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홍씨(南陽洪氏) 인주도령 중랑장파(麟州都領 中郞將派) 13세
남양군(南陽君) 문량공(文良公) 휘(諱) 여방(汝方) 신도비(神道碑) (번역문)
남양홍씨 인주도령 중랑장파 13세 대종손
(南陽洪氏 麟州都領 中郞將派 13世 大宗孫)
자헌대부 이조판서 보문각대제학 남양군 문량공 휘 여방 신도비
(資憲大夫 吏曺判書 寶文閣大提學 南陽君 文良公 諱 汝方 神道碑)
비문에 왈 유명조선국 자헌대부 이조판서 보문각대제학 휘 여방공이 계셨으니 자(字)는 자원(自圓), 성(性)은 홍씨(洪氏)다.
남양부 인(人)으로 현조는 강령군(종1품)이요. 고휘(考諱) 길민, 개국공신 남양군(종1품) 이며 시호는 문경공이요. 비는 한정택주 청주경씨다.
귀한 아드님을 낳으시면 이름을 구방(鳩方)이라 함이 마땅하다 하더니 과연 얼마 안 되어 잉후가 있는지라 고려 우왕 7년 신유년 8월(서기 1381년 문경공 29세 때) 생하니 공의 이름을 드디어 구방(鳩方)으로 하다.
사마시 1등을 하고 신사 건문(명나라 2대 혜제의 연호) 3년(조선 태종 원년) 명경병과 4인에 등과 하니 이때가 공의 나이 21세라 가을에 예문각검열 겸 춘추관에 보선되어 임금이 평산온천에 거동하실세 공이 노이와 더불어 사관으로 호종하였고 태종 2년 임오 공의 나이 22세 때 예문봉교 겸 상의원직장 세자우사경에 보선 25세 때 태종 5년 을유 봄에 이조좌랑 세자우사경에 재선 태종 6년 병술 고휘 길민공 환우가 심하여 음식을 3일간 먹지 않으며 거적때기와 흙덩어리를 베개로 하여 취침하다가 슬픔에 지쳐 몸이 훼손되고 질병을 이루어 성장이 감하기에 이르니 보는이 모두 슬펴하였다.
태종 10년 경인에 이조정랑 지제고를 제수하고 태종 11년 신묘 가을 조감직을 더하여 기주관에 이르렀고 태종 13년 계사 여름 지승문원사 지제교로 겨울에 사헌부 집의직 집현전 태종 14년 갑오 여름 판사직 보문각 겸 지형조사로 승급하여 송사를 평등하고 윤등하게 결심하니 모든 사람이 승복하고 동 부대언 지형조사로 승계하여 상명하게 베풀어서 아뢰며 기름지게 가르킴이 크고 많았다.
태종 16년 병신 봄 우부대언 초에 좌의정 박은의 소송 노비 판결이 부당하다 하며 서적을 거두어 관에 들어가 은(誾)이 재상소 송사를 원통하다 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하명, 의논한바 가부동렬이라 그 사이에는 자뭇 어긴 자에게 의지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좌대언 서선 등과 더불어 가르켜 왈 공에게 속한 노비는 다시 쟁의를 얻을 수 없음이 이미 교지에 있는지라 법은 가히 경솔하게 고치지 못한다 하였다. 임금이 가라사대 너희들의 말은 모두 명에 어긋났다 하시며 강제로 집으로 돌려보내고 마침내 파직을 하였다.
태종 17년 정유 가을 이조참의 보문각직제학을 제수하시고 겨울에 강원도도관찰사로 출사 하시니 개념이 맑고 깨끗하며 예부터 도낏날 같은 풍채를 가지셨다. 또 다음 해 무오년 예조참판을 제수하니 집현전제학을 다 차지하였다.
세종 원년 기해 봄에 형조참판 보문각제학을 제수, 겨울에 사은사로 명나라 경사에 취임하니 명(明) 태종 황제가 그가 한확의(덕종의 비,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의 아버지) 장인이 되심을 알고 대궐로 불러들여 특상을 더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세종 2년 경자년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하니 워낙 강직하고 충성된지라 여름에 설화를 만나 벼슬을 깎이고 장렴으로 유배하였다. 가을에 용서함을 입어 장단으로 옮겨 움막에서 정자를 건립하고 연주정이라 정하고 우거 하였다.
(현재 경북 봉화 당성사 내로 이축하였으며 연주정 건립(1420년~2020년) 600년 기념비 세움)
세종 4년 태종께서 승하하시니 공이 삼 년 상을 마치고져 하던 중 겨울에 어머니 청주경씨 께서 세서(世逝)하시니 슬픔이 더하였다. 공의 충군 효친의 마음이 지성으로 나타내니 사람이 따르고 덕을 선양하였다.
세종 8년 병오 임금의 부르심으로 입궐하여 세종 9년 정미 봄에 평안도도관찰사를 제수, 다음 해 무신년 겨울 한성부윤을 또 경상도도관찰사를 제수, 다음 해 기유년 좌군총제 세종 15년 계축 전주부윤을 제수함을 받다.
