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자 : 남조이(1801 : 황해도 은율유배), 영광거주, 남편 김득겸에게 교리 배움, 김득겸이 죽은 뒤 여러 사람들 을 널리 가르친 죄로 황해도 은율에 유배당하였다.
(사학징의1.조광역주, 각도에서 유배보낸 죄인 명단. P.271)
▲유배자 : 이종집(1801 : 황해도 문화유배), 영광거주,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복자)의 사돈, 천주교를 배워서 심하게 빠진 죄로 황해도 문화에 유배되었다.
(사학징의1.조광역주, 각도에서 유배보낸 죄인 명단. P.271)
『그러면 1801년 신유박해를 받아 신앙공동체가 와해되기 직전 영광지역의 교세는 어느정도나 되었을까 궁금하다.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 숫자는 이우집.이종집.오씨.이화백.윤종백.남조이와 그녀의 남편 김득겸이 추가된 7명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들 7명은 신유박해 때 붙잡혀 처벌을 받은 신자들의 숫자이지 당시 영광지역 신앙공동체에 속한 신자들의 총 숫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박해가 있을 때마다 교회의 전체 신자들 가운데 일부만이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던 점을 고려할때, 신유박해 직전의 영광지역 신자들의 숫자는 7명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남조이가 남편 김득겸에게 천주교를 배우고 남편이 죽은 뒤 여러 사람들을 널리 가르쳤던 사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신유박해 때 신문 과정에서 드러난 영광지역 신자들의 수가 7명으로 전라도에서 전주(36명).고산(16명)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았고, 또한 처벌된 신자들의 수도 처형된 자 3명과 유배된 자 2명을 합쳐 노두 5명으로 역시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영광지역의 교세가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당시 신문관이 유항검 형제의 전교로 두서너 고을의 백성만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보고했는데,백성의 반이 입교한 두서너 고을 가운데에는 영광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이 당시 영광지역의 교세가 컸기 때문에 주문모 신부의 은닉처로 영광지역 신앙공동체를 고려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
[서종태 박사 논문-'영광지역의 천주교 전파와 박해 및 순교터']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조현범 외, 디자인흐름 간행)에 실림287~320쪽
★남조이(김득겸의 처.황해도 유배자)
-평민
부인은 '조이'를 붙인다.
.양반
부인은 '씨'를, 김씨부인
.중인 부인은 '성'을 붙여 김성부인,
.천인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조광교수는 양반 부인에게도 '조이'라고 부른 사례가 있다고 주장.
('유 조이'경우도 양반 집안 출신 이었으나 '조이'라고 부른 사례가 있었음)
-'순교자의 삶과 신앙'(도서출판 형제애. 247~248쪽)
[영광 유배자를 나타낸 순교자 기념관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
영광순교성지기념관 작품-'핏빛사랑으로 진복을 사신 영광의 순교자들'(스테인드 글라스)
아래 좌측부터 남조이, 홍순희, 이종집 3인의 유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