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6년
전주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의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 해에 순교한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
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이는 경기도 인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이다.
그는 권일신의
집에서 교리를 배워 이내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자인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
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했다. 그에게는
빈부귀천이 없었다. 그는
교리를 실천하여 모범을 보였으
며 가난한 이웃과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 이승훈이
중심이 되어 임의로 성
직자를 임명했을 때 그는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는 고향에 내려와 신자들에게 성
사를 주거나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 후에 이런 행위가 독성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성무활동을 중단했다.
이
때부터 지도층 인사들이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고
유항검은 이
계획에 적극 참여 하였으며,
1789년
말 윤유일(바오로)
파견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유항검은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조정에서는 신부 체
포령이 내리자,
주 신부는 이를 피해 지방순회에 나서게 되는데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
유항검의 집을
방문하여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후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선박을 조선에 파견하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유항검은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보지 못하고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에
앞서 그는 자신의 장남 유중
철과 이윤하(마태오)의
딸 이순이(누갈다)가
동정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박해가
일
어나자 유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
었고,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
때 박해자들은 선교자와 서양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가 유항검이란 사실을
알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으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
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1)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
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
일)
남문밖에서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2)
성 다블뤼(St.
A. Daveluy)
주교는 훗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해 부정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
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3)
(‘하느님의 종'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51.유항
검 아우구스티노. 160~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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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학징의 2. 유항검 228~231
2)『일성록』, 순조원년 9월 24일; 『추안급국안』. 순조원년 9월 11일. 559~562쪽
3)『St. Daveluy, vol.4, 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ee』1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