패하게 하고 훼방하는 어떤 세력이 있다. 그 세력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데 육체의 정욕이다.
육체의 정욕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대부분 이 말을 막연하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데 사실은 우리 신앙생활의 실패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해서 실패한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성취동기 성공주의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내가 아무도시에 가서 유하며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책망하듯 허탄한 생각이고 모두 악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 이런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아내와 자식에 대한 자세도 기대를 너무 많이 하게 되면서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영적인 것을 거슬려 싸우는 것이 육체의 정욕 때문이다.
정욕은 성적이 욕구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욕망 때문에 순수하지 못하다.
우리들이 악하지 않다고 말로 해서 악하지 않음을 증거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방법은 끝까지 선행을 통해서 그 입을 막아야 한다. 그들은 입만 놀려서 비방하지만 우리는 그 비방을 착한 행실로 막아야 함으로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가! 그런데 이 이야기를 베드로가 처음하신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에서 이방인 중에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저희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 하셨고 사도바울도 롬12장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다. 초대교회에서 항상 강조한 “말 선으로 악을 이겨라” 초대교회는 그렇게 지켜서 로마를 선행으로 뒤집혀 기독교국가로 만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데 뭐가 되겠다고 하는 성공주의 때문에 순수성을 잃어 버렸다.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인간의 방백들에게 순종하는 목적이 주님을 위해서 이다. 인간의 목적이 아니라 위하는 것은 주님을 위함으로 인간이 만든 제도에 순종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반체제 운동이나 하고 세상의 것을 모두 부정하는 반골 형태가 되면 이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좋지 못한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순복한다.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방백은 도지사나 시장인데 그 당시 방백을 보낸 사람은 폭군 네로황제이다. 이런 네로에게 순복하고 그가 보낸 방백에게도 순복하여 일등시민으로 살게 되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이다.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성도들의 아름다운 행실 외에는 막을 방법이 없다.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같이 하라
자유하나 오히려 종처럼 살아간다. 자유가 없으면서 종처럼 살면 굴욕적이지만 자유하면서 방종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종처럼 사는 것은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왕자이지만 주의 소유가 되는 종처럼 산다.
17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베드로 당시의 사람들! 모든 사람이 공경 할만 할까? 그러나 뭇사람을 공경해야 한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계명인데 원수는 고사하고 같은 성도끼리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뭇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은 베드로가 특별히 하는 말이 아니고 초대교회는 항상 권면하는 말씀이다. “로마 정권을 타도하라!” 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자세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성대로 감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실제로 주인을 섬기고 있는 노예들에게 하는 권면이다. 못된 주인이지만 선한 삶을 계속 살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그리스도인들은 범사에 손해보고 애매한 고난을 당하고 죽어지내는 것이 초대교인들의 모습니다. 나중에 보면 베드로가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일 하고 욕먹기로 선택된 사람들이라고까지 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주를 위해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기쁨의 차원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능력이 없는 것은 인격에 물질에 작은 손해에도 못 참고 따지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여간 잘못을 하였어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 잘못을 시인하면 죽는 줄 알고 있다.
성경은 애매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위해서 참는 것이다.
따지게 되면 관계만 파괴되고 유익이 전혀 없다.
영문 밖의 길은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습대로
사도들도 능욕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끝까지 선행을 하여 그동안 비방하던 사람들이 부끄럽게 하는데 까지 참고 선을 행하여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겠나! 그러나 베드로나 바울 모두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초대교회 때 남긴 글들 중에는 우리를 비난하며 던진 돌들로 우리의 선행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게 하자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애매한 고난으로 자신들을 위해 복을 빌고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많은 성도들이 죽어 갔다. 이렇게 살라고 베드로가 당부하고 있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선행으로만 악한자의 입을 막으려는 자세가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사도베드로의 신앙의 차원이 이정도로 차원 높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귀가 권세를 잡고 있는 세상에서는 진짜 선을 행한다면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기도교인은 선한 일 하고 욕 얻어먹기 위해 부르심을 입은 자인데 작은 일에 욕을 먹으면 길길이 뛰며 죽는 줄 알고 있으니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이 능력이 없고 깊이가 없다.
마귀가 권세를 잡고 있는 세상에서는 진짜 선을 행한다면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하고 있다고 기도하시는 예수님!...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옛날에는 죄를 따라 살았지만 감독되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들을 비난 하는 말들이 들릴 때 한 발 뒤로 물러나서“모든 비극은 오해로부터” 라는 생각을 하면서 무슨 오해가 있었겠지... 하고 그냥 넘어 가야지 모든 오해에 대하여 해명은 불가능하다. 아브라함 링컨의 어록에도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맞섰다면 자신의 몸은 벌써 가루가 났을 것이다.” 라고 했듯이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냥 묵묵히 참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요즘의 한국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하여 비판을 해야만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인터넷 신문에는 어떤 기사를 올려놓고 그 기사 밑에 자신의 생각을 글쓰기 하는 사이버 공간이 있는데 여기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쓰고 싶은 말을 쏟아 놓는데 걸레 같은 내용으로 거품을 물고 욕을 한다.
이것은 신문과 노대통령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는데 사이버 공간을 통해 악한 짓을 거침없이 한다. 앞으로는 신문을 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렇지 않는데 미친 개 같은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서 짖고 있는가보다 하고 넘어가야지... 가슴이 답답하다.
3장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들을 보면 신학적으로 매우 까다롭지 않고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고 구체적인 말로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극동방송에서 하는 내용이 쉬운 것도 시골 목사의 말이니까 쉽다. 학문적으로 하면 어려운데 성경을 기록한 것이 학문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냥 쉽게 기록한 것인데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하니까 어렵게 된다. 베드로가 쉬운 것은 베드로가 학자가 아니므로 쉽다.
1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여성들이 민감함으로 먼저 여성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아내를 통해 남편이 복음을 받아들인다.
남편을 교회로 이끄는 원리가 있다.
아내들이 말로 남편을 이끌어 내기는 어렵고 오히려 더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착한 행실로 남편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남편이 아내들의 말을 잘 안 듣는 이유는
여자들은 남자보다 말을 4배 정도 더 한다. 남자는 하루에 5000단어를 사용하는 반면 여자는 25000단어를 사용한다. 여자의 말의 대상인 자녀가 많아야 되는데 자녀가 적으므로 25000단어를 사용할 대상이 없으므로 남편에게 쏟아 놓는데 남편은 이미 단어를 모두 쓰고 왔으므로 아내의 중요한 내용도 모두 쓸데없는 말로 듣는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의 생리가 다르므로 이해해야 한다.(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남자) 여자는 말을 많이 함으로 건강하지만 남자는 퇴근을 하면 우선 동굴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캄캄한 동굴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다가 차츰 주위 사람들이 보이면서 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말에 설득 당해서 교회 나오는 경우는 없고 착한 행실로만 전도 할 수 있다.
남편을 교회 나오게 하기 위해 철야하고 금식하고 기도원 쫒아 다니면 그 남편은 영원히 교회 나오게 할 수 없다.