세종 19년 정사 인수부사를 제수, 자헌(資憲)으로 승진하시고. 다시 한성부사로 선임하시며. 다음 해 무오년 여름 사은사로 명나라 경사에 취임 중 본국에서 예문관대제학을 제수하시다.
무오년 겨울 명나라 태종 황제로부터 조칙을 받고 관복을 하사 받은 후 공경하게 받아 환국하셨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시며, 친히 주연을 내리시고 위유하며 안마를 하사 하신 후 특배 이조판서 보문각대제학을 하셨다.
그해 10월 13일 질환으로 사저에서 서거하시니 향수 58세라. 임금이 조문하시고 심히 애도하시며 조정의 정무를 2일간 그치고 사신을 보내어 조의를 이루고 부의를 더하여 증여하시다. 공은 기와 도량이 너그러워 재주와 슬기가 뛰어났고 풍신이 맑고 명랑한지라 생장할 적에 기름지고 대들보처럼 튼튼하였다.
죽이고 쓰러지는 습성이 없고 일찍이 화려한 요직을 역임하여 기만과 사치를 끊고 겸손과 검소함이 충만하였고 삼가 게으름을 아니하며 일에 정성을 다하여 강직하고 사사로이 간구를 감히 못하게 하였으며 벼슬에 오르면 부무를 대체로 존수하고 일에 가혹하거나 자잘 굴게 아니하였다.
사람과 더불어 사귐에 언덕과 낭떠러지에 서지 못하게 하며 하나 같이 지성으로 화기 온온하였고 아래로 종과 첩에 이르러서는 그를 보아서는 함부로 하지도 아니하였다. 젊어서부터 배움에 힘을 써서 많은 글을 널리 보고 좋은 글을 더욱 엮어서 시구를 내려지을 때는 붓글씨가 흐름 같이 요락 하여 막히고 엉킴이 없었다.
말씀과 뜻이 회오리바람처럼 달리니 한때 문장거수로 모두 앞장서서 겸손하게 모시었다. 만년에 이르러서 역사책 읽으심을 좋아하셨으니. 공의 지조 이행이 이와 같이 돈신하였다. 비록 충직함이 둔하여 고생한 흠은 있으나 의지와 기골을 갈고닦아서 그 근심을 보이지 아니하고 매우 중요한 정무 중 추성에 재 등용하여 부드러운 연꽃처럼 사랑을 받으며 겸손과 공경이 두루 밝으니 임금이 방향으로 헤아려 크게 등용하였다.
하늘이 나이는 거짓이 아니하여 급기야 이에 이르게 되니 슬프고 아깝도다. 공이 한성부윤 추증, 의정부영의정(정1품), 좌찬성. 정부(鄭符)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고 후에 인수대비의 외조가 되시니 증 우의정(정1품), 습봉 남양군(종1품) 하였다.
배위 정경부인 동래정씨 묘는 장단 금다리 유좌.
비문에 왈 부인성은 정씨요. 동래 망족(望族)야라 증조는 휘 호요. 봉산군(종1품)이요. 조 휘는 량생 봉원군(종1품) 이며. 고 휘 符(부) 한성윤이니 추증, 의정부좌찬성(종1품) 하여 외조는 삼사좌사(정2품) 충정공 이희필이다.
고려 우왕 6년 경신 5월생이요. 나이는 19세라 이조판서 문량공 홍여방에게 시집오시니 남양군(종1품) 문경공 길민의 며느리이며 문장 덕행이 세간의 종부인이라 부모를 섬기매 효도를 극진하고, 제사를 받들매 정성을 극진하며 비복을 자상하게 사랑하고 후의를 베풀고 기망과 방모한 사람은 서로 훈계하고, 시종 게으름을 아니하시니, 문량공이 예우를 더욱 무겁게 하시었다
세조 5년 기묘(1459년) 3월 서세하시니. 향수 80세라, 6월 장단에 유좌묘향으로 안장하였다. 부인이 생 3남 3녀 하시니 증현손이 백여인이다.
세조 7년 신사 3월 아들 강령군(종1품) 휘 원용 소찬
자, 원용 형용(사직) 이용(부사) 녀, 정효손 (연일인 대호군) 한확(청주인 좌의정 서원부원군(정1품) 양절공) 장보(인동인 창승)
(신도비 비문은 강령군이 환갑 때인 신사년에 찬하시고. 신도비는 6년 후 강령군 돌아가신 다음해, 성화 3년 정해 세조 13년 1467년 건립됨)
(성화 ; 명나라 헌종의 연호 세조 11년 을유 1465년 시작, 조선 성종 18년 정미 1487년까지 23년간)
공의 묘역은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고릉동)로 신도비 제각 등이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하기에 예전 전쟁의 총탄 등에 훼손된 채 출입 등이 자유롭지 못해 복원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다.
https://cafe.naver.com/wndfkdwkdvk/1282
[출처] 南陽君 文良公 諱 汝方 神道碑(신도비)
(南陽(唐城)洪氏麟州都領中郞將派(남양홍씨인주도령중랑장파)|작성자 홍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