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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2)
고전13:4~7
2015년 11월 8일 장안중앙교회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설교:
어느 가정에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엄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잔소리를 합니다. “손 씻어라”“세수하라”“밥 먹어라”“옷 좀 제대로 입어라” 계속 잔소리를 하는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아들이 달라졌습니다. 아침에도 알아서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도 잘 먹고 머리도 깔끔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옷도 잘 입고 눈에는 생기가 돌고 입에서는 휘파람소리가 납니다. 무슨 일일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에게 사랑하는 여친이 생긴 것입니다. 사랑이 생기니까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말하기를 “사랑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창조의 예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사랑도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그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체험하고 느낀 사람이라면 더 놀라운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사랑이 갖고 있는 특성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지난주는 4절 한절만을 살펴보았습니다.
1) 사랑은 오래 참는다. 2)사랑은 온유하다. 3)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4)사랑은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는다고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고전13:5절을 중심으로 사랑이 어떤 특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5절을 다 같이 읽습니다.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아멘?
오늘 주신 말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특성이 있나요?
1.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無禮(무례)”라는 단어는 “예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 의미는 “공적인 상황에서 질서를 범함으로 그 사람의 태도의 아름다움이 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입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을 예를 들면, 국회에서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을 하는데 일부 국회의원들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아서 맞이합니다. 그리고 책상에 노트북에 항의 문구를 붙여서 시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무례”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저와 생각이 다른 분이 계신다면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최고 지도자요 대표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들이 좋든 싫든 국민이 뽑아 세운 지도자라면 생각과 입장이 달라도 합당한 예의를 표하는 것이 옳은 일일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니 그것이 “무례”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뭘 기대하겠습니까? 참 사랑은 무례를 행치 않아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질서가 깨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 이기심은 ‘사랑의 부재’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 사랑의 부재와 이기심 때문에 질서가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파당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서로에 대해 무례한 행동이 계속되고 혼란과 갈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겪었던 무례함을 성경에서 몇 가지로 살펴봅니다.
먼저는, 성찬식에서 무례가 있었습니다. 성찬식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며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묵상해야 하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 취하여 추태를 벌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전11:27~29절에 보면 바울이 그들의 무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둘째는, 여인들의 무례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들의 인권이 무시당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이런 제도와 사슬이 풀어졌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해방과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남편을 무시하고 예의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무질서와 무례를 지적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고 하기도 했고 당시의 문화에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던 예의가 있었는데 그것을 교회에서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예의를 지키란 말입니다.
또 하나, 은사 받은 사람들의 무례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 방언과 통변이 무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혼란해지고 서로 자기가 받은 은사가 더 좋은 은사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리고 큰 은사를 받은 자라고 생각한 사람이 교만해지는 문제로 혼란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전14장 39절에 말씀하기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한 것입니다.
이것이 禮儀(예의)이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빙자하여 무례를 저지르고 남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봅니다. 그러니 이 무례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죄악이며 자기를 망하게 하는 도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주변을 보세요. 건강하고 행복한 부부사이에서는 부부는 서로에 대해 예의를 지킵니다. 가정만이 아닙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목사와 성도사이에서도 서로가 예의를 갖추어야 은혜를 받고 복을 누립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도 가깝고 친하다고 서로에 대한 예의가 사라지면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업신여기고 무시하게 됩니다. 결국 서로에게 무례를 범하게 되어 상처를 받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그래나 참 사랑은 무례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멘?
2.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는 것이 다 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이기심을 극복하고 자기 욕심을 넘어서 이웃과 타인의 유익을 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나를 위해 주신 것이 아니고 어렵고 힘든 자들에게 나누고 베풀라고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네 것, 내 것의 소유개념을 “하나님의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은 私有財産制度(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부와 영광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내 것으로만 알고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청지기 의식이 없는 욕심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잠간 맡기신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베풀고 나누고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사랑이 실천되는 것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 문제로 시끄럽고 복잡했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기의 유익만을 구했습니다. 여러분! 은사는 본질적으로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하나님께 영광,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잘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자기들만의 유익을 구하는데 썼던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재산이든, 은사든, 많이 받았다는 것은 내 능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맡이 받았다는 것은 사명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기에 동시에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많다고 잘 베풀고, 없다고 못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 환자에게 말한 것을 아시지요?