남편과 함께 교회를 다니더라도 남편은 소극적인데 아내가 너무 남편보다 신앙에 열심을 내는 것도 남편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남편을 앞세워서 뒤에서 따라가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헛수고를 많이 하고 세월을 많이 허비한다.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아내가 작은 일에 호들갑떨지 않고 여간하여 놀라지 않고 안정한 심령이 될 때 아내의 말에 힘이 있는 것이다.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이런 내용을 가지고 성경이야말로 가부장적 사상과 남존여비에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여성들이 여성운동 한다고 설치고 다닌다.(오늘날 남존여비는 남자의 존재가 여자에 의해 비참해 졌다)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신약시대 이전의 옛날 헬라 인들의 사고에는 여자에게도 영혼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는데 예수님 오신 이후에 여자도 같이 생명이 유업을 함께 받은 자이다.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체휼=깊이 긍휼한 마음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말로 터져 나오기 전에 생각부터 조심해야 한다. 마귀를 쫒아 하는 생각인가! 성령을 쫒아 하는 생각인가? 분별하여 나쁜 생각은 과감하게 털어 버려야 한다.(무릇 지킬만한 마음을 지키라고 하고 있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귀가 가롯유다에게 예수 팔려는 생각은 집어넣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생각을 털어버려야 하는데 품고 있으면 계획을 하게 되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말 조심 이전에 생각부터 분별하여 처리해야 한다.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억울한 일 당하면서도 분한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두려워 아니하고 두려운 일을 당해도 소동치 아니하며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내면에 흐르는 잔잔한 기쁨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서 묻게 될 때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 하는데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세상사람들의 생각은 선하면 일이 잘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선하면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의롭게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고 바울도 베드로도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들은 내가 착한데 왜 그러냐고 따지고 드니까 싸움 밖에 남는 것이 없다. 베드로의 생각이 이 정도로 차원이 높다.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을 19절에 대한 질문을 하는데 이것이 연옥설이 아닌가 하고 질문을 하는데 연옥이 아니다.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 홍수 때 노아의 전도가 미치는 곳에 있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못 박혀 오후 3시에 운명하셔서 주일 아침까지 하루 반나절 동안 옥에 있는 이런 영들에게 전도 했다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거기 가서 전도하고 왔다는 기록은 없지만 부활하신 후 어디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내용을 말씀 하셨기에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가끔 생각하기를 이 땅에 복음이 오기 전에 죽은 사람들 중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야 하는가? 라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전도 할 수 있는 영역에 없는 사람들은 어차피 따져 봐야 결론이 나올 수 없고 우리가 어찌 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공정한 재판을 함으로 어느 누구도 억울함이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되어질 것이다.
죽은 영혼도 회개할 기회가 있는지(천국과 지옥의 저자 스웨덴북 주장-28년간 천국과 지옥을 가보고 기록한 신비주의자임-정통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정죄 됨- 하지만 지금도 그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없는지 잘 모르지만 그러나 성경에는 여기 한번만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도 계속하여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만약 죽어서도 기회가 있다면 이 땅에서 전도 하지 않을 것이다.(위험한 발상이다) 성경에서는 죽은 후로는 아브라함 품으로 가고 음부로 가는데 음부에 있는 영혼이 복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부자와 나사로)
음부에 간 부자가 내가 이젠 믿습니다. 하고 아브라함 품으로 올 수 없고 죽으면 어떻게 할 수 없다.
얼마전 한국에 유명한 목사가 CTS 방송 설교 중에 죽어서 음부에 가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지 않는가! 하는데 이것도 교리적으로나 성경 적으로는 근거가 없는 내용이다. 상가집에 가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는 잘못된 표현이다. 누구에게 빈다는 것인가?
그냥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혹은 “주님의 소망의 약속이 위로가 되기 바랍니다.” 표현이 좋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 이후 부활 하실 때 까지 육체로는 무덤에 계셨고 영으로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하셨다는 것이다.
가족들 중에 남편이 교회 나오지 않고 애를 먹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아내들은 말로서 남편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거룩한 행실과 아름다운 내면을 잘 단장하여 영적으로 남편에게 매력적인 여자의 요구를 남편들이 거절하지 못한다.
남편을 전도하려고 애쓰는 분들은 베드로전서 3장 1절부터 6절까지 꼭 읽고 사라의 자세를 잘 본 받아 온유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남편에게 다가 갈 수 있는 여인이 되어야 한다.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세례를 받으면 죄가 떠나가고 나쁜 생각이 들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겠다는 자기 결단이다. 세례를 받으면 우리가 원할 때는 성령께서 인격적 권리를 가지고 우리를 도우신다.
결혼식을 하지 않았으면 남의 처녀의 손목을 잡는 것도 실례가 되는데 세례는 하나님과 혼인을 한 예식이므로 성령님께서 마음대로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무 신사적이어서 옳은 일이라고 해도 우리가 원치 않으면 강제로 어떤 일을 수행하지 않으신다.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4장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지라도 고난을 받았으니까 그 집의 종 된 우리야 당연히 고난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지 주인이 죽기까지 했는데 그 집의 종이 고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 때 변질된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멸시천대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으니 우리들은 그런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고 하는 찬송을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겠다는 가사는 복음에 어긋나는 것이고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생복락을 누리기만 하겠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변질된 복음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나 성도들이 복음을 몰라서 멸시와 천대 속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인가! 그런 죽음은 개죽음인가! 이런 생각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집의 주인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붙들린 자라고 했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러므로 어려워도 참아! 종이 주인 같이 제자가 스승만큼 대접 받으면 충분한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만큼 고난 받으셨으면 우리의 고난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오순절 복음이 문제가 많은 것은 종말에 교회는 대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그들의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다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고난 받을 이유가 없으므로 대환란을 받지 않고 환란 이전에 휴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얼마나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인지...
초대교회의 250년간(AD64~AD311) 10차례에 걸쳐서 박해를 받으며 순교한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가?
오순절 순복음에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 교세가 크게 확장 되었다고 말을 함부로 하지만 그런 주장은 성경과 역사를 알지 못하는 큰 오해이다.
이런 구절을 보지 않는다. 하여튼 무슨 주의가 붙으면 곤란하다. 복음주의도 복음만 보고 두렵고 떨리는 성경구절을 보지 않으므로 문제가 된다.
육체의 고난을 받는 자가 죄를 그쳤다는 의미는 사람은 고난을 받으며 생사를 넘나드는 어려울 때 죄를 짓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의 죄는 배부르고 평안할 때 짓게 된다.
사람의 살아가는 길이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혼을 대적하는 육체의 정욕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이다. 이 두 사이에서 결단이 필요하다.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3장 19절의 내용=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한 복음을 두고 하신 말이다. 육체는 홍수심판으로 말미암아 죽었지만 그 영이라도 살리려고 복음이 전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홍수이후에 계속적으로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는 성경 어디에도 없고 그렇게 주장 할 근거가 없다.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죽은 후에 복음을 믿을 기회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영혼에 대하여는 소망이 없고 죽은 영혼을 위해서 기도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사람은 모든 세대에서 죽은 사람이 아니라 홍수심판에서 죽은 사람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 때만 해도 교통과 통신수단이 없기 때문에 노아 가까이 있는 사람만 복음을 접하였지 다른 멀리 있는 사람들은 복음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온 세상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게으른 종으로 책망 받을 것이다.
오늘날 사탄은 사회를 너무 바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별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여유를 갖지 못하게 바쁘게 만들므로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육체의 정욕은 대부분 항상 악한데 악한 줄 알면서도 그것을 하고 싶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악에 물던 마음이다. 악하고 우리 자신에게 해로우면 하지 말아야 될 것인데 해롭지만 그게 하고 싶은 것이다.
술 담배가 해로운줄 알면서도 하고 싶은 이런 육체의 소욕을 따라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따라하게 되면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다.
육체의 싹은 곧 죄의 싹이고 사망에 이른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예수님때부터 세상을 왜 말세라고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 이전을 초기라 할 수 있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를 중기라고 하고 예수님 이후의 역사를 말세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말세지 말이다. 그러나 곧 세상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고 말세지 말이지만 종말은 아직 멀었다.
세상의 끝날이 아직 아닌 이유는 세상 끝날이 되면 전도가 한사람도 되지 않는다.
현재는 전도가 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몽골에서도 전도가 많이 된다. 중앙아시아에서나 러시아에서도 전도가 잘 되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전도가 잘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 없었고 광신자들이나 신비주의자가 추태를 너무 많이 보였고 품위가 없는 모습을 언론에 너무 많이 비쳐졌다. 현제 가장 품위 없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외국 선교를 나갔을 때 물질 공세를 펴지 말아야 한다. 자꾸 뭔가를 주게 되면 그 사람들을 평생 거지로 만들게 된다. 마음(사랑)을 주고 대접을 받고 와야 한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주게 되면 나쁜 버릇이 생기고 전도가 되지 않느다. 오히려 학생들이 작은 것이라도 가져와서 선생께 주는 학생으로 길러야 한다.
