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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강릉 수호신(守護神) 이옥(李沃) 장군 이야기
1. 용둔야의 전설
1371년 개성 송악산 북쪽 기슭 용둔야(龍遁野)에서 고려 장정(壯丁)들이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
윤삼월 스무날이었다. 첨의부(僉議府) 군부사(軍簿司)에서 주관한 대회였다.
이 활쏘기 대회는 고려 최고의 명궁(名弓)을 선발하는 대회로 쇠락해진 군사력을 보강하고 용맹을 갖춘 인재를 뽑기 위해 공민왕의 특명에 의해 만들어진 대회였다. 최영(崔瑩), 황상(黃裳), 이성계(李成桂) 등도 앞선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전통 있는 대회였다.
최영은 1352년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고 호군(護軍)에 올랐고, 1358년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선 400여 척을 격파한 무장이었으며 황상은 원나라 순제(順帝)의 부름을 받아 시범을 보이기도 한 이름 있는 궁수였고, 이성계는 지금의 함경도 일대인 동북면에서 백두산을 넘어 만주벌판을 오가며 무예를 익힌 젊은 장수였다.
마침, 시합 날 공민왕이 광종의 능인 헌릉을 참배하고 대회에 참석했다.
공민왕은 원로대신 백문보와 좌시중 이춘부를 비롯한 조정 관료들을 대거 대동하고 활쏘기 시합에 참관했다.
시합 참가자들은 처음엔 편전(片箭)으로 시작해서 사순(四巡)으로 시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편전은 길이가 20~40㎝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화살이기 때문에 ‘아기살’이라고도 부른다. 편전은 단순히 활로만 쏘는 것이 아니라 ‘통아(筒兒)’라고 불리는 절반으로 쪼개진 가는 대나무 통을 추가로 이용해서 사격하는 것이 특징이다. 편전의 최대 장점은 일반 활의 두 배가 넘는 사거리와 빠른 속도 그리고 작은 크기 때문에 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편전은 여진족이나 왜구들이 특히 두려워한 무기였다.
중국에서는 일명 ‘고려전(高麗箭)’이라고 부를 만큼 편전은 우리만의 독특한 무기이자 활쏘기 방식이었다.
사순(四巡)은 다섯 발씩 네 번 쏘는데 모두 스무 발을 쏘는 방식이다.
참가자들은 야인(野人)들도 더러 있지만, 주로 낭장(郎將)과 별장(別將)들이 많았고 산
원(散員)들도 참가했다.
장정 30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예선과 결선을 줄 곳 우승한 시중 이춘부의 장남인 낭장 이옥(李沃)과 김용초(金用超)가 우승을 차지했다. 김용초는 판서 김수덕(金修德)의 아들로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곧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다.
이때의 장면을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가 축시로 지었는데 서거정이 엮은 동문선에
실려 있다.
임금은 푸른 막 걷고 한 번 돌아보시며 / 天顔一顧卷翠幕
대사례(활쏘기 대회) 베풀어 인재 등용을 명하시다 / 命開大射登俊賢
수레 앞 무사는 모두 젊은이들 / 駕前虎賁皆少年
활 당겨 화살 날리니 백보천양이었다 / 張弓發矢百步穿
그중에도 두 영웅 김용초와 이옥은 / 箇中兩雄金與李
뛰어난 정력 어찌 그리 펄펄한고 / 精力拔萃何翩翩
천구의 비룡마 옥 안장 끼워서 / 天廐飛龍障玉鞍
몰아내어 상으로 주고 받는 모습 반열에 빛이로다 / 輟賜拜受光班聯
수상이 사랑하는 바에 감격하여 / 冢相感激愛所鍾
멀리 바라보다 가까이 치사하니 눈물 샘 솟 듯하구나 / 遙望近謝淚如泉
백보천양(百步穿楊)은 초(楚)나라 양유기(養由基)가 활을 잘 쏘아 백 걸음 앞에서 버들잎을 겨누어서 뚫었다는 고사로 둘을 양유기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천구(天廐)란 중국 황제에게 진헌(進獻)하던 비룡말을 일컬음인데 비룡말에 아름다운 옥으로 꾸민 말안장을 얹어 상으로 내린 것이다.
