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보(작객, 윤보, 바오로) :
장성
삭비리와 영광 신어실에서 한 때 거주했으며,
1871년
나주 감옥에서 50세에
옥사함(치명일기 793)
유문보는 나주 태생으로 장성 내인동에서 입교하여 영광 신어실, 남포 간재, 장성 삭벌리(色峴里: 現 장성댐 수몰지역)에서 살다가 1871년(고종8년)에 붙잡혀 나주 감옥에서
고문으로 옥사하여 순교하였는데 나주의 무학당 순교자 가운데 한 분이다.
*유의 : 나주 무학당 순교자 유문보에는 1871년 체포, 1872년 2월 12일에서 3월 9일 사이 옥사. 50세로 기록됨
치명일기 793번
『전남 장성 삭벌리에서 살다 나주 포교 김용운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에다가 염병에 걸려 1871년 11월쯤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옥사하니,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이 모든 이야기는 세 분의 순교자와 같이 잡혀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순창 묵산 사람 최성화(안드레아)와 장성수도 사람 서윤경(안드레아)이 1898년 11월 16일 증언하였고 이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다.』
나주무학당 순교자로는 기해박해 때 이춘화(베드로)를 비롯하여, 병인박해 때는 조선군 병영의 정문인 무학당 앞에서 강영원(일명 성운, 1822~1872, 바오로), 유치성(일명 치경, 1825~1872, 안드레아), 유문보(일명 작객, 1822?~1871) 등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침과 백지사형, 옥사(고문사) 등으로 순교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들이 처형당한 곳으로 무학당 원래의 터였다고 전해지는 자리는 지금의 나주초등학교 정원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최근 학교 내 구시장터로 새롭게 고증되고 있는데, 그 근거로는 《여지도서》나 《호남읍지》 등의 관련 기록이나 공개 사형터로서의 일반적인 입지, 그리고 새롭게 녹취된 구전 등을 들 수 있다.
영광순교성지기념관 작품-핏빛사랑으로 진복을 사신 유문보 바오로 순교자(스테인드 글라스)
1) 서윤경(안드레아.장성수도사람)의 증언
영장 : “너희들이 참으로 천주학을 하느냐?” 무학당 순교자 : “과연 그러하외다.”
영장 : “이후에도 하겠느냐?” 무학당 순교자 : “만 번 죽사와도 하겠습니다.”
영장 : “그러면 너희를 죽이겠다.” 유치경을 발등에 불로 놓고 강성원, 유작객은 태장을 무수히 쳤다.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 17-18)
2) 최성화(안드레아.순창묵상사람)의 증언
발등에 불을 놓은 형벌로 독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태장을 무수히 맞고 목토시에 상태에서 통성으로 기도를 바치고 위중한 유문보를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였사옵니다(강영원과 유치성은 태장 30대를 맞고 백지사 당함).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 17-18 )
[1872년 나주목 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