교회에서 학생들에의 손에 과자봉지를 들려서 보내지 말고 상을 차려서 정중하게 둘러앉아서 품위있게 먹고 일어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자는 먹고 봉지는 온 교회마당과 골목에 버리게 하지 말고
전주 안디옥교회에는 성도의 헌금으로 학생들에게 과자나 사주는 일은 하지 않지만 많은 학생들이 모이고 있다.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뭔가를 사주고 요란하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다. 연애할 때의 사랑이 아니라 형제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여러 가지 허물이 있으므로 남을 허물을 이해하고 덮어주는 자세가 필요한다.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세상에서의 말은 3가지 뿐이다. 하나님 말씀 사람의 말 사탄의 말이다. 사탄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고 사람의 말도 쓸데없는 말이 많으므로 되도록 말을 많이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
물질적인 봉사를 한다고 할지라도 내 것을 가지고 베푸는 자세로 하지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눈다는 자세가 되어야 받는 사람이 비굴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긴 것이므로 나누는 것이다. 나눈다는 것은 그기에 받는 사람의 몫이 있다는 것이므로 준다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한다.
말씀의 봉사나 물질의 봉사를 통해 사람이 영광 받게 되면 안 되고 결국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여기까지가 한 단락이 마무리 되고 12절부터는 새로운 내용이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즐거운 일에는 누구나 초대하지만 고난당하는 일에는 아무나 초대받지 못한다. 자신이 힘들때 도움을 요청할 때는 아무에게나 할 수 없다. 어려운 일에 동참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잘되고 잘된다고 말씀 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는 순복음교회가 분명 잘못된 점이 있다.
예수 믿으면 정말 만사형통하고 잘 되었는가? 아니다! 예수 믿으므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되고 죽임을 당하고 심지어 가족이 몰사하는 것 아니었나
20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이 박해만 받다가 요즘 최근에 와서야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핍박이 없는 것이다.
역사 가운데 아주 짧은 반짝 기간에 박해 없는 것을 두고 이런 삶이 복된 삶인 줄 알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잘되는 것만 가지고 그것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대장간에서 달군 쇠를 연단하는 과정을 보면 쇠를 수도 없이 해머로 내리친다. 쇠를 구성하는 입자들 사이에 수세미처럼 빈공간이 있는데 이런 쇠를 불에 달구어 무르게 한 뒤 해머로 내려쳐서 빈 공간을 좁혀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연단인데 이처럼 두들겨 맞아야 연단이 된다. 고난을 받고 시련이 있어야 강한 성품이 된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너무 고생이 없어서 장래에 뭘 할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이다. 교회에서나마 청소년들을 강하게 훈련시키게(길도 없는 험한 등산) 되면 강한 일꾼이 된다. 4박 5일의 에스라성경통독도 강한 훈련이다.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실컷 얻어맞고는 주를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히 여기심을 기뻐하며 공회 앞에서 떠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실컷 얻어맞고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밤에 찬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능력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이런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주님을 위해 고난에 참여하고 어려운 일에 참여 했던 사람들은 주님이 오실 때 정말 기쁘게 영접하게 될 것이고
어려운 일만 있으면 피했던 사람은 부끄럽게 될 것이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세상사람들이 괜히 미워한다.
지리산 시골 골짝 사람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지만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 할 줄은 안다. 왜 미워하는지 물어보면 자신도 모르면서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을 마귀의 영이 있는 사람이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이름으로 인하여 욕을 먹게 되면 복 있는 사람이다.
이런 교육이 오늘날 교회에 전혀 되지 않는 것 같다. 세상사람들 비위를 모두 맞춰버리므로 욕먹을 일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착한 일 하고 욕먹었다면 해명하려 하지 말고 묵묵히 하던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비방하던 입이 부끄러울 때까지 묵묵히 선을 행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17절 이하가 결론이다.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5장
사도 베드로나 요한 이런 분들이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지 않고 자신들도 함께 장로된 자로 소개하는 것을 본다.
교회 2000년 역사 가운데 직분들 중에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직분이 있다면 사도이다.
사도들이 있고 그 다음 일곱 집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때 세운 집사는 오늘날 교회에서 세우는 집사와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이 말에 무게가 있는 것은 사도는 분명 12명인데 집사는 불과 7명 세웠다. 집사라고 딱히 이름을 명명하지도 않았다.
오늘날 교회 고정된 직분의 집사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일을 맡은 자라는 뜻이다. 그 당시에는 제도 자체가 오늘날처럼 체계화 되지 않았다. 또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장로를 세웠다는 흔적이나 기록이 없다. 그러면서 사도들이 연세가 들면서 베드로도 60~70세 사이가 되는데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하면서 함께 장로 된 자는 오늘날 세례자의 비례대표 형태의 장로와는 다른 장로이다.
장로교라는 말은 맞지 않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맞다. 독일 사람들은 자신의 교회를 루터교라고 하는데 이것도 큰 잘못이다.
생각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쉬워서 그냥 장로교 루터교 이렇게 하는 것인데 고쳐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장로를 베드로 장로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초대교회의 장로는 그냥 교회의 어른이다.
지금의 장로는 교회법에 따라서 장로를 세우고 교회법에 따라 은퇴를 시키지만 초대교회의 장로는 은퇴가 없다(교회의 어른은 죽을 때까지 어른이다) 그 교회에 살아계실 때가지는 그 교회의 장로(어른)이다.
은퇴목사나 은퇴장로는 성경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사람들이 만든 제도일 뿐이다. 성경 속에는 30명의 비례대표로서의 장로가 아니고 그 교회뿐만 아니라 그 지역사회에서의 어른이다.
베드로 자신을 장로라고 한 것은 지도자라는 의미이다. 연세가 있고. 경륜이 있고 사도로서 교회 어FMS이다.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초대교회의 장로는 오늘날 교회 목회자처럼 비춰진다.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목회자가 주장을 하게 되면 성도들이 모두 하기는 하지만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하긴 하지만 기분 나쁘다. 교회에서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면 안 된다.
교육은 2가지가 있는데 규범으로 주장하는 자세가 있고 규범은 있지만 모범을 보이므로 교육하는 방법이다.
주장은 주인만 하는 것이고 종은 순종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요즘에 인터넷을 보면 대통령(노무현)을 서지취급하면서 제 멋대로 주장을 하니까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예수님을 목자장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 당시 장로를 오늘날 목회자라고 보는 것이다.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염려하는 것은 염려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염려도 하나의 믿음이다. 그렇게 될 것이라 믿으니까 염려하는 것이다.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인에게는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만 악인에게는 염려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 염려해 봤자 내 수준이 이 정도이므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다른 사람은 아무런 고난도 없는데 자기만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같이 생각되지만 사람마다 자기의 십자가가 나름대로 한 짐이다. 나름대로 염려가 있고 고난이 있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우리가 잠깐 잠깐의 어려움을 격고나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온전케 굳게 강하게 견고케 하신다. 이런 과정에서 잠간 고난을 받는데 이것을 참지 못하면 안 된다. 예방 주사는 잠간 아프지만 그것을 통해서 질병을 예방 할 수 있다.
11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이 이후는 결론이고 마지막 인사이다.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베드로가 불러 주고 실로아노가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를 갈 때 바울은 실루아노를 데리고 2차 전도여행을 갔던 사람이다.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다른 교회에서 자신의 교회로 오면 회개 한 것이고 자신의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가면 배신 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잘못된 생각이다.
다른 곳에 가서 배울 수도 있다. 마가도 바울과 있다가 바나바와 있다가 지금은 베드로와 있다.