이옥은 낭장(郎將)으로 있었는데, 이미 10여 년 전부터 부친을 따라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한 경력이 있었다. 부친 이춘부(李春富)가 동강도병마사(東江都兵馬使)로 있었던 1360년, 20대 초반의 나이로 왜군과 싸워 물리쳤다.
이듬해엔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성이 함락될 때도 최전방에서 홍건적을 방어하며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도록 게릴라 작전으로 치고 빠지며 활로 우두머리들을 쏘아 맞춰 그들의 진군을 막았다.
왜구는 이 시기 남해는 물론 개성과 가까운 황해도 지역까지 침탈하여 백성들을 괴롭
혔다.
1371년 3월에는 왜적이 해주(海州)를 침구(侵寇)해 관아에 불을 지른 후 목사(牧使)의 처와 딸을 사로잡아 갔다
이렇게 북쪽으로는 홍건적이 쳐들어오고 왜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 국토를 유린했다.
이옥의 부친은 당시 최상급의 관료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춘부(李春富)였다.
이옥은 이 대회에서 안마를 하사받고 정6품 낭장에서 정4품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두 단계를 승진했다. 고려에서는 사마시와 문과 시험은 있었지만, 무과는 없고 무술대회에서 우승하거나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벼슬이 내려지고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풍습이 있었다.
2. 가문의 몰락
이 무렵 공민왕 다음으로 권력자는 신돈이였다.
신돈이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를 하사받고 왕의 사부(師傅)로서 국정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 1365년(공민왕 14년)이었다. 그동안 왕을 대신해 많은 개혁정치를 펼쳤고 특히 근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에게 빼앗긴 토지 등을 원주인인 백성들에게 돌려주자 그 반응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하층 백성들은 신돈을 ‘성인(聖人)이 출현하였다’고 칭송하였다. 하지만, 지배계급들은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수백 년의 세월을 두고 대대손손 세도가들의 압정 밑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그늘진 삶의 역사만 겪어온 서민 대중에게 신돈은 그야말로 성인과 다름없는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반면에 권력을 하루아침에 천민 출신의 이름 없는 중에 의하여 빼앗기고 소유하고 있던 토지마저 농민과 천민에게 강압적으로 내주게 된 지배계급은 신돈에게 무서운 반감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똘똘 뭉쳐 신돈에 대한 비난과 공격의 화살을 그치지 않고 퍼붓기 시작하였다. 신돈과 그들 사이에는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결국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에게 신돈이 더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지켜본 왕은 기득권세력의 반감을 이용하여 급기야 신돈을 제거할 마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미 그 조짐은 1371년 3월부터 움트기 시작했다.
왕이 모후에 대해 혼정신성(昏定晨省) 즉,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는 일을 오랫동안 하지 않다가 대비가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문병을 했다. 이 무렵 대비는 신돈에게 반감이 많았을 때였다.
또한 고려사 ‘신돈 열전’에는 「신돈(辛旽)의 청지기[傔人]가 천판(穿坂)에서 신돈을 위하여 연회를 열자 시중(侍中) 이하의 시관(時官)과 산관(散官) 등 각 품관들이 모두 참여하여 무릇 200여 명에 달하였다.」라고 하며 「왕이 신돈의 당여(黨與, 朋黨)가 조정에 가득한 것을 알고 불안해 하다」라고 기록했다.
이미 왕의 마음이 신돈을 떠난 것이다.
같은 해 4월에는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길창군(吉昌君) 권적(權適)이 신돈에게 큰 연회를 베풀면서 화산대(火山臺)를 설치한 일도 있었다.
결국 선부의랑(選部議郎) 이인(李韌)을 시켜 역모를 꾸몄다고 익명으로 글을 쓰게 하여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던져놓고 급히 도망하게 하였는데 김속명이 이것을 왕에게 고하여 순위부(巡衛府)에 명령하여 신돈의 측근들을 잡아들였다.
