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주도령(麟州都領) 중랑장(中郎將) 홍덕(洪德) 공(公)의 고려사 자료
조위총[趙位寵 : ?-1176(명종 6)]
#高麗史100卷-列傳13-趙位寵-000
○趙位寵史失世系
조위총의 가계(世系)는 사료(史料)에 없다.
毅宗末以兵部尙書爲西京留守鄭仲夫李義方等弑毅宗立明宗.
의종 말년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되었는데 이의방 등이 의종을 살해하고 명종을 세웠다.
明宗四年位寵起兵謀討仲夫等遂檄召東北兩界諸城兵曰:
명종 4년(1174년)에 위총이 반란을 일으켜 정중부 등을 토벌할 것을 계획하고 드디어 동북 양계(兩界)의 각 고을 군대에 격문(檄)을 보내 호소하기를
"側聞上京重房議以北界諸城率多桀驁欲討之兵已大擧豈可安坐自就誅戮
“듣건대 서울의 중방(重房)에서 ‘북계(北界) 여러 성(城)의 사람들은 모두 다 사나워서 순종하지 않으므로 토벌하여야 한다’라고 하여 이미 대병력을 출동시켰다 하니 우리들이 어찌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겠는가?
宜各紏合士馬速赴西京."
응당 각자의 병마를 규합하여 빨리 서경에 집결하라!”고 하였다.
於是岊嶺以北四十餘城皆應之獨延州閉城固守
그리하여 절령(자비령) 이북 40여 성이 모두 호응하였으나 오직 연주(延州)만은 성문을 굳게 닫고 고수하였다.
王遣平章事尹鱗瞻率三軍擊位寵又遣內侍禮部郞中崔均爲東北路都指揮使諭諸城
왕이 평장사(平章使) 윤인첨(尹麟瞻)에게 3군을 통솔하고 조위총을 공격하라 하였으며 또 내시 예부낭중(內侍禮部郞中) 최균(崔均)을 동북로 도지휘사(東北路都指揮使)로 임명하여 각 성(城)을 회유하라 하였다.
鱗瞻至岊嶺驛位寵遣兵急擊大破之
윤인첨이 절령역에 이르니 조위총이 군대를 파견하여 갑자기 관군을 급히 쳐서 대파하였다.
位寵先鋒至京西義方擊敗之奔還至大同江收散卒復嬰城固守
조위총의 선봉이 서울 서쪽에 이르렀으나 이의방이 격파하였으므로 조위총이 패주하여 대동강에 이르러 패잔병을 수습한 후 다시 성(城)안으로 들어가서 고수하였다.
義方久屯城外位寵擊却之
그래서 이의방이 오랫동안 성 밖에 주둔하고 있게 되었는데 조위총이 이의방을 격퇴시켰다.
義方兵獲位寵子卿及將軍禹爲善斬之傳首于京.
이의방의 군대가 조위총의 아들 조경(卿)과 장군 우위선(禹爲善)을 생포하여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서울로 보내었다.
#高麗史100卷-列傳13-趙位寵-002
明年位寵遣兵擊耀德縣
이듬해에 조위총이 군대를 보내 요덕현(耀德縣)을 공격하여왔다.
時義方已伏誅王遣殿中監庾應圭給事中史正儒詔位寵曰:
그 시기는 이의방이 이미 처단된 후이므로 왕이 전중감(殿中監) 유응규(庾應圭)와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를 보내 조위총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朕因臣民推戴奄登大寶于今六年賴文武臣隣恊輔獲守丕基頃
“내가 신민(臣民)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지 벌써 6년이 되었는바 문무백관들이 한마음으로 나를 보좌하였기 때문에 큰 과오 없어 지났다.
有賊臣專擅國政多行不義害及中外民怨兵起至於無知小民殺傷尤多朕甚哀痛其
그런데 근자에 반역자가 국권을 독재하여 옳지 못한 행위를 많이 하여 해독이 조정의 안팎에 파급하게 되니 백성은 조정을 원한하고 병란을 일으켜서 무지한 세민들에 이르기까지 살상을 많이 당하게 되니 나는 심히 아프게 생각한다.
賊臣已從卿等表奏擧義掃蕩
적신(賊臣)들은 이미 그대들의 보고와 의거에 의하여 소탕되었다.
卿等又請降使宣諭
그대들이 또 사신을 보내 선유할 것을 청하였다.
嘉乃忠誠遣使宣諭體朕至意更勵忠誠."
그리하여 그대의 충성을 가상히 여기고 이제 사신을 보내 선유(宣諭) 하니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더욱더 충성을 다하라!” 하였더니
位寵上表請降
조위총이 표문을 올려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應圭還位寵悔之遣精騎追
그러나 유응규가 돌아오자 조위총이 후회하고 날랜 기병(精騎)을 파견하여 유응규의 뒤를 추격하게 하였다.
至洞仙驛不及不勝其憤斬其舘吏而還
그들이 동선역(洞仙驛)까지 달려갔으나 따라잡지 못하였으므로 분김에 역관의 아전들을 죽이고 돌아갔다.