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마가와 베드로의 나이 차이는 열 살 정도의 차이지만 마가를 아들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 바벨론은 로마가 아니라 문자대로 바벨론일 것이다.(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그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마가에 의해서 마가복음이 기록된 동기는 마가가 로마에 갔을 때 지금까지 당신이 모시고 있던 사도 베드로께서 어떤 복음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나는 모든 것을 문자로 기록하여 넘겨 달라는 부탁을 받고 마가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만약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면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AD45년부터 베드로는 이미 로마에 와 있었다고 하는 카톨릭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고 “쿼바디스 도미니”도 셍키비스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네로 황제의 박해가 확산되는 시기이기에 평강의 복을 빌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고 젊은이들은 순종하는 자세를 말씀하고 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잠간의 고난이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라 믿고 인내하며 나아가야 한다.
베드로후서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의 순교가 임박했을 때 기록한 것으로 베드로의 유언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서신 중에 맨 마지막에 기록한 것은 디모데 후서라고 할 수 있고 베드로의 서신 2개 중에 베드로후서가 베드로의 마지막 서신이다.
오늘 설교 제목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고 하려고 했는데 신의 성품에 참여키 위해서 성장해야 되므로 그리스도의 성장으로 제목을 정했다.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겠으나 성경 말씀을 깨닫게 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 자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것이 아무에게나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총을 입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그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들이고 더 나아가면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선택 된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만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지옥 갈 짓만 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슬람교에서 믿는 “알라”도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알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호멧을 믿는 것이다. 또 카톨릭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리아를 믿는 엉뚱한 짓을 한다. 몰몬교(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는 요셉스미스를 최고 예언자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알지만 예수님까지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대인도 하나님 한분으로 끝나고 마리아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넘어서고 이슬람도 종말론적 예언자를 마호멧이라고 한다. 안식교(제칠일안식예수재림교회)는 엘렌 G. 화잇(Ellen G. White) 이라는 여자가 특별한 예언자로 믿고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잘못된 길이 있는데 그런 곳에 휩쓸리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베드로의 이런 표현은 우리를 끌어올려서 사도와 동일 선상에 놓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편지 한다고 서두에 말하고 있다.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하나님만 알면 안 되고 예수님을 알아야 된다.
요한사도가 말하기를 영생이 뭐냐? 곧 영생이란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
이렇게 알기란 쉽지 않다. 하나님을 알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기름부은 자) 예수님을 믿어진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장차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이고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주관자이고 모든 주권이 예수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런 보배로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일 때 가능한 것이다.
정도를 해보면 믿고 싶은데 안 믿어진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같이 불행한 사람은 없다.
이런 사람은(가롯유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다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은혜와 평강뿐만 아니라 온갖 좋은 것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풍성해 질 줄 믿는다. 은혜와 평강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베드로후서에서 자꾸만 안다는 말을 자꾸 하고 있다. “알다=야다”라는 표현이 히브리어에서의 개념은 아주 강한 표현으로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알기를 결혼하여 충분히 살아본 뒤에 남자를 아는 표현이 야다(알다)이다. 겉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속속들이 체험적으로 인격적 관계로 아는 것을 말한다.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자기의 노력과 지식과 경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예정된 사람이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고 성령이 그 사람을 감화 감동시켰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예수그리스도, 성부 정자를 알게 하신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이런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가 동일하게 가졌다는 것이고 이런 베드로 사도의 서신이 신학적인 수준에 와 있다. 이런 표현은 믿음의 차원이 상당한 경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이 체계적인 신학 공부를 한 것이 아니고 단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성경이 기록 될 때까지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데 그 짧은 기간에 이정도의 차원에 도달 하였다.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4정에 표현된 언어나 너무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설교가 쉽지 않을 만큼이다.
지극히 큰 약속=신약
1)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죄를 사해 주신다.
2)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
3)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4)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는데 처소를 예비한 후에 다시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영접 하여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이고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줄 것이다
이처럼 우리 머리와 상상으로 담을 수 없는 지극히 큰 약속이 신약에 있다. 구약의 약속은 대게 땅에서 잘되고 복 받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부도가 날 수 있는 수포가 아니고 진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보장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며 성령을 보내면서 보증하는 약속어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약속이 엄청난 약속이다. 하나님의 유업을 차지 할 자이다.
이런 엄청난 약속을 읽어도 실감을 하지 못하고 마음이 담담한 것은 이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지극히 크고 놀라운 약속어음으로 가지 있으므로 언젠가는 이루어질 약속! 세상의 약속은 불안하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하고 발행한 반드시 이루어진 약속어음을 가졌다면 적어도 2가지 정도는 해야 한다.
1)세상에 있는 것에 너무 집착(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하지 말자(우리가 영원하고 지극히 큰 약속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서 좀 어렵거나 다른 사람보다 가진 것이 없더라도 괜찮고 세상의 쩨쩨한 것에 초연할 수 있다)
2)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5절 이하)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미리 아신바 되었고 선택되어서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 보배로운 믿음을 같이 소유하여 현재 베드로 사도의 편지를 받는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앎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평강도 은혜도 있다는 것이고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다른 것 때문에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그 은혜로 부르신 것을 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온갖 것을 다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도 누군가 알아주면 좋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옛날에 하나님을 모른다고(여호와가 누구관대?) 했다가 혼난 사람(애굽의 바로 왕)이 있다.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셨다 하니까 여호와가 누구관대 하면서 모른다고 했다가 10번이나 혼이 난 사람이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다가 혼이 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온갖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쩨쩨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힘써 노력을 해야 한다.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우리가 예수 믿기 위해서나 죄 사함 받기 위해서는 힘쓸 것은 없지만 적어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힘을 써야 한다.
힘쓰는 단계가 일곱 단계로 되어 있다. 믿음... 믿음은 항상 있어야 되지만 그 믿음은 맨 기초이고 신의 성품의 출발점이다.
믿음에 머물러 있고 전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러다보면 잘 안 믿어지므로 더 강하게 큰소리로 “믿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
덕이 뭔가? 한문으로 큰 “덕”자를 쓰고 있는데 덕이 무엇인지 딱히 표현 할 말이 없는데 한문의 의미가 맞는 것 같다. 더 큰(높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덕이 없는 것은 쩨쩨한 것에 따지는 사람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항상 더 큰 것을 생각하고 작은 것에 초연하고 양보하는 것이 덕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더 큰 것을 생각하고 작은 것에 양보 할 수 있는 것이 덕이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도 믿음이지만 어딜 가던지 덕을 세워야 한다. 바울 사도가 하신 말에도 모든 것은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덕을 세우지 못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전도가 되지 않는다.
죄송하고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나라 기독교인 중에 믿음이 좋고 열심 있고 강하다는 사람들이 덕을 세우지 못한다.
문중에서 가문에서 직장에서 지역사회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고 열심히 살면 살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 쩨쩨하기 때문이다.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자칫 잘못하게 되면 지식이 교만의 재료가 된다. 알되 제대로 알면 오히려 겸손해 지지만 바르게 알지 못하는 작은 지식으로 교만하게 된다.
덕에 지식이 없으면 2장에서 염려하는 이단 사이비에 빠질 우려가 많기 때문에 꼭 지식을 겸비하여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식하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 학문의 체계가 수학-과학-철학-신학-성경 인데 최고차원의 성경을 매주 배우고 있으면서 무식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열심히 배우고 바르게 알아야 된다.
아는 것도 행하는 것도 절제가 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즐거움, 슬픔, 노여움, 감정, 의지” 이런 것은 적당하게 제어가 되어야 한다. 좋은 것도 절제하고 우리가 모두 누릴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절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이 컨트롤 되지 않으면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20~30년 전에는 이상한 집회를 많이 할 때 은사가 임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귀신이 임한 것이다. 죄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도 모르는 사람에게 “불로! 불로” 찬양하다가 정신나간 행동을 하는데 이 때 행동이 절제가 되면 성령의 역사고 절제가 되지 않으면 귀신들린 것이라고 강사는 이야기 하지만 절제가 안 되었을 때 누가 책임지나?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절제가 중요하다. 말도 너무 헤프게 하지 않도록 소금으로 고르게 하라는 말씀이 있다. 소금은 아주 필요하지만 적당해야 좋은 맛을 낼 수 있듯이 모든 일과 말에도 절제가 꼭 필요하다.
