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124m의 보현산이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긴 협곡을 이룬 곳에 조그마한 동네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천군 자양면 신방동이다.
이 동네에는 강씨 성을 가진 마음 착한 청년이 살았는데 하루는 그 아버지가 몹쓸 병에 걸려 몸져눕게 되었다.효성 또한 지극한 강 청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아버지를 간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차도는 없고 오히려 악화되어 이제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를 쾌유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겨울 수박이 좋다하자 눈 덮인 산속을 헤매기도 하고, 용의 비늘을 삶아 먹으면 낫는다 하여 저수지나 늪을 찾아다니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자정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아버지의 병환을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싸늘한 기운과 함께 소복한 여인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강 청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문이 막힌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한 많은 여인이 소원을 풀고자 찾아왔습니다. 저를 도와주시면 은혜로 당신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드리겠습니다.” 여인의 음성은 구슬을 구르듯 청아 했으며 이목구비가 반듯한 얼굴은 절세의 미인이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강 청년은 앉음세를 고치고 정중히 말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날이 밝아서 찾아올 일이지 깊은 밤에 이런 무례한 짓이 어디 있소.” 여인은 조금도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화급을 다투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이요. 어디 듣기나 해봅시다.” 강 청년은 의아스런 생각이 들어 조급히 물었다. 여인은 망설이는 듯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내일 아침이면 당신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십니다. 만약 제 소청을 들어주시면 낫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강 청년은 당황했다.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얘기를 듣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당장 내일 아침이란 말에는 더 이상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무슨 청이라도 들어 주고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청이옵니까? 설령 내 목숨을 앗아 간다 해도 아버님을 낫게 해 주신다면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매달리다시피 다그치는 강 청년의 말에 여인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전제하고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백 년 묵은 백사올시다. 때를 만나지 못하여 승천하지 못하고 산속을 헤매고 살았습니다. 이제 너무 늦어 마지막으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려면 10년 동안 사람과 동침을 해야 하거늘 마땅한 사람이 없어 기다리던 중 당신의 딱한 사정을 알고 이렇게 찾아 왔으니 나는 사람이 되어 좋고 당신은 아버지를 구할 수가 있으니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요. 내 소청을 들어줄 수 있겠소.” 강 청년은 기겁을 했다. 백사라는 말에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루도 무서운데 10년을 같이 살아야 한다니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를 죽게 하는 불효이기 때문이다. “몹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빨리 결정하셔야 합니다. 제 갈 길도 바쁘고, 당신 아버지 목숨도 화급을 다투고 있습니다.” 여인은 내뱉듯 한 마디하고는 조용히 일어서는 것이었다. 강 청년은 놓칠세라 벌떡 일어나 옷자락을 잡으며, “내 들어드리리다.” 하고 엉겁결에 약속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여인은 함박꽃처럼 밝게 웃으며 몇 번인가 고맙다는 인사를 치른 후 소매 끝에서 약 한 첩을 꺼내주었다. 그리고 시간을 지체 말고 곧장 달여 드리라고 말하며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강 청년은여인이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약을 달여 아버지에게 드렸다. 참으로 신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손발을 가누지 못하던 환자가 잠에서 깨어난 듯 기지개를 하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강 청년은 너무나 기뻐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쁜 마음도 잠시 뿐이었다. 이제 닥쳐올 백사와의 생활이 걱정이 되었다. 은혜를 입었으니 반듯이 갚기는 해야 할 터인데 날름거리는 혓바닥과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미물도 덕을 베푸는데 하물며 사람이 미물을 속일 수 있겠는가. 강 청년은 마음을 정리하고 조용히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닷새가 지나고 열흘이 되었다. 마침 보름달이 눈이 부시도록 밝게 떠있는 날이었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에 여인은 전번과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찾아온 것이다.
“이제 약속을 지키러 가야 되겠습니다.”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 청년은 일어섰다. 이미 결심한 일이라 망설일 것도 없었다. 여인이 안내하는 대로 그저 따라 나선 것이다. 마을을 벗어나고 어딘지도 모르는 산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래도록 걸어가다가 이윽고 어느 조그만 굴 앞에 멈추었다. “이곳이 우리가 살 곳입니다.” 여인은 나직하게 말하고는 먼저 앞으로 기어들어갔다. 강 청년도 따라 들어갔다. 이게 웬 일인가. 굴속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여인은 커다란 백사로 변하여 몸을 칭칭 감아오는 것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강 청년은 눈을 감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참았다. “이제 너는 어쩔 수 없다. 10년 동안 너와 살을 맞대고 살아야 내가 사람의 정기를 받을 수 있고 그 후 너의 피를 마시면 나는 사람이 되느니라.” 강 청년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고생이야 이미 각오한 사실이지만 피를 마신다고 하니 이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하고 백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여 죽을 날만 기다릴 뿐이다.
세월은 흘러 10년도 잠깐이었다. 바로 백사가 기다리던 그날 저녁이었다. 막 강 청년의 목덜미를 물고 사람으로 화신하려는 순간 갑자기 뇌성이 일고 근처 바위가 깨어지는 큰 이변이 일어났다. 아래 마을 사람들은 밤새 오들오들 떨다가 날이 밝아 소리 나는 쪽을 찾아가 보니 그곳에는 깨어진 바위 속에 아담한 석불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그 밑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눈을 껌뻑이며 지키고 있었다. 그 후 사람들은 근처 부처님들이 모여 백사를 응징하고 강 청년을 구하여 석불이 되게 했으며, 호랑이를 이 불상을 지키게 한 것이라 믿었다. 지금도 이 협곡을 부처님들이 모여 강 청년을 구했다고 하여 불집골이라 부른다.
출처 : 충효의고장 영천(사단법인박약회영천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