이에 좌시중(左侍中) 이춘부(李春富),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김란(金蘭), 동지밀
직(同知密直) 홍영통(洪永通), 승지(承旨) 김진(金縝) 등이 “신들은 신돈(辛旽)과 함께 일을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신돈이 유배되었는데 신들만 유독 면죄되었으니, 국론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죄를 청했다. 왕이 말하기를, “우선 돌아가서 일을 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결국 신돈과 대호군(大護軍) 이백수(李伯修)를 처형하고 성여완(成汝完), 조사겸(趙思
謙), 유준(柳濬)을 유배 보냈다. 그러나 이춘부 등은 예외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어 말하기를, “이춘부(李春富), 김란(金蘭), 홍영통(洪永通)은 모두 신돈에게 아부하였으니, 청하건대 그들을 처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관직을 파면시키되 문죄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이춘부는 이인임, 이색 등과 함께 당시 권문세족에 속했지만,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는 의지가 강한 인물들로 공민왕의 배려로 신돈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도록 명했을 뿐 신돈에게 아부한 앞잡이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헌부 등에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왕도 할 수 없이 이춘부(李春富), 김란(金蘭), 이운목(李云牧) 등을 처형하고 그 자식들을 도류안(徒流案)에 적어 넣고 각지로 편배하도록 했다.
병부시랑 이옥은 채 발령도 나기 전에 강릉부 관노로 편배(編配) 되었다.
나머지 아들들인 빈(贇), 예(裔), 한(澣), 징(澂)도 모두 각지 관노로 보내졌고, 막내 외동딸은 어려 공암소국부인(孔巖小國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와 함께 이색의 가문으로 안치(安置)됐다.(훗날 외동딸은 이색의 둘째 아들 이종학에게 출가함)
집안의 장손이 강궁(强弓)으로 이름을 날렸고 병부시랑으로 막 꿈을 펼 즈음 하루아침에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난 것이다.
이때 시중을 역임한 유탁(柳濯)도 신돈의 무리라 하며 처형됐고, 이춘부의 동생들인 승선(承宣) 이광부(李光富),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 이원부(李元富)도 외지로 유배 보냈다.
3. 왜구를 물리치고 강릉을 지키다.
이옥은 강릉도호부 관노(官奴)로 예속되었다.
강릉지역은 문관인 안종원과 김구용이 부사와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왜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3월에 개성 인근인 해주에 왜구가 쳐들어와 백성들을 죽이고 목사(牧使)의 처와 딸을 사로잡아 갈 만큼 대범해졌고, 조정에선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에 속수무책일 만큼 군사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군사력을 원나라에 의존하던 고려는 그나마 전술과 무술이 뛰어난 일부 장수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방어할 뿐이였다.
일본의 무로마치(室町)막부 시기 왜구는 막부의 내부 혼란이라는 간노죠란(觀應擾亂)의 영향으로 규슈의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면서 고려에 갑자기 증가하는 왜구로서, 『고려사』에서는 ‘경인년(1350) 이후 왜구’로 소개되어 있다.
이 무로마치기(足利 가문이 집권한 막부) 왜구는 수백 척의 선박과 수천 명의 구성원으로 대규모화되었고 약탈 지역도 이전의 경상도와 전라도 연안을 벗어나 양광도와 고려 도성 근처의 교동과 강화도에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규슈에 내려온 규슈탐제(九州探題) 이마가와 사다요에 의한 남조와의 격렬한 전투로 정권에 큰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에, 왜구의 침탈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는 간노죠란과 규슈에서의 남조 공략에서 큰 공을 세운 지략가였고, 여기에서 밀린 쇼니 후유스케(少弐 冬資) 등이 눈을 돌린 곳이 고려의 동쪽 영토 즉, 강릉부를 중심으로 남쪽의 영덕과 덕원현 그리고 북쪽으로 원산 일대였다. 이 지역만 점령하면 고려 조정에선 지원할 여력이 없고 점령 이후 군사력만 보강하면 영원히 지배할 자신도 있었다.
결국 이옥이 강릉부 관노로 유배된 지 1년 후 강릉부에 대규모 왜구가 쳐들어왔다. 처음엔 남쪽 방향의 영덕과 덕원(영해) 일대를 공략하여 점령하고 주력부대를 강릉부로 이동하여 영동지역 전체를 차지할 계획이였다.
강릉부사와 안렴사는 다급해졌다. 이미 우리 군사들은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도망가기 바빴다.
결국 평소 이옥의 활 솜씨와 전투 경험을 잘 아는 안렴사 등이 이옥에게 부탁했다. 불과 1년 전, 하루아침에 가문이 쑥대밭이 된 이옥은 선뜻 내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이 수기(手旗)와 병졸을 넘겨받아 다수의 편전(片箭)을 준비해 남대천 주변 숲속에 숨겨 놓고 왜구를 유인했다.