마귀의 성품 같이 죄인 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가다듬어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모든 것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하나님 앞에서는 경건이지만 사람에게는 형제 우애로 잘 조화를 이루어야 되는데 열심히 기도하고 철야하고 이웃사람에게 욕먹고 남편에게 얻어맞고 얻어맞고서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기도원 찾아다니고 이런 것은 형제 우애가 없고 덕을 세우지 못하는 행동이다. 하나님 섬기는 종적인 일에는 열심인데 횡적인 형제에게는 전혀 사랑의 따뜻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굉장하면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다. 경건은 대단한 것 같은데 형제 우애는 없다.
이와 반대의 사람도 있는데 형제우애로 사람은 좋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경건은 없는 사람도 잘못된 것이다.
맨 마지막 단계가 사랑이다.
믿음-믿음에 덕을-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절제에 인내를-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형제우애에 사랑을
최고의 단계가 사랑으로 사랑위에 다른 법이 없다.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로 생활 하면서 놀기도 실컷 놀고 모든 일에 적극적인 성품이다. 베드로는 했다고 하면 끝장을 보는 사람이다. 밤새도록 그물 던지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신 것 같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품으로 전도하는 것도 같은 방법으로 해야 한다.
밤새도록 안 잡혀 이젠 그물을 거두어 집으로 가려고 하는 그 때 낯선 사람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을 듣고 밤새도록 오른편 왼편 다 던져 봤다고 우리 같으면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밤이 맟도록 던져서 얻은 것이 없지만 던져보라고 하니 던져 본다는 것이다. 그물을 던지고 던지지 않는 것은 벽지 한 장 차이 같지만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된다.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원시치 못하고=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그의 은혜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힘써서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개으르지 않으면 점점 더 밝아져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지만 현재에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미래도 안보이고 과거의 은혜 받은 것도 잊어버린다. 죄 사함 받은 것도 잊어버리고 미래의 소망도 어두워져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 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베드로의 서신에서만 표현되는 것이다.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믿음의 기초는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에서 우리의 신앙이 출발하는 것이다. 택하심과 부르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실족치 않는다.
대개 알미니안 계통의 사람들이 실족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이 잘 되어 가면 믿음이 충만한 것 같다가 좀 어려움이 닥치거나 기분이 나쁘면 믿음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의 기초인 택하심과 부르심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12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한번 진리의 터가 닦여져서 마음에 새겨진 후에 그 터가 다져져서 기초가 튼튼하게 될 수 있도록 하여 기초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기초와 기본을 성실하게 바로 세워 놓지 않으면 어느 때나 무너질 수 있다.
교회를 다니다가 중간에 세상으로 나간 사람들은 기초가 불성실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도 기초교육을 받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 성급하게 기초도 세우지 않고 기본 교육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 교회 중책을 맡아 만용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맨 믿음의 기초는 예정과 선택이다.
처음 믿음 생활 할 때는 선택과 예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믿어지지 않지만 믿음이 성장한 후에 재삼 강조하고 확인하고 할 때 예정과 선택이 믿어지게 된다.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베드로가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 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성경에는 기록하라! 는 말이 있고 또한 기념하라는 말도 있다(나를 기념하라)
기록하고 기념하는 목적이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기록하고 기념하고 기억하라)
우리 속담에 떠나는 자는 하루하루 멀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어릴 적에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하루하루 멀어진다.
경전은 한번보고 덮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옆에 두고 계속 읽어야 한다.
믿음이 성장하면서 읽어보면 읽을 때마다 말씀이 좀 다르게 다가온다.
중국사람의 속담에 “둔필승총”이라는 말이 있다 하찮은 기록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낫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세월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성경은 생각나게 하기 위해 기록을 해 둔 것이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성경의 시편2편에 나오던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 가셨을 때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보였는데 하나님의 영광스런 구름(빛이 나는 구름)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는 소리가 들리면서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다.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수님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장면이다.
유대인들은 모세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껌벅 죽는가 하면 엘리야도 최고로 생각하고 우리 한국인이 부르는 찬양 중에 “엘리야의 하나님 ♬ 하는 찬양도 있다. 하지만 엘리야는 일평생 전도 한 사람도 못하고 이세벨의 여자에게 겁을 먹고 호렙산까지 도망하여 40일간 기진맥진해 있던 엘리야가 그다지 위대한 것도 아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선포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 왕이 은퇴를 하면서 여러 왕자들 중에 자신이 후계자라고 기대하고 서로에게 암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왕의 입에서 어느 왕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를 향하여 이 말이 선포되면 끝이다.
다윗이 후계자를 세울 때 공식적으로 아들로 기록된 아들만 19명이고 그 외에 첩에게서 난 아들도 많았을 것이다.
압살롬이 왕이 되려고 설치고 아도니아가 왕의 자리를 넘보는 때에 다른 왕자들도 꿈이 없겠는가? 이런 경우 다윗의 입에서 결정적이 말이 나와야 되겠는데 어느 날 모든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ㅐ서 솔로몬을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면 솔로몬은 후계자가 되고 모든 다른 왕자들도 함께 솔로몬의 손에 입을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역자가 된다.
이처럼 왕이 후계자를 세울 때 쓰는 대관식 공식용어(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이다.
영광이 비취는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성경은 혼자서 연구하면 위험하다. 대부분의 이단들이 혼자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나타난다.
지금 한국에 있는 이단 들이 공식적이거나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곳에서 성경을 배우지 않고 혼자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상상의 나래를 펴서 온갖 착각 속에 이단이 된다.
무식하면 담대하다고 이런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게 된다. 사람들이 분별력이 없어서 이런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 진리를 완전히 깨닫기 까지는 혼란스러운데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게 되니까 공부를 하다보면 힘이 빠지게 된다. 여러 학자들의 말에는 힘이 없다. 그러다가 학문의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단순하게 되면서 쉽게 가르치고 쉬워진다.
혼자서 성경연구 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어야 되겠는데 그것이 학사 학위라 할 수 있고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은 박사 학위라 할 수 있다.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성경을 사사로이(1:20) 풀지 말 것과 억지로(3:16) 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억지로 푼다는 말의 원어는 비비꼰다고 되어 있다. 영어로는 트위스트(춤의 종류)로 되어 있다.
성경을 해석하기 전에 성경 전체를 원만하게 많이 10번 이상 읽은 후에 공부는 공식적인 학교에서 해야 한다.
국가에서 학위를 인정하는 공식적인 대학은 실력이 모자라서 못 들어가고 값싸게 학위를 주는 학교에 들어가서 목회자로 배출 된 사람들이 70%정도 된다고 본다.
목회자도 너무 엉터리가 많아서 분별하여 교회 모셔야 한다.
교단이 갈라져 나오면 인가도 없는 학교에서 무자격 교수가 교역자를 너무 많이 양성해 배출함으로 함량 미달의 교역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성도의 신앙수준과 삶의 양식이 덕을 세우지 못한다. 실력으로는 안 되므로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 뿌리를 뽑을 만큼 세게 기도를 통해 불을 받았다고 설쳐대면 감당을 할 수 없다.
이런 엉터리가 성경을 사사로이 풀고 억지로 풀어 가지고 능력을 받았다고 사람들을 끌고 다니고 가르치는 것이 이단이다.
2장
베드로후서의 편지를 받는 교회에도 현제 거짓 선지자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이를 삼는다는 것은 성도를 이용하여 돈을 번다는 것이다. 성도의 영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탐하여 성도를 이용한다.
