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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이것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전13:1~3
2015년 10월 25일 장안중앙교회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설교:
기독교를 한 단어로 표현하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사랑”이라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왜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어가 사랑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여기 믿음, 소망, 사랑은 기독교 신앙의 3대 신조(信條)를 한눈에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이 있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어야 흔들림이 없이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어야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마치 삼각형을 각 변과 같아서 그 중에 어느 하나가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하나만을 고른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없었다면 믿음도 소망도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믿음도 소망도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그 교회를 떠나자 그 지역의 타락한 문화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음행문제, 결혼문제, 법정 소송문제, 우상숭배 문제, 성령은사문제, 등등 여러 가지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문제 하나하나를 지적하면서 해결책을 말씀으로 지적해 주었습니다.
특별히 은사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어떤 은사가 더 나은 은사냐? 그리고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 그리고 은사를 남용함으로써 생긴 반목과 질시, 이런 것 때문에 교회가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랑’이 가장 큰 은사이며 사랑이 ‘가장 좋은 길’임을 제시합니다.
고전12:29~31절을 보세요.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가장 큰 은사” 사랑이다. “가장 좋은 길”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떠한 행위나 은사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전13장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가요?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 그것을 우리도 실천하야 하겠는데 과연 우리는 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주 동안은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우리 속에 그 사랑이 없다면 그 결과는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려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첫 시간으로 고전13:1~3절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만약에 사랑이 없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이 사랑이 없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1. 천사 같은 말을 해도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세요.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방언”이란, 사람이 쓰는 모든 말을 말합니다. 즉 사람들이 만들어낸 모든 언어, 어휘를 말합니다. 모든 단어의 개념과 정의, 의미를 말합니다. 인문학에서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분야의 전문 언어, 전문 개념을 다 일컫습니다.
이 모든 분야를 다 동원하여 총명한 이해력과 구사력을 가지고 있는 말을 한다 해도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모든 말은 시끄러운 소리,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전혀 감동스럽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녹슨 문에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천사의 말”이란, 지상에 없는 말로, 최고의 언어를 말합니다.
이 천사의 말은 지구상에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말입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설교가의 설교, 최고의 연설가의 연설, 최고의 글쟁이의 글 보다 더 나은 것이 천사의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의 모든 설교와 연설과 글은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소음이고 낭비고 공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어느 택시 운전수가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는 택시를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여 많은 손님들에게 복음을 전했답니다. 그 기사님은 택시를 운전하면서 늘 복음송과 찬송가를 틀어놓는 답니다. 그리고 손님이 그 차를 타면 그 찬송가를 듣고 반응을 보인답니다.
찬송가를 들으면서 좋아하는 손님은 대부분 기독교인이랍니다. 그런데 택시를 타자마자 꺼달라고 하는 손님도 있답니다. 그러면 비기독교인거나 반기독교 인이랍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목적지 도착할 때까지 복음을 전한답니다. 듣든지 말든지 전한답니다.
그런데 일부 손님은 “시끄러운 소리 집어치워요” 하고 강하게 반발한답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쓰잘데 없는 소리”로 들립니다.
왜죠? 그들은 천국이나 영생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복음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끄러운 소리인 것입니다. 똑같은 복음이 누구에게는 은혜로운데 누구에게는 쓸데없는 소리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달라집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 사랑이 담겨 있으면 무가치한 말이 價値(가치)있는 말이 됩니다. 우리 삶속에서 사랑이 느껴지면 우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의미가 있고 그래서 엄청난 가치를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사랑하면 표현이 부족해도 다 알아 듣습니다. 제 손자가 하는 말을 저는 못 알아듣겠습니다. 그런데 제 딸은 다 알아듣고 말합니다.
왜죠? 사랑으로 들으니 의미도 말고 가치도 있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설교가 귀에 안 들어오는 것은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목사의 사랑이 느껴지면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하고 꿀보다 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시 119: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찌될까요?
2. 설교의 능력과 영적 지식과 믿음도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세요.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무슨 말입니까? 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고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비밀과 지식을 갖고 있어도 그것은 무의미하고 무가치(無價値)한 것이란 말입니다. 또 우리에게 저 팔달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야말로 쓰잘 데 없는 것이 된단 말입니다.
여기“예언하는 능력”이란 뭔가요?
단순히 먼 미래를 알고 알아맞히는 능력인가요?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언’은 미래를 말해주는 점쟁이 능력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설교”입니다. 그러니 ‘설교’를 아무리 잘하고 감동을 준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쓸데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또 이런 능력으로 어떤 영적 비밀과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말짱 헛것이란 말입니다.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란 뭘 말할까요? 그것은 “최고의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이 좋아서 믿는 대로 척척 일이 이루어지고 형통한 사람일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우리 기독교의 복음은 십자가이고 그러기에 설교자의 설교의 핵심은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는 설교는 그야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최근 목회자들의 설교가 웰빙 설교로 전락하고 있다고 걱정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살고 어떻게 하면 복을 누리고 살까? 이것이 현대 교회의 강단의 주된 메시지입니다.