일단 체력이 약한 어린이와 여인들 그리고 늙은 백성들은 보현산 대궁산성(大弓山城)으로 피난시키고 해안가 죽도봉과 도호부 인근 월대산에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하고 남대천으로 적을 유인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편전을 감추어 둔 곳에서 왜구의 우두머리들을 향해 백발백중 활을 쏘아 쓰러트렸다.
‘고려사절요’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왜구가 강릉부(江陵府) 및 영덕현(盈德縣)과 덕원현(德原縣)의 지역을 노략질하였다.
이때 이춘부(李春富)의 아들 이옥(李沃)이 몰입되어 동계(東界)의 관노(官奴)가 되었는데, 왜구가 이르자 우리 군사가 소문만 듣고도 도망가서 무너졌기에 부사(府使)와 안렴사(按廉使)가 이옥이 용맹하고 날래다는 사실을 알고 군사를 주어서 그들을 공격하게 하니, 이옥이 힘써 싸워서 그를 물리쳤다. 왕이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그의 역을 면제해주었다.”
그리고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는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옥은 시중(侍中) 이춘부(李春富)의 아들이다. 시중이 주살(誅殺) 당하자 이옥은 강릉부의 병졸로 편입되었다. 이 무렵에 왜구가 동해에 몰려와서 주군(州郡)을 약탈하니 백성들이 모두 다투어 피하였다. 府의 앞뜰에 큰 나무가 많았는데 이옥이 밤사이에 군사를 시켜 화살 수백개를 나무에 꽂아 놓았다.
이튿날 상복을 벗고 말을 달려 해구로 나가 몇 개의 화살을 적에게 쏘고는 거짓 패한 체하면서 나무 사이로 달려 들어가니 왜적이 구름과 같이 몰려왔다. 혼자서 당해내는데 꽃혔던 화살을 뽑아 쏘며 종횡으로 달리며 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전하기를 마지않았으나 시위를 헛되게 당기지 아니하여 쏘기만 하면 반드시 맞으니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 이로부터 왜적이 군의 지경을 범하지 못하여 한 道가 그의 힘으로 편안하니 조정에서 임금이 가상히 여겨 벼슬을 내렸다”
전투가 끝난 후 안렴사는 왕에게 보고했고, 왕은 이옥에게 또다시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관직을 복귀시켜 주었다.(훗날 김구용의 차남 김명리와 이옥의 3남 이사검은 사돈 관계를 맺는다)
강릉전투가 끝난 2년 뒤(1374년) 공민왕은 대언(代言) 김경흥(金慶興)이 총괄하는 자제위(子弟衛) 청년들에게 암살당하고 우왕이 왕위에 올랐다. 우왕은 이옥을 내사문하성에 속한 정3품 낭사(郎舍) 벼슬인 좌상시(左常侍)로 임명하고, 얼마 뒤 강릉도절제사(江陵道節制使)로 보내 동해안을 수호하도록 했으며, 조선 개국 후 개국 원종공신으로 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로 국정 운영에 참여하다가 태종 때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와 오늘날 서울특별시장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와 검교(檢校)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의 직책을 끝으로 1409년 졸(卒)했다.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제 2부. 고려 말의 정세
1. 고려는 어떤 나라였나?
고려국(高麗國)은 크게 전반기(前半期)와 후반기(後半期)로 나누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광종의 왕권안정을 위한 과감한 숙청과 개혁정책에 이어 제6대 성종의 유학 진흥과 교육개혁을 통한 중앙집권화, 그리고 제11대 문종의 태평성대와 제14대 숙종의 철권 통치를 정점으로 점차 안락(安樂)에 빠져 18대 의종 대에 이르러서는 숭문천무(崇文賤武) 양상이 심해져 결국 상장군 정중부 등에 의해 무신란(武臣亂)이 발발해 왕권을 잃고 만다.