우리 사회에 어떤 이단들이 있는지 살펴보면
1.성경 66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단 사이비
2. 성경 66권외에 어떤 책을 더하는 이단 사이비
3. 성경 66권 중에 어떤 책을 빼는 이단 사이비
유대교는 아예 신약 전체를 빼 버린 이단이다. 구약시대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하고 역사서 예언서는 인정하지 않았던 이단이다.
4.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단(여호와의 증인, 유대교)
5.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
이슬람교는 예수님도 예언자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선지자 중에 최고는 마호멧이 최고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음
6.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
칼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출입문이라고 했다.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는다.(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며...)
독일의 신학 학문 중에 성숙한 인간론은 동정녀 탄생이나 오병이어 같은 기적이 아니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성숙했으므로 이런 꾸며낸 이야기 같은 기적을 믿지 않는다.
인간이 유치했을 때 기적을 성경에 기록하여 믿게 하려고 했지만 이젠 인간이 성숙 했으므로 그런 황당하고 유치한 성경은 성숙한 인간에게 수준이 낮다고 교만방자하게 떠드는 신학이 독일 신학이다.
그런 성숙한 독일 사람들이 저지fms 전쟁이 1차 세계전쟁과 2차 세계전쟁이다.
칼 바르트가 로마서 1장 주석을 하면서 성숙한 것 좋아 하시네! 인간은 완벽한 죄인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없이는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교만을 떨고 있는 독일 유럽계통 신학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칼 바르트이다. 칼바르트 신학을 신 정통주의라고 부른다.
7.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 사이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인데 너무 성실하고 착하므로 그리스도로 인정을 해 주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좀더 타락하면 오늘의 그리스도는 누구냐? 하는 신학 주제를 가지고 나온다. 오늘의 구원은 무엇인가? 산업 사회에서 비 인간화 되어가는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한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는 책이 두꺼워진다. 민중신학에서 오늘의 그리스도는 민중(노동자)을 위해 분신 자살한 “이한열”, “박종철”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 시대의 아들에 불과한 그 시대의 죄를 짊어 졌고 이한열이나 박종철은 오늘날 우리의 죄를 짊어 졌으므로 오늘의 그리스도는 이들이라고 부르짖는 것이 민중신학이다. 오늘날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안 되고 이한열이나 박종철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민중신학이다. 우리의 자식을 한신대에 보내면 그렇게 된다.
그런 신학을 배우고 나면 목회를 할 수 있겠나? 신학교에 가면 신학교 교수들이 이런 것도 학문이니까 가르친다.
이화여대 교수 중에 J라는 사람은 호주 켄브라에서 WCC 세계 대회가 모였을 때 한국 신학자 대표로 참석해서는 소재(하얀 한지를 불에 태워 성주 신에게 올리는)를 올리면서 임진 왜란때 칼 맞아 죽은 귀신이여 오소서 6.25때 총 맞아 죽은 귀신이여 오소서 하면서 귀신을 불러서 위로한답시고 이런 짓을 했다. 거기서 새로운 신학의 장르라고 각광을 받았다는 후문이 있다.
신학교의 교수들이 이렇게까지 타락을 하고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는 무인가 신학교에서는 함량미달의 목회자를 배출하니 한국교회의 앞날이 암담하다.
이러하므로 능력의 기적이 나타난다고 아무 곳이나 따라 가서는 안 된다. 요즘에는 귀신이 더 많이 기적을 행한다.
8.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
초대교회 당시의 대부분의 이단으로 성경에 나오는 이단이 대부분 예수님이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이단이다. 예수라는 인간에게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가 들어갔다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삭 빠져나갔고 인간 예수만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영이 육체가 되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헬라 철학과 기독교를 혼합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9.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실패라고 주장하는 이단(통일교)
오늘날은 통일교라 하지 않고 가정교회라고 하는데 얼마나 변신과 둔갑의 귀재이든지 도깨비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세계기독교신령협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지금은 가정교회로 바꾸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것은 실패했기 때문에 문선명이가 왔다는 것이다.
10. 예수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
오늘날 유럽의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죽으면 그만이지 부활 했다는 것은 제자들 마음속에 예수를 믿는 믿음이 부활 되었다는 것이고 예수님은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부활절 설교 제목으로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를 설교한다. 교회가 어떻게 되겠나?
이런 신학을 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서 유럽으로 유학을 간다. 유학에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하면 우리나라에 와서는 신학교수가 되지 못하므로 기가 막히는 일이다.
결국 유럽신학이 한번도 똑 바로 서보지도 못하고 넘어져버린 것이다. 중세 1000년은 썩어 부패하여 전혀 신학이라 할 가치도 없고 루터, 칼빈, 쯔빙글린, 위클리프, 파렌 이런 분들이 약 1세기 정도 활동하다가 계몽주의 인본주의 과학주의 이성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런 이데올로기에 떠밀려서 유럽교회가 형편없이 지지멸열 할 때 몇몇 사람이 미국에 건너가서 청교도를 세웠지만 미국교회도 프리메이슨이 만든 세계화에 휩싸여 타락하게 된다.
오늘날 “월드”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조심해야 한다. 월드컵(FIFA)
11. 예수님의 재림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
12. 예수님의 재림이 이미 이루어 졌다고 하는 이단
1884년에 영으로 임했다고 엉터리가 있다.
13. 역사성이 결여 된 이단(카톨릭)
역사성이 전혀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온 이단으로 신흥종교는 곧 이단이다.
신흥종교는 기존의 교회를 모두 부정한다. 예를들면 지방교회(중국)가 있다.
14. 성령 혹은 보혜사로 사람을 내 세우는 이단
사람을 절대화 하는 이단(안상홍)들 사람을 신격화하는 이단
라헬리안(예수님과 하나님은 외계인이다) 이단
15. 역사의 종말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
16. 천국과 지옥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
안식교(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지옥을 부정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불과 유황불의 지옥을 만들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불과 유황이 타는 지옥은 없고 무덤이 곧 음부이고 지옥이라고 한다.
17. 믿음 외에 구원의 조건(안식, 할례, 헌신)을 덧붙이는 이단
18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주장하는 이단
19. 성경 외에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았다는 이단
20. 율법무용론자(율법은 아무 쓸데없다) 구원파가 이런 범주에 속함
21. 윤리와 도덕성이 결여된 이단
22. 신비체험을 절대시 하는 이단
23. 기성교회를 부정하는 이단
초대교회의 이단과 지금의 복잡한 이단은 차이가 난다.
영지주의는 육체는 본래 악한 것으로 개선의 여지가 없고 어차피 육체는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므로 육체가 범한 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호색한 무리들이 생겨나게 된다. 영만 선한 것이고 육체는 무조건 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헬라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다만 우리 속에 죄가 들어와서 육신의 욕망이 악한 것이고 육신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모든 타락한 천사를 모두 한곳에 넣어서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흉악무도한 사탄은 무저갱에 감금되어 있고 사람이 감당 할 정도의 마귀귀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하여 성도를 시험(테스트)용으로 훼방하도록 인간 세상에 활동이 허락 하신 것 같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마귀가 역사 하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고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있듯이 너무 악한 귀신은 활동하지 못하게 한다.
복음서에 보면 거라사인 에게 들어 있던 흉악한 군대귀신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이편에서 일을 하시다가 아무말씀도 없이 갑자기 호수 저편인 거라시인 지방으로 가셨는데 무덤사이에 거하면서 오가는 사람을 괴롭히고 쇠고랑을 채워도 감당이 안 되고 자기 몸을 상하면 아무도 제어 하지 못하는 군대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서 다가가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때가 되기 전에 나를 멸하려 왔나이까? 하면서 자기를 무저갱이 던져 넣지 말기를 간청하는 장면이 있다. 그저 돼지에게나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돼지에게로 가라고 하니 돼지에게 들어가서 돼지떼가 물에 빠져 몰사하는 사건이 나온다.
