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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전씨 경주산내 화수회
 
 
 
 
 
카페 게시글
정선전씨 뿌리알기 주요 인물 스크랩 고려 삼별초 의병장 전공열 이야기
[포항]全용수[洙杓] 추천 0 조회 25 09.07.18 13: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7. 공열(公烈)

    고려시대 삼별초의 의병장으로  공을 세웠습니다.

   후에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전라도도병마사(全羅道都兵馬使)를  역임하였습니다

  제3차 침입때 몽고병이 남하하여 전주와 고부지경까지 범한 일이 있었으며, 부령별초  의병장인  전공열이 거느린 지방 의용군이 부여 고란사 근처에 잠복했다가 몽고 기병 20인을 추격하여, 그 중 2명을 사살하고 병기와 군마 20여필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

고려사 고종편을 올립니다. 

제23대 고종( 高宗,1213~1259)

정미에 몽병 100여인이 온수(온양)군으로부터 남하하여 차현현(공주)으로 향하였다. 무신에 몽병이 남경(지금의서울)평택 아주(아산) 하양창등지에 분둔하였다. 기유에 야별초지유 이림수 박인걸이 각각 100여인을 거느리고 손을 나누어 몽병의 둔소로 향하였다. 9월 정사에 몽병이 온수군(온양)을 포위하니 군리인 현려 등이 성문을 열고 출전하여 이를 대파하고 이급을 참수하니 시석에 맞아죽은 자가 200여명이며 노획한 병기도 심히 많았으므로 왕은 그 군의 성황신의 밀우한 공이 있다하여 신호를 가봉하고 (현)려로 써 군호장을 삼았다. 임수에 몽병이 죽주(죽산)에 이르러 투복하라고 타이르거늘 방호별감 송문위가 력전하여 이를 패주시켰다. 임신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갑오에 전라도 지휘사 상장군 전보귀가 보하기를 「몽병이 전주 고읍의 경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무수에 소재도장을 내전에서 설하였다.

  계축에 부영(부안)별초 의업거인(醫業擧人) 87) 전공열이 고란사(부여)의 산로에 복병하였다가 몽병 20여기를 요격하여 2인을 죽이고 병기 및 마 20여필을 취하거늘 전공열에게 상을 주고 본업으로 입사할 것을 청허하였다.

87). 거인(擧人)=향시에 합격하여 회시에 응하는 사람인 바 거자라고도 함.

참고로  몽고의 고려침입을 정리해 봅니다.

원인: 몽고는 고려와 협약을 맺고 고려는 매년 많은 폐물을 몽고에 주기로 하였다. 그 뒤 고종 12년 정월 몽고 사신 제고여(諸古與)가 압록강을 건너 귀국도중 도적에게 피살되니 몽고는 고려인의 소행으로 오인하여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고 여러 차례 침략을 받게 되었다.

제1차 침입(고종 18년 8월 ~ 고종 19년 1월)

   몽장 철례탑 몽군철수 후 강화환도

제2차 침입(고종 19년 8월)

    몽군 철례탑 전사

제3차 침입(고종 22년)

    몽장 당올태 전주 경주 침입

    경주 황룡사 목조구층탑 소실

제4차 침입(고종 34년 ~ 35년)

    몽장 아모간 정종몰 후 철수

제5차 침입(고종 39년)

      몽장 야고(야굴)

제6차 침입(고종 42년 ~ 46년)

      몽장 찰날아대(차라대) 몽고 침입이래 이 전화가 가장 격심함

도병마사 [都兵馬使

   고려시대의 국방회의기구(國防會議機構). 국가의 군기(軍機) 및 국방상 중요한 일을 의정(議政)하던 합의기관(合議機關)이다. 도병마사가 설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며 1011년(현종 2)에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를 임명한 기록이 처음 나오므로 현종 초에는 도병마사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도병마사는 989년(성종 8)에 설치된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의 판사제(判事制)에서 기원한다. 동서북면에 병마사(兵馬使) ·지병마사(知兵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녹사(錄事)를 파견하여 방위임무를 맡게 하고, 중앙에서는 이를 통령(統領)하기 위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서령(中書令) ·상서령(尙書令) 을 판사(判事)로 삼았다. 그러나 문종 관제에 따른 도병마사의 관원 구성은 병마판사제와 차이가 있다.

문종 때에는 최고 정무기관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5재()가 판사(判事)를 겸하고, 6추밀 및 직사 3품 이상이 사(使)로 임명되었다. 이밖에 정4품 이상 경·감·시랑이 임명된 부사와 소경 이하가 임명된 판관이 있었다. 판관(判官) 이상의 관원들이 중대한 일이 있을 때 회동하여 국방문제를 결정하였다.

도병마사는 양계의 장졸(將卒)에 대한 상벌, 군사훈련, 국경문제 등 국방·군사관계의 일을 관장하였다. 또, 민생문제에도 관여하였는데, 처음에는 양계 주민들의 생활 안정에 대해 논의하다 점차 그 범위가 넓어져 전국 백성들의 구휼 방법까지 논의하였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란(武臣亂) 이후 기능이 마비되었다가 고종(高宗) 이후 몽골과의 투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기능이 재개되었는데, 기능면에서도 많은 변질을 가져와 국방문제뿐 아니라 국가의 모든 중대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1279년(충렬왕 5) 원()나라의 압력으로 관제가 개편됨에 따라 도병마사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편되어 모든 국사를 합의 ·시행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 상설되어 조선 개국 초까지 존속하다가 1400년(정종 2) 의정부(議政府)로 개편되었다. 

♤금오위 [金吾衛]  

   고려시대의 군제(軍制)인 6위(六衛)의 하나로 도성 치안경찰 임무를 맡았다.

금오위라는 명칭은 당나라 중앙군제에서 차용하였다. 왕도(王都) 내외의 요소를 순찰·점검하는 치안경찰의 임무를 맡았으며, 정용군 6령(:1령은 1,000명)과 역령(役領) 1령으로 구성되었다. 상장군(上將軍:정3품)·대장군(大將軍:종3품) 각 1명, 장군(정4품) 7명, 중랑장(中郞將) 14명, 낭장(郞將)·별장(別將)·산원(散員) 각 35명, 위() 140명, 대정(隊正) 280명의 장교가 배치되었다.

그뒤 충선왕 때 명칭을 비순위(備巡衛)로 바꾸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금오위로,1362년에는 또다시 비순위로 고쳤으나, 1369년 또 금오위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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