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백의 스승이며 교리를
가르침.
전북 무장, 1801년 7.19(양력 8.27, 38세, 전라도 사도 윤지충(尹持忠.바오로.1759-1791,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한국최초의 순교자)에게
교리를 배움,
무장 개갑장터(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참수, 28명을 입교 시킴.
.고창 최초의 신자이자 순교자
.최수천(崔壽千)과 최일안은 최여겸 마티아의 조카
★ 죄명 : 『최여겸은 처음 윤지충으로 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이후로는 이존창을
따르면서 독실하게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사학징의1. 170쪽)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어 천주교를 물들게 했다.』(형조의 사형선고문)
.유항검, 윤지충, 이존창을 통해 입교. 1801.7.19.
참수
(한국천주교회사2.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9쪽)
*1763년 전라도 고창의 양반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윤지충을 찾아가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결혼후 처가가 있는 한산에서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만나 천주교 신앙생활에 더욱 매진하였다. 고창으로 돌아와 전교활동을 하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체포되어 고창으로 이송되었다. 고창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다시 전주로 이송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았다. 고향인 고창으로 다시 이송되어 1801년 8월 27일 개갑장터(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참수형을 받고 38세에 순교하였다.
『순교자
최여겸의 세례명은 마티아이고, 전라도 무장에서 출생했다. 최여겸의 신분에 대해서는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양인으로, 「황사영 백서」에는 상인(常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명단에는 양반 출신으로 되어 있다. 최여겸은 윤지충[바오로]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그 교리를
더 자세히 배우기 위해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존창[알로이시오]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전교(傳敎)에 전념했다.
신유박해
당시 최여겸이 고향에서 영세시킨 사람이 28명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그의 폭넓은 전교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최여겸이 입교시킨 사람들로는 무장에 사는 조카 최일안을 비롯, 최수천(崔壽千), 흥덕의 김처당(金處當), 함평의 남중만(南重萬), 영광의 이화백(李和白) 등이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최여겸은 충청도 한산(漢山)의 처가로 피신했으나 배교자의 밀고로 4월 13일 체포되어 한산관아, 전주감영을 거쳐 형조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8월 27일 고향인 무장의 개갑장터에서 참수되어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순교지는 영광과 지척지간이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우시장이 있는 곳이었다.
형조에서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최여겸은 처음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이후로는 이존창을 따르면서 교리를 독실히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迷惑)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고창군 ‘디지털
고창문화대전 인터넷 홈페이지 ‘최여겸 순교지‘ 내용)
*참고 : ‘영광천주교회사’에는 이화백의 한자가 ‘李化伯’으로 표기됨
崔汝謙 마티아는 茂長 고을의 조그마한 班名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막연히 듣고 그것을 알기를
매우 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內浦 지방의 남쪽에 있는 韓山 고을에서 결혼하였다. 그는
미구에 그 근방에 천주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서
복음의 주요한 진리를 배운 다음 茂長으로
돌아와, 대대한
열심으로 그것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신앙을
사방에 알게 하고 자기가 받은 은총을 전해 주기 위한 그의 열심과 信心이 대단하여 많은 외교인을
입교시켰다. 고향에서
박해가 맹렬히 일어나자 (崔汝謙)마티아는
韓山 妻家로 피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수많은 교우가 거기서 붙잡혔는데, 그
중에는 그가 입교시킨 사람들 중에서 28명이
끼어 있었다.그들
중 몇 사람이 그를 배반하여 관리들에게 그가 숨은 곳을 알려 주었다. 그는
4월
13일
붙잡혀 우선 韓山 官衛로 끌려가 本官 앞에서 신문을 당해야만 하였다. 官長은
여러 번 그를 고문하였으나 소용이 없자, 監司에게
그의 체포를 보고하니, 監司는
그에게 칼을 씌워 茂長 本官에게로 押送하라고 하였다. 거기서
새로운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그의 용기를 꺾을 수가 없게 되자, 官長은
어쩔 수가 없어 全羅監營이
있는 全州로 그를 移送하였는데, 거기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거의
80이
된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시므로 (崔汝謙)마티아는
아무 유한 없이 죽기 위하여 어머니를 한 번 뵈러 갈 허가를 청하였으나 그 허가가 거부되었다.
그를 매질로 죽이겠다고 위협하므로 그렇게 되면 자기 祭獻에 무슨 부족한
것이 없을까 봐 겁이 나서 여러 날 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미구에 당신 종의 소원을 들어 주시어 그가 충성된 證據者 韓(正欽)스다니슬라오와
金(千愛)안드레아
곁으로 移送되기를 허락하셨다. 그들이
다시 모였을 때 (崔汝謙)마티아의
기쁨과 그 용맹한 동료들의 기쁨은 매우 컸다. 마침내
刑曺에서 최종적인 선고를 내렸고, (崔汝謙)마티아는
자기 고향인 茂長 고을 지갑 장터로 압송되어 7월
19일(8월
27일)
39세의 나이로 斬首당하였다.
여기에
같은 全羅道의 몇몇 다른 證據者들의 이름을
덧붙이기로 하는데 이들에 대하여는 자세한 사정이 남아 있지 않고, 또
그들이 순교한 정확한 날짜도 보존되어 있지 않으나, 같은
시기에 고통을 당하였을 것이 거의 틀림없다. 이들은
아래와 같은 사람들이다. 李「화백」 이 사람은 靈光 고을의 양반이요
崔(汝謙)마티아의
조카로, 흔히
「금노」라고
불리는 崔「일안」이란 사람은 영광스럽게 신앙을 증거한 후 全州에서
당한 형벌로 죽으니, 나이는
40세
였다. 靈光 고을 복산지의 양반으로 참수당한 오씨라는 교우,
끝으로 금산 고을 솔티에서
붙잡혀 全州에서 斬首당한 元氏라는 또 한
사람의 교우이다.
‘한국천주교회사 上’ 샤를르 달레.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521~522쪽)
최여겸은 무장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문초와 형벌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관장은 어떠한 형벌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하였고, 그는
전주에서도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 옥중에서 열심한 신자 한정흠(스타니슬라오)과 김천애(안드레아)를 만나게 되었다. 그후 그와 동료들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해읍정법(亥邑正法)의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최여겸은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어 그곳 개갑 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읍면 갑촌)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그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한국의 성지’ 인터넷 홈페이지 고창군 개갑 장터
↑최여겸(마티아)이 신유박해 때 충청도 한산의 처가에 피신해 있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