尋遣左營郞將徐俊明上表賀誅義方
그리고는 뒤미처 좌영 낭장(左營郞將) 서준명(徐俊明)을 보내 이의방을 처단한 것을 축하하였다.
王留俊明於法靈寺唯放校尉徐惟挺還.
왕이 서준명을 법령사(法靈寺)에 억류하여 두고 교위 서유정(徐惟挺)만을 돌려보내었다.
上京兵圍漣州數月漣州請救於位寵
상경군(上京軍)이 몇 달 동안이나 연주(漣州)를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연주에서 조위총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位寵遣將救之上京兵從*閒道擊之斬千五百餘級虜二百五十餘人又掩擊于莽園斬七百餘級虜六十餘人.
조위총이 부하 장수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더니 상경군(上京軍)이 사잇길로 가서 구원군을 쳐서 1천5백여 명을 살해하고 2백50여 명을 포로 하였으며 또 망원(莽園)에서 구원군을 엄습하여 7백여 명을 죽이고 6십여 명을 포로 하였다.
時毅宗猶未葬
당시에 의종(毅宗)의 장사를 아직 지내지 못하였었다.
以位寵聲言義方弑君不葬之罪乃發喪葬禧陵.
조위총과 이의방이 왕을 죽이고 장사도 지내지 않았다는 죄를 성언(聲言)하기 때문에 이때 발상(發喪)하고 희릉(禧陵)에 장사 지냈다.
將軍朴存威奉使在雲中道每誇納釜之事雲中人應位寵遂斬存威.
장군 박존위(朴存威)가 왕의 사신으로 운중도(雲中道)에 있으면서 연천에서 가마를 가져온 사건을 매양 말끝마다 자랑하였는데 운중 사람들이 조위총과 내통하여 드디어 박존위를 죽였다.
#高麗史100卷-列傳13-趙位寵-003
鱗瞻攻西京位寵食盡至啗人屍時出挑戰
윤인첨이 서경을 공격하였는데 조위총이 식량이 결핍되어 심지어 죽은 사람의 살까지 먹으면서 때로 나와 도전하였다.
鱗瞻堅壁不出位寵遣金存心趙規如金奏義方放弑之罪存心中道殺規來泊禮安江
그러나 윤인첨은 보루를 굳게 쌓고 응전하지 않으니 조위총이 김존심(金存心)과 조규(趙規)를 금나라로 보내 이의방이 왕을 추방하고 마감에는 죽이기까지 한 죄상을 알리게 하였으나 김존심이 도중에서 조규를 죽이고 예안강(禮安江)으로 와서 정박하였다.
王遣中使迎勞拜存心內侍閣門祗候其軍將六十人職賞有差.
왕이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그를 환영하고 위로하여 주고 김존심을 내시 합문지후(內侍閤門祗候)로 임명하였으며 그리고 그가 인솔한 장병 60명은 관직과 상을 차이 있게 주었다.
位寵聞之殺存心妻子位寵復遣徐彦等如金上表曰:
조위총이 이 소식을 듣고 김존심의 처자를 죽이고 또다시 서언(徐彦) 등을 금나라로 보내 표문을 올리기를
"前王本非避讓大將軍鄭仲夫郞將李義方弑之
“전왕(前王)이 본래 왕의 자리를 양위(讓位)한 것이 아니라 대장군 정중부와 낭장 이의방이 전왕을 죽인 것이다.
臣位寵請以岊嶺以西至鴨綠江四十餘城內屬請兵助援."
나는 절령 서쪽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는 40여 성(城)이 금나라에 내속(內屬) 할 것을 원하는 바이니 군대를 보내 나를 원조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金主執送彦等東京路都摠管府牒寧德城云:
금나라 군주가 서언 등을 붙잡아 동경로 도총관부로 압송하고 영덕성(寧德城-고려 땅)에 공문을 보내기를
"西京留守趙位寵三次遣使九十六人齎告奏表文等事今勘得所遣人徐彦等狀稱大定十年八月前王遊普賢寺大將軍鄭仲夫郞將李義方等執前王及子孫送海島立前王弟翼陽公爲王飾以因病讓位上表大朝大定十三年仲夫等遣人殺前王及子孫官僚等大定十四年位寵上表請王誅仲夫等今年正月王下詔諭賊臣等已誅復有仲夫子筠殺義方等
“서경 유수 조위총이 세 차례에 걸쳐 96명의 사람을 보내 공문을 가져왔는바 이제 그가 파견한 서언 등의 문건에 의하면 대정 10년 8월에 ‘전왕(前王)이 보현사(普賢寺)로 놀러 갔었는데 대장군 정중부와 낭장 이의방 등이 전왕과 그의 자손을 붙잡아 바다 섬으로 보내고 정왕의 아우 익양공(翼陽公)을 왕으로 삼은 후 마치 전왕이 병으로 양위(讓位)한 것 같이 거짓으로 꾸며 보고하였으며 대정 13년에 정중부 등이 사람을 보내 전왕과 그의 자손 및 관속들을 살해하였으며 대정 14년에 조위총이 왕에게 글을 올려 정중부 등을 처단할 것을 청하였는바 금년 정월에 왕이 조서를 내리어 적신(賊臣)들은 이미 처단되었다고 하였는데 또 정중부의 아들 정균(筠) 이 이의방을 죽였다.