19대 명종, 20대 신종, 21대 희종, 22대 강종은 무신란을 평정한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거나 왕위에 오른 허수아비 왕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23대 고종이 왕위에 오를 무렵엔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하며 28년간을 항쟁하기도 했고, 24대 원종은 친몽정책을 펴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임연(林衍)과 갈등을 빚기도 했으며 결국 개경 환도 후 무신정권의 전위(前衛)로서 다분히 사병적(私兵的) 요소가 짙었던 삼별초(三別抄)가 고려 군대와 합세한 몽골군과 싸우는 웃지 못할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몽골의 유목 부족을 통일하고, 중국과 중앙아시아, 동유럽 일대를 정복하여 인류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몽골 제국의 기초를 쌓았던 칭기즈 칸(鐵木眞, 1162년 ~ 1227년)의 대제국은 손자인 쿠빌라이(忽必烈)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며 결국 중국 송(宋)나라까지 멸망시키며 원(元)나라를 세운다.
고려의 삼별초 군대는 려원연합군(麗元聯合軍)과 진도 용장리를 거점으로 삼아 끝까지 항쟁에 나섰으나 결국 1273년 제주에서 패하고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삼별초의 일부 무장들은 그 후 오키나와(流球國)로 피신했다는 설만 전하고 있다.
원종이 원나라에 항복함에 따라 제25대 충렬왕 부터는 元의 부마국으로 전락하며 앞에 충(忠)이란 글자가 붙는 수모를 겪는다. 이때부터 왕은 원나라 황족의 사위인 동시에 외손자이기도 한 혼혈인이 집권한 시기였다. 6代에 걸친 忠자 돌림의 왕에 종지부를 찍은 임금이 바로 제31대 공민왕인데 이때는 이미 원(元)나라도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중원 땅엔 새로운 왕국인 명(明)나라가 태동하는 격변기였다.
형과 어린 조카들이 왕위에 오르며 원나라에 불려갔던 강릉대군(공민왕)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고려왕국을 다시 부흥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강력한 개혁정치를 구상하게 된다.
2. 제31대 공민왕의 개혁정책 실험과 실패
어린 조카들의 뒤를 이어 22세에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우선 원나라 순제(順帝)의 비(妃)인 기황후(奇皇后)의 오라버니 기철(奇轍)과 그를 따르는 부원세력(附元勢力)을 몰아내고 고려가 자주국가임을 선포한다. 즉, 元 순제의 연호인 지정(至正)을 쓰지 않기로 하고 선왕에게 올리는 시호와 국가의 제사 의식을 원래대로 회복한다고 공포한 것이다(1356년 공민왕 5)
이때 내린 교명 가운데 내정에 관련된 사항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서 인사권을 행사하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둘째, 권문세가들이 자행한 토지 점탈의 비리를 척결하였다.
셋째, 조세 부정과 불법을 제거하는 조치를 내렸다.
넷째, 낭비 등 일반적인 비리를 없애고 누에치기와 삼 재배를 장려하였다.
다섯째, 군사제도를 개선하였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 부원세력들의 끈질긴 저항, 측근인 조일신과 김용의 난(亂) 등을 겪으며 개혁드라이브 정책에 제동이 걸린 공민왕은 사랑하는 노국공주까지 잃게 되자 한 때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승려 「신돈」인 것이다. 고려사 신돈열전(辛旽列傳)과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공민왕 편에 보면
세신대족(世臣大族)은 일가친척이 뿌리를 뻗어 서로 가리고 덮어주고 초야의 신진(新進)은 실상을 속이고 행실을 꾸며서 명망을 취하여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현관(顯官)이 되면 대족과 혼인하여 그 처음의 뜻을 깡그리 버리고 유생(儒生)은 나약하여 굳셈이 적고 게다가 문생(門生)이니 좌주(座主)니 동년(同年)이니 하면서 서로 부르며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사사로운 정리에 따른다. 이 세 부류(部類)를 모두 쓸 만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세상을 떠나 우뚝 서 있는 사람을 얻어 인습으로 굳어진 폐단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즈음 신돈을 보고 나서 그는 도(道)를 얻어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한 출신인데다 일가친척이 없으므로 일을 맡기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눈치를 살피거나 거리낄 것이 없으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신돈에게 중책을 맡기려 했는데 신돈은 덥석 공민왕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뒷날을 위해 다짐을 받는다.
“일찍이 듣건대 임금께서는 참소하고 이간하는 말을 많이 믿는다 하니 삼가서 이와 같이 하지 말아야 세간(世間)을 복되게 하고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공민왕은 손수 맹세의 말을 썼다.
