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정(戀主亭)에 대하여~
연주정(戀主亭)은 남양홍씨 중랑장파 대종가의 정자입니다. 지금은 경북 봉화 춘양면 소로리 방전 삼척봉 아래에 남양(당성)홍씨 중랑장파의 대종가 사당, 당성사(唐城祠)의 경내에 있읍니다만, 처음으로 건립된 것은 세종 2년(1420년) 경자 여름, 강직한 성품의 당시 대사헌이신 남양홍씨 중랑장파 13세 대종손(大宗孫) 휘 여방 공께서 설화(舌禍)로 인하여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가을에 용서함을 입고 장단으로 옮겨 움막에서 정자를 건립하시고 이름하여 연주정(戀主亭)이라 하고 우거 하면서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이 이해득실 두 가지 마음을 갖지 아니하며 오로지 한마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부터 남양(당성)홍씨 중랑장파 대종가(大宗家)의 세거지 역시, 장단이었으며 장단(長湍)에는 남양(당성)홍씨 린주도령중랑장파 대종가(大宗家)인 연방(蓮方 : 임금이 하사하신 저택을 연방이라 함)과 중랑장파 12세 대종손(大宗孫)이시면서 조선개국순충분의 공신, 자헌대부 호조판서 집현전대제학 남양군(종1품) 시(諡) 문경공(文景公) 휘(諱) 길민(吉旼)의 음택과 사방 45일경(日耕)의 제전(祭田)이 있던 지역입니다]*
그 후 연주정은 우리 중랑장파 대종가(大宗家)가 서울 원서동으로 옮겨갔을 때는 수표교 인근으로 옮겼다가 숙종 22년 병자년(1696년)에 중랑장파 23세 대종손(大宗孫) 어모장군(禦侮將軍 : 정3품) 행 용양위 부호군 휘(諱) 이원공(爾遠公)께서 봉화로 낙남하실 때에 대종가(大宗家) 집은 봉화 병현으로(가림고개) 정하시고 연주정은 지금의 삼척봉 아래에로 옮기셨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13 필의 말에 40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고도 기와를 다 싣지 못하여 일부만 싣고 왔다고 합니다.
그 후에 중랑장파 대종가(大宗家)가 병현(竝峴)을 떠나 소라(召羅)에 머물 때도 대종가(大宗家)가 춘양으로 옮겼을 때도 춘양에서 물야로 옮긴 후에도, 연주정만은 현재의 위치에 계속 있으면서 남양(당성)홍씨 중랑장파 대종가(大宗家)의 상징처럼 되어 왔으며 1994년 갑술년 무렵에는 당시, 삼척봉 일대의 토지 소유주이며 남양홍씨 중랑장파 대종중 부회장이시던 홍순벽씨의 주관으로 개축을 하고 남양홍씨 중랑장파의 대종가(大宗家) 사당(祠堂)인 당성사(唐城祠)와 문경공(文景公) 휘(諱) 길민(吉玟) 공(公)의 자(字)를 딴 명부대(明夫臺), 중랑장파 20세 대종손(大宗孫)으로서 임진왜란 때 평안도 조도사를 거쳐 전주부윤을 거처 전라도관찰사, 순찰사, 수군병마절도사에 다음 해 다시 전주부윤을 겸하여 활약하시다가 정유재란이 일자 상(上)의 명(命)에따라 다시 평안도조도사로 활약을 하고 계시던 중 임지(任地)에서 순직(殉職)하신 당성부원군(정1품), 충헌공(忠憲公) 휘(諱) 세공(世恭)의 배위로서 함흥 산중에서 왕자들과 함께 난(亂)을 피하던 중, 왜적을 만나 순절하사 선조임금으로부터 도설(棹楔)을 정려 받으신 증 정경부인 고령박씨의 정려각, 관리사 등과 함께 위치하고 있으며 장차 우리 남양(당성)홍씨 중랑장파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해년 사월초파일
남양홍씨 중랑장파 대종가 34세 후손 노유동 사는 왕식 씀.
연주정가를 짓다(홍영식)
남양(당성)홍씨 중랑장파 춘양문중의 시술공(時述公) 문중회장(門中會長) 되시는 영식 종친께서 남양(당성)홍씨 중랑장파 대종가 당성사(唐城祠) 사당과 함께 건립되어 영남에 낙향하여 300여 년을 이어온 중랑장파 대종가의 위상을 알린 연주정에 대하여 즉흥시(卽興詩)를 지으셨다.
연주정가(戀主亭歌)
(1)
태백산 천리 먼 길 흘러가는 강물 따라
신선이 타고 놀던 쪽배가 독산 되어
연주정을 품었구나 경치도 수려한데
연천의 연주정이 예 왔다는 소식 듣고
당대의 호걸들이 구름같이 모여왔네
(2)
태백산 천리 먼 길 흘러가는 구름 따라
명당을 찾던 중에 지신(地神)이 독산(獨山)되어
연주정을 품었구나 경치도 수려한데
대제학 홍여방이 예 왔다는 소식 듣고
당대의 문무백관 구름같이 모여왔네
속연주정가(續 戀主亭歌)
위의 연주정가를 지은뒤에 다시금 덧붙여서
영식종친께서 지으셨다.
들고나는 필마가 동구 앞에 줄을 잇고
피리소리 장구소리 풍류호걸 다 모였네
바쁜 걸음 노비들도 어깨를 직신직신
두보를 노래하고 이태백을 노래하네
태평성대 논하는데 요순시대 빠질쏜가
충직한청백리 연주정(戀主亭)을 본받아서
주상(主上) 멀리 떠나와도 문무백관 나라걱정
육모의 하마비(下馬碑)는 충절의 정표로다
유세통을 하사 받은 명문가 홍문안(洪門雁)댁
이제야 알아보고 깜짝 놀란 영남유림.
[출처] 연주정가를 짓다(南陽(唐城)洪氏 麟州都領中郞將派(남양홍씨 인주도령중랑장파)) | 작성자 홍왕식
첫댓글 지금의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자리에 3000여평 종가 저택이 있었다고 순벽 전회장님께 들은 기억이 남니다만 어떤게 확실한건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다시 거처를 옮기셨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아래의 경모궁지와 관련있는것은 아닐지...
서울 경모궁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창경궁의 후원터. 지금의 서울 대학교 의과 대학 부속 병원 일대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만들기 시작하였고, 성종 24년(1493)에 정식으로 이름을 붙였다. 정조 때 이곳을 경모궁으로 불렀고,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 제국 대학으로 이용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사적 제2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