행3:6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한마디로 사랑하면 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사랑하면 다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요3:16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아멘? 사랑하시니 독생자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 유익만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작가 빅톨 위고의 소설에 감동스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프랑스 혁명이후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이 숲속에서 굶주림에 지친 어머니와 작은 아이들 셋을 발견합니다. 군인 상사가 그들에게 빵 한 덩어리를 던져줍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그 빵을 세 조각으로 내서 자녀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이 모습을 본 병사 하나가 “저 여자는 배가 안 고픈가 봅니다” 말하자 상사가 대답합니다. “그게 아니야 어머니이기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어머님의 사랑이 본능의 이기심을 극복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극한 이기심이 극복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1)주님의 섬김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마20: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도 씻기신 것이고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2)주님 앞에서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된 훈련과 경험 속에서 결국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깨달을 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고백할 때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기심을 벗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일하라고 맡겨주신 것입니다.
돈도, 자식도, 건강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줄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성 낸다”는 단어의 헬라어는 <파록수노>인데 이것은 “자기의 분노를 절제치 못하여 폭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성냄은 타인의 불의나 마땅치 않는 대우와 행동에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분노가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분노도 있습니다. 주님도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를 향해 분노를 내셨습니다. 죄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있을진저” 하고 7번이나 저주를 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제된 분노입니다.
인간의 화냄과 분노는 절제가 되지 않는데서 폭발하여 사고를 냅니다.
얼마 전 아파트 층간 소음 때문에 칼부림이 나고 살인을 합니다. 부부가 싸우다가 가스통에 불을 지릅니다. 자식을 야단치다 물건을 집어던져 자식을 죽입니다.
전부 분노를 절제치 못하는 성냄이 만든 비극들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약1:20절을 보세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잠16:32절도 보세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아멘?
어떤 성도가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순간 화를 내지만 뒤끝은 없어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뒤끝이 없어도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상처를 치유 받으려면 오래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냄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1) 내 성냄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성내면 오히려 더 문제가 복잡해지고 일이 더 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결은 더 어렵습니다. 성내면서 소리를 높이면 힘 쎈 것 같고 상대가 기죽을 것 같으나 그러나 결국 후회합니다. 왜요? 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내다 망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니 내 성냄이 나를 망하게 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2)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 성냄의 대부분은 상대 입장을 이해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상대방 입장이 되어보면 다 이해가 됩니다. 운전하다보면 신호를 위반하고 갈 때가 있습니다. 차선도 위반하고 갈 때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청남대 단풍 구경 갔다가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내리다가 최 권사님이 손이 승합차 문을 닫는데 틈에 끼어 손등이 찢어지고 피가 철철 흐르는 사고가 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휴게소에서는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엠브란스’도 길이 막힌 상황이라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취소하고 전원 다시 차에 탑승하고 고속도로 노견으로 달렸습니다. 길이 꽉 막혀 비상등을 켜고 노견도로를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산에 서울병원에 도착해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때 다른 차가 우리 차를 보고 뭐라 했을까요? 다 욕을 했을 것입니다. “저런 놈들 때문에 우리나라 교통이 이 모양이야”
그런데 차안의 상황을 알면 안 그랬을 것입니다. 알 수 없으니 엄청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제가 운전 실력(?)을 발휘해서 무사히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주변에서 신호를 어겨가며 달려가는 차를 보면 이해하려 해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오죽하면 저러겠어” “뭔가 일이 있겠지”
그래서 易地思之(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 입장이 되어보면 다 이해되고 성냄을 해결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랑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용납할 수 있고 사랑하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들의 못마땅한 행동을 견디는 이유가 뭡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어지간한 것은 다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4.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전13:5절을 다시 보세요.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말은 남이 내게 입힌 피해나 상처를 기록하여 보관하고 두고두고 읽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를 잊어버리고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악한 것을 행하지 않는다”가 아니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은 물론이고 생각도 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복수를 안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행동으로는 복수를 못해도 생각으로 수없이 복수하고 한을 품고 두고 보자 합니다. “그놈 잘되나 어디 두고 보자 쫄딱 망해라” 또는 “다리라도 똑 부러져라” “독한 놈 만나 고대로 갚음당해라” 등등... 그러나 참 사랑은 그런 생각도 안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먼저는 그 사람이 언젠가는 내 편이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 부끄러워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데 내가 미워하고 대적하려 하면 하나님이 누구편이 될까 생각해 보세요. 더 나아가서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고 하나님이 그를 쓰시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에게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악한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아가페 사랑은 불쌍히 여김과 용서함에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사랑을 온전히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는 그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았나요? 우리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신 것은 저와 여러분이 좀 괜찮은 구석이 있어서 그러셨나요? 아닙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입니다. 그 말은 아무런 자격과 공로가 없었을 때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공로도 없었으나 우리 죄를 깨끗케 하셨고 흰 눈처럼 양털처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다시는 기억조차도 안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아멘?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악한 것을 생각지 말고 사랑으로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주님의 그 위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느껴지고 체험되고 믿어지면 우리도 그렇게 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라기는 두주에 걸쳐 살펴본 사랑의 특성 중에 그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잡고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