“스승은 나를 구(救)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여 사생을 두고 맹세하오. 이것으로 남의 말에 미혹(迷惑)됨이 없을 것을 부처님과 하늘에 증명하오.” 하였다.
이로서 공민왕은 신돈에게 무려 51자나 되는 어마어마한 직책과 함께 전권(全卷)을 맡기면서 그 후원자(後援者)로 비록 권문세가라 할 수 있지만 나라를 구할 의지와 곧은 성품의 소유자인 이춘부와 이색, 홍영통 등을 주요 직책에 임명했다.
이춘부는 이미 공민왕이 즉위하기 이전, 정3품 벼슬인 지신사, 우대언, 밀직부사 등을 역임했기 때문에 충숙왕 때부터 인정받은 문무를 겸비한 관료였고, 공민왕 7년 서강병마사로서 왜구를 격퇴한 바 있으며 공민왕 9년에는 동강도병마사를 거쳐 그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했을 때 전라도도순검겸병마사로 모병을 잘하고 적을 물리쳐 수성보절 일등공신에 책록된 문무(文武) 겸비한 나라의 큰 일꾼이었다. 그리고 이색(李穡)은 공민왕의 개혁 의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고 원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한 보기 드믄 유학자로 역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곧은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신돈에게 가해질 유학자들의 압력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즉, 권문세가이지만 위 세 부류에 속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들로 신돈을 후원하게 하고 신돈을 앞세워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본래 주인인 양민들에게 돌려주는 등 강력한 개혁드라이브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약 7년간 강력하고도 다각적인 개혁정책을 펼친 신돈 정권은 그러나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충숙왕의 妃-공원왕후 홍씨)와 그의 인척인 김원명, 김속명 형제 그리고 기득권을 잃은 보수 친원파 권문세족들의 집단적 반발과 공민왕의 개혁 의지 상실과 겹쳐 결국 역모죄로 몰아 수원으로 유배시켜 목숨을 빼앗았다.
그리고 한때 공민왕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얻었었고 신돈의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후원했던 이춘부 등도 마침내 제거하기에 이른다.
올곧은 관료들을 대거 제거한 공민왕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고 과거 元나라에 있을 때 본 라마교를 흉내 내며 변태적인 행동까지 서슴없이 하였다. 젊고 여자처럼 생긴 귀족 아들들을(子弟衛) 뽑아 곁에 두고 왕비를 강간하게 하는 등 변태적인 행동을 일삼다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만일 신돈의 개혁정책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더 강력하게 밀어부쳤거나 권문세족 가운데 신망이 두터웠던 이춘부 등을 신돈과 함께 제거하지 않고 계속 중용했다면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을 것이고 고려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자주적(自主的)이고 남녀 차별 없이 자유(自由)가 많이 보장되었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왕국도 신돈과 이춘부 등을 앞세운 공민왕의 마지막 개혁정책의 실패로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된다.
고려는 당시 국방을 원나라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정규군의 수와 군사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당시 동아시아는 정세가 매우 불안한 혼란기였다. 중국은 홍건적의 세력을 잠재운 명(明)나라가 새로 태동했으며 일본은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가 무너지고 아시카가(足利)가 남북조시대를 열자 중앙 집권이 약해지고 각 지역마다 군웅할거(群雄割拠)하는 시기였다. 전술했다시피 이 시기 왜구는 고려의 영토는 물론 중국 해안까지 침략하는 극성기였다. 그리고 그 규모도 적게는 수십척에서 많게는 수배척에 이르기까지 정규군을 압도하는 수준이였다.
이러한 격동기에 수도 개경과 멀리 떨어진 동해안을 대규모 왜구로부터 수호했다는 것은 정세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였음을 알 수 있다. 1372년 이옥의 강릉대첩은 사건 후 128년이 지난 1500년대,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상세히 기록할 만큼 조선 전기(前期) 내내 인구(人口)에 膾炙(회자)된 큰 사건이었다.
이옥 장군 연보(年譜)
1336년 ~ 1409년
여말선초(麗末鮮初) 무신. 고려에서 강릉도절제사, 조선에서 판한성부사 역임. 1372년 6월 강릉부 관노의 입장에서 동해에 침입한 대규모 왜구를 격퇴하여 신원이 회복되고 왕으로부터 안마(鞍馬)를 하사받음.