과거에 고난과 핍박이 많았을 때는 주님 재림에 대한 설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핍박을 견디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십자가 복음이 사라졌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설교에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변질되고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 기독교, 십자가 사랑이 사라진 기독교는 그야말로 쓰레기입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3. 헌신과 구제도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세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내 전 재산을 가지고 남을 돕고 내 몸까지 대신 내어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하고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구제(救濟)”란 뭡니까? “내 소유를 아끼지 않고 필요한자에게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비단 물질로만이 아니라 지적 재산과 시간을 조건과 대가없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타인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마6:4절을 보세요.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눅12:33절도 보세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이처럼 구제에 동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갚아주시고 하나님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세상에서도 차고 넘치게 해주신다 했습니다.
잠11:24절을 보세요.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구제하고 헌신한다 해도 그것이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서 한 것이라면 정말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이란 말입니다.
또 여기 “희생”이란, 남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최고의 헌신입니다.
남의 생명을 구하려다가 순직한 경찰관들처럼, 그리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순국한 선열처럼 그들의 헌신과 희생은 칭찬 받고 존경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의 생명을 내 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쓸데없는 일을 한 셈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하다가 순교한 선교사님들, 그리고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다가 병들어 죽은 선교사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그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처참한 나라, 그것도 신분제도가 엄격하고 남존여비가 분명하여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나라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땅에 왔다가 풍토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왜죠? 그들은 주님을 사랑했고 그리고 조선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저 합정동 선교사 묘지를 가보세요. <루비 캔드릭>이라는 여선교사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조선 땅에 와서 몇 달 만에 죽은 선교사이십니다. 왜 그래야 했죠?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을 받은 우리,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도 그 사랑을 받았으니 갚아야 합니다. 어떻게 갚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선교헌금을 하나요? 그저 작정했으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하나요? 그저 선교사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선교헌금 드리나요? 그저 불쌍하다 생각하고 드리지 마세요. 바라기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드리시길 바랍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다른 사람도 구원해 달라고 드리세요. 그러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랑은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까요?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한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은 그분의 사랑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시고 우리도 사람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시고 몸 된 교회도 사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은 하면서 그 사랑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랑이 있는 것일까요?
1)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냐를 점검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한다면 지금 내가 드리는 이 예배를 이렇게 드려도 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 내가 드리는 기도, 내가 드리는 헌금, 이렇게 드려도 되는지를 점검하세요. 왜 예배가 힘들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 있지 않나요? 왜 기도가 10분을 못 넘기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내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나요? 왜 헌금을 봉투에 담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죠? 혹시 체면 때문에, 억지로 드리고 있지는 않나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기에 문제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사랑의 크기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와 기쁨 그리고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과 체험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사랑이 식은 것은 그분 사랑에 대한 감동과 감격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면 짜증이 납니다.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힘이 듭니다. 부부사이도 그렇습니다. 사랑에 불이 붙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콩꺼풀이 쓰이면 힘든 것도 없고 뭐든지 다해 줄 것 같습니다. 끝까지 섬겨주고 사 주는 것이 즐겁습니다.
사랑의 수고는 전혀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랑이 식어갑니다. 전기도 찌릿찌릿 오던 것이 안 옵니다. 그리고 환상이 하나하나 깨어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때 정신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 획인하시고 성령의 뜨거운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3) 받은 은혜와 사랑을 헤아려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나 성도에게 사랑을 행하기가 어려운가요? 나는 드리기만 하고 받지를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내가 드리는 모든 것이 실상은 그분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왔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드린 것은 속히 잊어 버려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 이것도 했네, 저것도 했네 하면서 드린 것은 잘 기억하는데 주님께 받은바 순간순간 주시는 은혜는 몽땅 잊어버리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없거나 식었다고 생각하면 즉시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쓰레기로 여겨집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돈이 많아도 행복하지 못하고 인기가 많아도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에게서 행복이 쉽게 보입니다. 유명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사랑의 갈증은 그 무엇으로도 대치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 식구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사랑은 아름답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사랑이 있으므로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이 있으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을 정성으로 길러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보 복음성가 한 장 부릅시다. (사랑의 송가 /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1.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후렴) 하나님 말씀 전한다 해도 그 무슨 소용 있나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2.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무례와 사심 품지 않으며 모든 것 믿고 바라는 사랑 모든 것 덮어주네
3.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그 때는 주를 맞대고 보리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듯 우리도 주를 알리
기도합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주님이 우리위해 고난과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 구속의 은혜가 저에게도 목사님 에게도 충만 하시기 원합니다,
아~~~멘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