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희생자인물탐구②]
신유박해 희생자 이우집(李宇集.1761~1801)
. 영광 월산리 출생(양반)
.1795년 천주교 입교(영광지역 최초의 신자)
-전주 유관검으로 부터 신앙을 전수받음
.영광순교자 오씨에게 신앙을 전파함
.1801년 3월말경(?)
대박청래사건 체포됨
.1801년 4월 전주감영으로 압송 신문
-전주 신문과 배교 고뇌
.1801년 4월 한성 의금부 신문.대질신문
.1801년 10,24(음력 9.17)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40세)
-죄목 : 대박청래 사건 불고지죄
★유관검의 친사돈 이우집
★유항검의 사돈 이종집
★이우집의 사촌누이 이육희(유관검의 처.1802.순교)
-1801.3.15. 주문모 공초
★윤지충과 인척관계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책에는 100쪽에는 출생연도가 1762년으로 기록됨.
*이우집,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공통 신분 :
儒業(천주교전주교구사1.211쪽)
이우집(1762~1801)은 전라도 영광 출신이다. '호남의 사도'라 불리는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이복동생 유관검과는 사돈 간이다. 매형의 사촌동생이 유관검이어서 가깝게 지냈다.
이우집은 1795년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전주 누님 집에 묵게 됐는데 이때 유관검의 권유로 천주교에 귀의한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유관검의 발설로 전주 감영에 체포됐다. 이우집은 신문 중에 '서양에서 큰 배가 올 텐데 그때 우리나라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무력으로 결판을 낼 것이다'하는
말을 유관검이 했다고 진술했다.
이로
인해 이우집은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등과 함께 국사범으로 몰려 서울로 압송됐고 의금부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후 전주로
이송돼 1801년 10월 24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됐다.
-「한국가톨릭대사전」-
['서양
선박 요청 모의'- 탁희성 화백 그림]
이우집이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등과 함께 서양선박을 요청하는 모의를 하고 있다.
[나약한 이우집의 변]
★이우집은 형조에서 신문을 받을 때에도 앞서 신문을 받을 때에도 앞서
전주 감영에서 진술한 내용과 포도청에서 진술한 내용을 거의
반복해서 진술했으나 또한 새로운 내용도 일부 진술하였다. 즉, 그는 유관검에게 흉악한 말을 듣고서 곧바로 관아에 고발하지 않은 것은, 비록 어리석은 탓으로 그랬더라도, 참으로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하나, 다만 천주교에 대해서만은 처음에 비록 홀려 빠졌으나 끝내
잘못을 깨우쳐 알아 이미 세례를 받지 않았고 또 세례명도 없으니, 결국
천주교에 물들지 않았음은 이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으므로 천주교로 죄를 받는다면 참으로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사학징의 권2 이우집신문기록 249~250쪽
[이우집 판결안]
유항검의 무리들이 큰 배를 청해오는 일과 , 윤지충 무리들의 교당을 건축할 의논과, 인천, 부평 사이에 배가 천 척이 있다는 말을 활발히 수작하였다. 정상을 알면서 고발하지 않은 죄로 참하였다. (知情不告知罪)
[호남 교회사 연구소장 김진소 신부의 변]
이우집이 1차 심문과 유관검과의 대질신문
내용을 살펴볼 때 배교자로 추정되어 순교자로 볼 수 없고 희생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사료됨
전라도
영광 월산리 출신 이우집은 영광양반으로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전주생, 1756-1801.10.24.전주에서 순교)의 친사돈이었다.
당시
양반들의 꿈처럼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그는
유항검의 인격과 신앙에 감화되고 유관검의 권유를 받아 입교하여 교리를 배웠다.
의금부
결안에 보면 이우집은 유항검과 같이 몰래 이류(異類; 오랑케)와 통하여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하는 일에 놀라서 달려가
고하려는 마음은 없이 수컷이 암컷을 부르면 화답하는 것같이 적극적으로 수작하였으며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불고지죄로 나온다. 그해 3월에 체포되어 전주감영 포청 형조를 거처 의금부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10월 24일( 음 9월 17일 ) 전주( 지금 전동 성당 터)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40세 였다.
그의
심문에서 유항검 형제나 윤지헌으로
부터 듣지 못한 엄청난 새로운 사건이 밝혀진다. 그는
남인(南人)으로
영광 사람이며 1762년에
태어났다. 이우집에게
유관검은 자기
사촌 매형의 사촌 동생이 되므로 사돈간이었으며, 두
사람의 정분은 두터웠다. 이우집은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가끔 유관검에게 재물을
얻어갔다. 1795년경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목인 초남리의
사촌누이 집을 방문하였을 때다. 밤중에
유관검이 찾아와
천주십계를 보이면서 천주교를 권유하였다. 그후부터
유관검에게 교리를
배웠고,
조과(아침기도),
만과(저녁기도)
책을 받아와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유관검은 산골에
교리 공부방용으로 새로 사랑을 짓고 교리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학습하도록
하였다.(중략)』
(천주교전주교구사1. 김진소 지음. -이우집의 1차 신문, 192쪽)
0 2차 신문(199쪽)
-이우집은
유항검의 절친한
인척으로 유관검의 권유를
받아 사학을 전수(傳受)하고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며 유항검의 무리와
같이 몰래 이류(異類)와
통하는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하는 일에 전연 놀라서 분개하고 달려가 고하려는 마음은 없이 수작하였으니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不告知罪)로써
결안하였다.
-천주교회사 (천주교전주교구刊) - 이우집의 사건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