귀신들이 점점 선해져 가는 귀신은 없고 점점 악해져 가는데 수시로 잡아서 무저갱에 던져 넣는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가가니까 무저갱에 던져 넣지 말기를 간구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불의한 자는 형벌아래 있다는 것이다. 지옥은 아니고 음부에 가서 심판날까지 기다리는 것은 분면하지만 얼마큼을 벌을 받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베드로가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을 당시만 해도 예수님이 직계 제자인 사도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런 사이비가 나와서 사도들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우롱하고 떠들고 훼방하고 있다.
영지주의 자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초월(해탈)했다고 생각하고 먹고 마시고 간음하며 즐겼다.
고성의 옥천사의 석구봉 스님이 그 절에 오는 여성들을 닥치는대로 간음하는데 이유인즉 자신은 해탈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하면서 계속하다가 결국 체포된 사람이 있었다.
기독교에서도 이런 사이비가 있었다는 것이다.
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세례요한이 탄생한 언덕에서 샘이 하나 있고 나머지는 모두 우물이다. 이스라엘 샘은 지하 10m~30m 깊이에 물이 고여 있다. 10층 이상의 높이 까지 내려갔는데 물이 없는 가증한 샘, 강수량이 우리나라 절반도 되지 않는 곳에서 구름이 비를 뿌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가증스러운 것
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여기서의 자유는 성의 자유이다. 성적인 육적인 욕구에 져버린 종이다. 성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모두 성의 노예이다.
일본도 간통이나 간음의 죄목이 없다. 강간은 죄가 되지만 12세 이상의 여자가 두 사람의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성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3장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우리 아이가 이상해요. 우리나라 태어나는 아이 중에 30%가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고 있다. 아토피가 얼마나 심각하고 고통스러운데 앞으로는 50% 결국은 100% 아토피가 생길 것이다. 아토피가 생기는 원인이 다른 요인도 있지만 우리 몸에 회충(기생충)이 없어서 아토피가 생긴다는 것이다. 회충이 있을 때는 아토피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 회충이 너무 많이 있으면 해롭지만 적당하게 있어야지 없으면 우리 몸의 저항력을 현저히 떨어지게 만든다. 회충뿐만 아니라 이와 빈데 벼룩 모기 등 골고루 있어야 되는데 이런 것이 없어지므로 우리 몸의 저항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이다.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것 중에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 대장균도 있어야 한다. 대장균이 대장 속에 없으면 당장 죽는다. 도시 문화 속에서의 생활은 외부에서 이런 자극이 없으므로 몸 자체가 저항력이 없어서 온갖 병이 걸리게 된다. 창조의 원리는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없어도 되는 것이 없고 모두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벌에 쏘이고 개미나 벌레에 물리고 가시에 찔리면서 저항력이 막강하게 되는데 멍청하게 이런 것을 없애면 되는 줄 알았다.
창조의 원리는 필요하지 않으면 만들지 않는다. 이런 것이 없으면 우리 몸에서 방어할 항체를 만들지 않는다.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는 질병이 창궐하는 것이다. 왜 질병이 창궐하는가 하면 창조원리에 맞지 않게 죽이고 없애고 차단해 버리므로 아이들이 아토피가 생기고 약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아토피 때문에 하루 종일 긁는 아이를 보는 어머니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SBS에서 “잘 먹고 잘 사는” 프로그램이 나온 이후에 “우리아이가 이상해요” 프로그램도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준다.
결국은 우리 몸에 피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혈액 속에 미량 원소가 모자라서 빈혈정도만 생각 했는데 그런 정도가 아니다.
소금도 천일염을 먹어야 하는데 모두 정제 한 염화나트륨만 먹으니까 미량의 물질 들이 많이 모자란다. 우리 몸에서 미량의 물질이 만들어져서 분비되는 것을 호르몬이라고 하고 우리 몸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우리 몸에 필요한 미량의 유기물을 비타민(바이타민= 생명물질)
이고 무기물 속에서 섭취되는 미량의 물질을 미네랄이라고 하는데 이 세가지가 극히 미량인데도 이것들의 우리 몸에서 균형이 깨어지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온갖 생명들이 풍성해야 되는데 해충이라고 없애버리므로 집 먼지 찐드기를 당하지 못해 천식이나 아토피로 고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귀한 집 자식일수록 이름을 개똥이라 지어서 험하게 키우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옛날 임금인 왕자들이 빨리 죽는 이유는 뻔 하다. 오늘날 우리들이 모두 왕자이고 공주 이므로 생명을 단축할 짓만 하게 된다.
사람들이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고 편하게만 살려고 함으로 이런 결과가 오는 것이다.
사람은 땀을 흘려야 소금이 땀샘에서 나와 건강한 피부가 된다. 땀이 나면 무조건 씻는 것은 아주 나쁘다 피부에 소금성분이 간간하게 있으면 피부가 건강을 유지하는데 요즘은 피부에 소금기가 없으니까 소금물에 목욕을 한다고 달려들지만 그래서는 안 되고 소금을 먹어서 활동(일하는) 중에 몸 안에서 소금이 나와야 하는 것이 창조의 원리이다.
하는 짓마다 죽을 짓만 하고 살고 있다. 도시의 깨끗한 집에서 침대에 카펫을 깔고 자는 사람이 가장 무식한 사람이다.
벽지도 바르지 않는 것이 좋다. 유해독소가 30배~50배나 나오고 페인트에서도 그런 유해 물질이 나온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현장을 50년대 60년대로 되돌리지 않으면 멀지 않아 아기를 못 낳고 낳더라도 면역이 약한 애들이 나온다. 종말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주 전체가 모두 파괴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물질이 모두 풀어지는 날이 온다.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모세는 1400년 이후의 일을 내다보고 있었다(너희 중에 나와 같은 선지자 한 분을 하나님께서 세울 것이라고 하면서 메시야가 오실 날을 내다보고 있다 )
아모스 이사야 호세야는 700~800년 앞을 내다보고 있었고
예레미야는 500년 앞을 내다보고 있었고
스바냐 학게 이런 분은 몇 백년 앞을 내다보았다.
처칠은 20년 앞을 내다보고 반드시 아리안 족이
이퇴계 선생은 10년 앞을 내다보고 십만대군 양병설을 주장
베드로나 바울은 2000년 후에 일을 내다보고 있었다.
성경은 어느 때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먼 훗날의 일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시점은 어떤 면에서나 말세에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030년까지는 온 세상의 유대인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계획이 있다고 하는데 확실한 정보인지 파악이 되지 않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종말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고 그쯤 되면 중동에는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평화를 아무리 외치지만 과격분자들 때문에 평화는 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들이 악해질대로 악해져 가고 있다. 신용불량자가 속출하고 카드 빚이 올무가 되고 멀지 않아 인간의 도덕이 통하지 않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이나 IT정보가 발달 된다고 하지만 그런 첨단과학기술정보는 악한 자들이 훨씬 더 많이 열심히 이용하여 악이 만연하게 된다. 자살 사이트와 인터넷에 등록된 이단 사이비가 8000여 종류나 된다. 이젠 인터넷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되었고 인간은 거룩해 질 수가 없다. 타락으로 치닫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종결 시킬 것이다.
유다서
유다서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지 않는 서신서이다. 여기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도리를 벗어난 자(배도, 이단)들이 교회에 침투한 것을 경계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여기의 유다는 마리아가 낳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 중에 한 사람이다. 마리아의 몇 번째 아들인지 확실치 않지만 야고보 다음 번째 아들이라고 추측을 한다.
기록한 연대는 예루살렘 멸망직전이나 직후라고 생각되어지므로 AD70년 전후가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가 세상을 떠난 뒤라면 AD70년 전후가 될 것이다.