不告國王領兵三萬餘人攻西京
그러나 귀국에 보고하지도 않고 왕이 3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서경을 공격하여왔다.
相戰至今未決勝否
그리하여 지금까지 서로 싸우고 있으나 아직도 승부가 결정되지 못하고 있다.
今年六月位寵與北界四十餘城欲屬大朝遣義州都領崔敬若等齎牒婆速路摠管府公文至義州關門爲鄭白臣等所殺又筠等軍馬遮路以此遣大使金存心趙規等各三十餘人泛海來奏不知消息節次再遣彦等其欲屬大朝及請兵問罪等事委是端的
금년 6월에 조위총이 북계(北界)의 40여 성을 귀국에 예속시키려는 의도를 의주 도령(義州都領) 최경약(崔敬若)을 파송하여 공문을 전달하고자 파속로(婆速路) 총관부로 오는 도중에 의주 관문에서 정백신(鄭百臣) 등에게 살해되었으며 또 정균 등의 군대가 길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대사(大使) 김존심, 조규 등 30여 명을 해로(海路)로 파견하였으나 그 후 소식이 없으므로 이번에 다시 서언 등을 파견하여 귀국에 부속하겠다는 것과 군대를 파견하여 문죄(問罪)하는 토벌을 원한다’는 등의 말이 있다.
欽奉帝命位寵陳乞事則非大國所容將彦等付彼國施行其彦等衣甲諸物差官交割."
이에 ‘조위총의 청원에 대하여는 우리나라에서 허용할 바 아니니 서언 등을 그의 본국으로 넘기라!’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관리를 보내 서언 등과 그들의 의복 무기 기타 소지품을 인도한다.”라고 하였다.
#高麗史100卷-列傳13-趙位寵-004
六年位寵使人詐爲居士服請兵於西北州鎭至靜州被執
6년에 조위총이 사람을 파견하여 거사(居士)로 가장하고 서북 지방의 각 주(州)와 진(鎭)에 청병하려 다니게 하였는데 정주(靜州)에서 체포되었다.
位寵與上京兵戰佯敗走上京兵逐至龍興德部位寵回兵擊之上京兵死者甚多.
조위총이 상경군(上京兵)과 교전하다가 거짓 패한 체하고 달아나니 상경군이 추격하여 용흥(用興-황주 지방)의 덕(德), 부곡(部曲)에 이르렀을 무렵에 조위총이 돌연 반격을 가하니 상경군 측에서 전사자가 대단히 많았다.
麟州人康夫祿升鄭臣等殺防守將軍蔡允和王遣內侍祗候崔存往諭之
인주(麟州) 사람 강부(康夫), 녹승(祿升), 정신(鄭臣) 등이 방수장군(防守將軍) 채윤화(蔡允和)를 죽이니 왕이 내시 지후 최존(內侍祗候崔存)을 파견하여 그에게 타일렀다.
未幾夫等又殺義州分道將軍尹光輔防禦判官李彦升以應位寵
미구에 강부 등이 또 의주 분도장군 윤광보(義州分道將軍尹光輔)와 방어판관 이언승(防禦判官李彦升)을 죽이고 조위총에게 내응하였다.
位寵遣人署諸城酋豪官.
조위총이 사람을 보내 여러 성(城)의 추장 토호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麟州都領中郞將洪德謀執位寵所遣人以拒夫等袖刃至德家欲害之德伏兵於門斬之
인주도령 중랑장 홍덕(麟州都領中郞將洪德)이 조위총의 파견원을 체포하여 항쟁할 것을 획책하므로 강부 등이 칼을 품고 홍덕의 집으로 찾아가서 암살하려 하였으나 홍덕이 문간에다 복병(伏兵)을 두었다가 강부 등을 죽였다.
鱗瞻攻西京通陽門後軍摠管杜景升攻大同門破之城中大潰
윤인첨은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공격하고 후군총관 두경승은 대동문(大同門)을 공격하여 성문을 돌파하니 성 중에 대혼란이 일어나서 괴멸되었다.
遂殺位寵函其首來獻梟于市又執送位寵妻.
그리하여 조위총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함(函)에 담아 서울로 보내 저자 거리에 효수(梟首)하였으며 또 조위총의 처자도 체포하여 압송하였다.
첫댓글 홍덕 공의 공적이 임시 파견된 중앙군(무신정권)에 의해 축소 왜곡된 것으로 분석합니다. 강부 등을 죽이고 후군총관 두경승과 함께 대동문을 열어 조위총을 잡아 난을 평정했으므로 객관적으로 볼 때 저 정도의 공적이면 분명한 공적이 상세히 기록되고 포상과 진급했어야 함에도 그 자세한 내용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무신정권에서 임시 파견된 중앙군들이 그 공적을 가로채고 공의 공적은 축소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며 실제 그런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