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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關聯 高僧) - 만공 월면(滿空 月面 : 1871~1946) 스님 | | | 7본사 - 예산 수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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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4 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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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가(評價)
경허 성우(鏡虛 惺牛 : 1849~1912) 대선사(大禪師)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선지식(善知識) 중(中) 수제자(首弟子)로서 경허(鏡虛)가 선맥(禪脈)의 기운(氣運)이 스러져 적막(寂寞)하기만 하던 한국 불교 선종(韓國 佛敎 禪宗)의 중흥조(中興祖)라고 한다면 그 법(法)을 올곧게 전수(傳受)해 선종(禪宗)의 골격(骨格)을 형성(形成)한 인물(人物)로 평가(評價)받고 있는 만공(滿空)은 주(主)로 예산(禮山) 수덕사(修德寺)에 주석(住錫)하며 경허 선풍(鏡虛 禪風)을 전국(全國)에 펼쳐 나갔기에 ‘중천(中天)의 보름달’로 평가(評價)받고 있음
2. 생애(生涯)
1) 경허 성우(鏡虛 惺牛) 대선사(大禪師)와의 만남
법호(法號)는 ‘만공(滿空)’이요 법명(法名)은 ‘월면(月面)’이요, 속명(俗名)이 ‘바우’였던 만공(滿空) 스님은 전북(全北) 정읍(井邑)에서 태어나 13세(歲)에 어머니와 금산사(金山寺)에 다녀온 후(後) 미륵불(彌勒佛)이 업어주는 꿈을 꾸고 식구(食口)들 몰래 출가(出家)의 꿈을 키우다가, 14세(歲)에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로 출가(出家)해 진암(眞巖) 스님 밑에서 행자 생활(行者 生活)을 하던 중(中), 그곳에 다니러 온 경허 대선사(鏡虛 大禪師)를 운명적(運命的)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서산(瑞山) 천장암(天藏庵)으로 경허(鏡虛)를 따라가라는 스승의 말에 처음엔 거절(拒絶)했지만 경허(鏡虛)의 법문(法文)을 듣고 난 후(後) 그 자리에서 마음을 바꿔 제자(弟子)가 되었음
2) 1차 오도(一次 悟道)
경허(鏡虛)는 만공(滿空)을 10여 년(餘 年)이나 부엌데기로 부려먹기만 할 뿐 화두(話頭) 하나 주지 않았고, 이 무렵 만공(滿空)은 이른바 ‘타심통(他心通)’이 열려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알게 되자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풀어주기도 했으나 경허(鏡虛)로부터 “그것은 술법(術法)이지 도(道)가 아니다.”며 꾸지람만 들었는데, 하루는 어린 승려(僧侶)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우주(宇宙)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처음 듣는 화두(話頭)에 앞이 캄캄해진 만공(滿空)은 그곳을 무작정(無酌定) 빠져나와 봉황(鳳凰)의 머리 형상(形象) 아래 지어진 온양(溫陽) 봉곡사(鳳谷寺)를 찾았고, 그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화두 참선(話頭 參禪)에 들어간 지 2년(年)이 지난 1895년(年) 7월(月) 25일(日), 면벽 좌선(面壁 坐禪) 중(中) 무념 상태(無念 狀態)에서 벽(壁)이 사라지고 허공법계(虛空法界)가 드러나는 체험(體驗)에 이르렀고, 이어 새벽종(鐘)을 칠 때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우주(宇宙) 법계(法界)의 모든 원리(原理)를 응당(應當)히 관찰(觀察)하면 모든 것이 곧 마음의 조화(造化)이다)’라는「게송(偈頌)」을 읊다가 홀연(忽然)히 깨달음을 얻고는 다음의『오도송(悟道頌)』을 남겼음
『오도송(悟道頌)』
空山理氣古今外 빈 산(山)의 이치(理致)와 기운(氣運)은 예와 지금의 밖에 있는데
(공산이기고금외)
白雲淸風自去來 흰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
(백운청풍자거래)
何事達摩越西天 무슨 일로 달마(達摩)는 서천(西天)을 건너왔는가
(하사달마월서천)
鷄鳴丑時寅日出 축시(丑時)엔 닭이 울고 인시(寅時)엔 해가 뜨네.