유다서는 베드로후서와 문체와 내용이 너무 흡사하여 어떤 신학자는 이 두 편지를 동일저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내용이 비슷하다.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와 베드로가 함께 사역을 했던 기간이 있었던 것처럼 내용이 너무 비슷하다.
여기에 나오는 유다 뿐 아니라 예수님의 12명의 이름들이 성경의 여러 곳에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서 실제로 12명 제자의 이름이 명확하지 않다.
유다도 여럿이고 야고보도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리 마태, 안드레, 가롯유다, 빌립, 도마, 이런 제자들 외에는 활동 상황도 잘 모르고 성격도 잘 모른다.
확실치가 않지만 여기의 유다의 다른 이름을 다대오로 추측하는 신학자들이 있는데 .
다대오는 성경에서 활동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일찍이 다대오는 페르시아로 갔는데 지금 터키와 페르시아 국경지역에 다대오가 순교한 기념교회가 있다.
베드로전서 5장 13절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런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바벨론에 있을 때 유다가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골칫거리인 영지주의에 대하여 함께 대화도 하고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유다의 편지 내용이 비슷하고 또 같은 이단 문제를 다루고 있다.
베드로전서에서 바벨론에서 문안한다고 했을 때 베드로가 실제 바벨론에 있었다. 그런데 그 바벨론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로마라고 주장하는 것은 로만카톨릭에서 하는 것이고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내용은 성경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지금까지 설교자들이 바벨론에서 문안한다는 베드로후서 표현을 바벨론을 영적인 로마라고 이야기 하는데 로마라는 근거가 전혀 없다 그냥 바벨론이다.
베드로와 다대오(유다)가 바벨론 지역에서 사역을 하면서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다가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면 베드로가 실제 바벨론에 있었다는 것이다
유다는 “예후”로 히브리식 이름이고 다대오스는 헬라식의 이름이다.
베드로전서의 첫 인사의 내용과 유다서의 첫인사 “많을 지어다”는 다른 사도들은 “있을 지어다”라고 하는데 이 두 사람은 “많을 지어다”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과 이단에 대한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함께 있다 보면 닮아가고 관심사도 같아지는 것처럼 바벨론에 함께 있었다고 볼 수 있다.(여기의 유다가 다대오라고 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전개 할 수 있다)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다기 예수님의 친동생이면서 그런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예수님과 형제지간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은 예수님의 종에 불과하고 야고보의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지키심을 입은 자들” “더욱 많을찌어다” 이런 표현은 사도 베드로의 말투와 너무 비슷하다.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믿음은 일순간에 믿어지는 것이고 구원 이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안 믿어지는 사람은 오래 교회를 다닌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생은 초기에 일어나고 회개도 하고 믿게 된다.
믿음의 단계는 예정(창세전)-소명(부르심: 외적인 소명=강권해서 교회까지 오게 되는 것, 내적인 소명=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중생-회개-믿음이 생김-성화(성령의 7가지 열매)-영화 이렇게 7단계로 다룬다. 이런 과정이 정통파 신학의 구원론이다.
믿음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고 영지주의나 그노시스 철학자에게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단번에 주신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자기들만의 특별한 영적교류가 있고 특별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믿음은 사도들이나 예수님의 친동생일지라도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 같다는 것이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 단번에 주신 믿음 이런 말씀이 주어진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가만히 들어온 사람=악한 역을 맡아서 까불다가 지옥가기로 예정된 사람들
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사람은 배워도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므로 교육의 반복이 필요하다.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정상적인 성관계가 아닌 것을 말씀하고 있다.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이 사람들=영지주의 자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천사일지라도 과격한 표현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주께서 너를 꾸짖어시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11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12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영지주의자들이 애찬에 같이 참여하고 온갖 가증스러운 행동을 한다.
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외경에 있는 에녹서에 보면 이런 심판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신약에서는 외경을 인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총과 칼을 가지고는 많은 사람을 해칠 수 없지만 여기저기서 무책임한 말을 가지고는 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다.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찌어다 아멘
이 당시에는 이단 종파가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율법주의자와 무법주의자가 있었다.
무법주의자가 곧 영지주의 자들로 제멋대로 떠들고 다니면서 교회를 훼방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이 정도의 이단이지만 오늘날은 더욱 악한 이단의 종류가 창궐하다고 할 수 있다.
이단의 종류를 간략하게 살펴본다면
1. 성경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이나 66권 성경에 다른 책을 더하는 사람들
통일교는 성경에 원리강론을 첨가하여 성경보다 더 권위를 두고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는 엘렌G 화잇 여사의 글을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처럼 목을 맨다. 몰몬교는 몰몬경을 가지고 있고 이슬람교는 신구약에 코란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은 신약을 없애고 구약만 가지고 있다.
2.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단
3.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으로 예수님을 유명한 사람 중에 한사람으로(4대성인 중에 한사람)으로 생각 함
4.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 이단
5.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 예수님을 십자가를 실패했다고 하는 이단(통일교)
6.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거나 예수님의 재림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
예수님이 재림이 지나갔다고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재림이 이미 이루어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7.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이단
역사성이 없는 것은 모두 이단으로 신흥종교는 모두 이단이라 보면 된다.
8. 성령 보혜사를 사람을 내세우는 이단(안상홍이 보혜사라고 주장)
9. 어떤 특정한 인물을 절대시 하는 이단(통일교의 문선명을 참 아버지라고 주장)
10. 역사 종말을 이정하지 않고 역사가 무한히 이어질 것이라고 하는 이단
11. 천국과 지옥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여호와의 증인들은 천국과 지옥을 인정하지 않고 이 땅을 지상낙원으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안식교에서는 지옥을 인정하지 않음-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유황불 지옥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지옥을 인정하지 않음)
12. 믿음 외에 할레나 율법이나 안식일이나 이런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조건으로 내 세우는 이단
13.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이단
귀신은 천사가 타락한 것이고 사람은 죽으면 음부로 가거나 아브라함 품에 간다.
14. 성경 외에 또다른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하는 이단
15. 율법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는 율법무용론 이단
16. 신비한 체험을 절대시 하면서 성경을 무시하는 이단
17. 하나님을 외계인이라고 하는 이단 - 라일리언 무브먼트(Raelian Movement) 젊은이들이 많이 빠지고 있는 이단
18 기성교회 전체를 부정하는 이단 - 중국에서 건너온 지방교회(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교회)로 중국의 지하교회인데 기성교회는 음녀교회이고 자기들만 숫처녀 교회라고 주장하는 이단
19.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이단
20. 생명수나 약수나 성수를 경건의 재료나 유익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단(누구의 기도한 물 누군가의 안수한 물)
21. 천국과 지옥외에 연옥을 주장하는 이단(천주교)
22.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올려서 대화를 시도하는 이단(상담학 한다고 죽은자의 영혼을 불러서 용서하자고 하는 미국에서 건너온 이단)
23. 예수님의 재림의 날짜를 점치는 이단
24. 성경을 영해한다고 사실을 영적으로 풀어서 가르치는 이단(무료성경신학원이나 여호와의 증인들)
25. 인간세상의 모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단(권위를 업신여기는 자)
권위주의는 잘못 된 것이지만 권위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16. 사탄 마귀 귀신을 인정치 않는 이단
17. 전생이나 내세를 인정치 않는 이단
18. 반드시 자신이 공동체에 들어와야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이단
19. 종교와 산업을 하나로 만들어 기업을 하는 이단(박태선의 시온기업, 통일교의 일화산업) 교인들의 노동을 혹사 시켜서 폭리를 취하는 이들
20. 완력이나 폭력을 휘두르는 이단
대전에 계룡산 안에 종교가 281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룡대라는 군대가 들어와서 우상종교 대청소를 했는데 그 종교들이 흩어져서 만방으로 나가서 어디서 종교행위를 하는지... 차라리 계룡산에 모아놓았을 때 보다 더 염려스럽다.
세상의 만국종교 박람회장 같은 우리나라에서 늘 깨어 파수꾼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