1360년 동강도병마사(東江都兵馬使)였던 부친 이춘부(李春富)를 도와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낭장(郎將)이 됨
1371년 공민왕 20년(辛亥) 윤3월 20일
용둔야(龍循野)에서 활을 잘 쏘아 왕으로부터 안마(鞍馬)를 하사받음
이옥을 정4품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임명
1372년(공민왕 21년) 6월 부친이신 시중 이춘부가 억울하게 역적의 누명을 쓰고 변을 당한 후 삼촌인 원부, 광부도 신돈의 도당으로 몰아 외지로 귀양보냈으며 이옥을 비롯한 빈, 예, 한, 징 등 형제들도 모두 관노로 편입되어 각 주군에 예속되었다.
그중 옥은 강릉에 예속되었었는데 왜적이 동계를 침략하여 아군이 바람소리만
듣고도 도망쳤다. 평소에 옥의 용맹을 알고 있던 안렴사가 그에게 병정을 주어 왜적을 치게 하였다. 이옥이 힘써 싸워 왜적을 격퇴하여 강릉 일대는 그 덕으로 전재를 면하였다. 왕이 듣고 이옥에게 말과 안장을 주고 그의 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 후 신우(禑王)가 이춘부의 告身[職帖]을 돌려주었다.
1387년(우왕 13년) 丁卯 6월
좌상시(左常侍)로 우왕을 따라 활을 쏘았다.
1388년 강릉도절제사(江陵道節制使)
1390년(공양왕 2년) 庚午
강릉도절제사 때 이성계를 살해하려는 모의에 내응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그간의 공로와 이성계와의 친분 등을 고려 무혐의로 처리됨(이성계는 이때 이미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실권을 쥔 상태)
1392년(太祖 元年) 10월 9일
前강릉도절제사로 下 원종공신(原從功臣) 책훈
1393년(太祖 2년) 8월 10일
원종공신 이옥(李沃)이라 칭함,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역임
1405년(太宗 5년) 7월 1일
부유후조전절제사(副留後助戰節制使) 중추원사(中樞院事)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임명
1409년(太宗 9년) 검교참찬 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개성유휴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임명
1409년(太宗 9년) 9월 4일 돌아(卒)가시니 조정에서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정절(靖節)이란 시호를 내림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봉안(奉安)되고 표절사(表節詞)에 배향(配享)되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남양홍씨(찬성사 당산군 홍상재의 따님)
2001년 4월 1일, 공의 묘가 실묘된지 592년 만에 양천허씨 대종회(외가)의 도움으로 찾음 실묘(實墓) 확인(경기도 연천군 旺徵面 江西里 軍營梧里 마을
2002년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3남 사검의 위로 천묘함. 정절공종회 결성
헌시(獻詩)
李 胤 在
동해여!
동해 바다여!
그대는 기억하는가?
육백오십여 년 전, 그날의 참혹(慘酷)한 그 장면을
푸르딩딩한 악당(惡黨)들이 강릉 앞바다에 새까맣게 몰려와
이 땅의 여린 백성들을 무참히 짓밞던 그 슬픈 역사를…
젊은 병사들은 다리 힘이 좋아 대궁산(大弓山)으로 피했지만
늙은 백성과 아녀자들은 악당들의 창칼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연좌(連坐)에 엮인 관노 하나가 활을 꺼내 들었는데
왕도 인정하는 고려 으뜸의 강궁(强弓)이라 명궁(名弓)으로 불렸다.
안렴사와 부사는 수기(手旗)와 병졸을 명궁에게 맡겼다.
명궁은 괘방산에 올라 강릉 앞바다에 몰려온 악당들의 진세를 보고
죽도봉과 월대산에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하고
남대천으로 적을 유인했다.
곳곳에 활을 꽂아두고 패하는 척 물러나며 적을 향해 백발백중
아침부터 저녁까지 활을 쏘아 적들을 섬멸하니
드디어 악당들은 백(魄)은 남겨두고 혼(魂)만 도망가 제 땅으로 돌아갔다.
이름하여 ‘이옥의 강릉대첩’이라~
명궁은 그 후 강릉도절제사로 강릉을 지켰고, 오늘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