(계명축시인일출)
3) 2차 오도(二次 悟道)
그때부터 만공(滿空)은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 토굴(土窟)에서 3년간(年間) 보임(補任)했으나 경허(鏡虛)는 새끼 사자(獅子)를 벼랑 끝에서 밀어버리듯 “그것은 완전(完全)한 깨달음이 아니다.”며 경책(警責)했고, 그리하여 스승이 준 ‘무(無)’자(字) 화두(話頭)를 들고 다시 정진(精進)하던 중(中) 31세(歲) 때인 1901년(年) 경남(慶南) 양산(梁山) 영축산(靈鷲山)의 흰구름 떠도는 외딴 암자(庵子) 백운암(白雲庵)에 이르렀다가, 그곳에서 장마를 만나 보름 동안 꼼짝 못한 채 참선(參禪)만 하던 어느 날 새벽 종(鐘)소리를 듣는 순간(瞬間) 상대세계(相對世界)가 무너지고 마침내 우주(宇宙)의 본심(本心)이 드러나는 깨달음을 얻게 되어 다음의『오도송(悟道頌)』을 읊었음
『오도송(悟道頌)』
淸淨般若蘭 깨끗한 반야(般若) 난초(蘭草)
(청정반약란)
時時吐般若 때때로 깨달음의 향기(香氣) 토(吐)하네
(시시토반약)
若人如是解 사람도 이와 같으면
(약인여시해)
頭頭毘盧師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이구려.
(두두비로사)
4) 법인가(法認可)를 받음
서산 부석사(瑞山 浮石寺)와 부산(釜山) 범어사 계명암(梵魚寺 鷄鳴庵)에서 수도(修道)했으며, 또 해인사 조실(海印寺 祖室)로 초청(招請)받은 경허(鏡虛) 스님을 시봉(侍奉)하기도 하던 만공(滿空)은 1904년(年) 금강산(金剛山)을 거쳐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하러 떠나는 경허(鏡虛)에게 마지막으로 법인가(法認可)를 받고 ‘만공(滿空)’이란 법호(法號)를 받았는데, 그 때 만공(滿空)은 경허(鏡虛)의 헌 담배쌈지와 담뱃대가 맘에 걸려 새것으로 선물(膳物)하자 스승은 아이처럼 좋아했으며, 훗날 임종(臨終)을 맞을 때 경허(鏡虛)는 이 두 가지를 꼭 무덤에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고 함
만공(滿空)과 경허(鏡虛) 사이에는 일화(逸話)가 많은데, 그 하나는 어느 날 무거운 시주 바랑을 짊어진 만공(滿空)이 경허(鏡虛)에게 “너무 무거워 쉬었다 가자”고 하자, 경허(鏡虛)는 “무겁지 않게 해주겠다”며 지나가던 여인(女人)의 입을 맞추었고, 여인(女人)의 비명(悲鳴)소리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나와 그들을 쫓아오자 만공(滿空)은 정신(精神)없이 산(山)속 절까지 뛰었는데, 그때 경허(鏡虛)는 빙긋 웃으며 “아직도 그 바랑이 무겁더냐?”고 물었다고 함
5) 홍법(弘法)
만공(滿空)은 예산(禮山) 덕숭산(德崇山) 정상 부근(頂上 附近) 정혜사(定慧寺) 밑에 금선대(金仙臺)라는 초가 암자(草家 庵子)를 짓고 수도승(修道僧)들을 지도(指導)하였으며, 이후(以後) 금강산 마하연사(金剛山 摩訶衍寺) 생활(生活)과 마곡사 주지(麻谷寺 住持) 생활(生活)을 제외(除外)하고는 대부분(大部分)의 생애(生涯)를 덕숭산(德崇山)에서 보내면서 수덕사(修德寺)?견성암(見性庵) 등을 일으킴으로써 덕숭 문중(德崇 門中)이 태동(胎動)하였는데, 따라서 근대 한국 불교(近代 韓國 佛敎)의 선풍(禪風)은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오늘날 덕숭산맥(德崇山脈)의 시발(始發)은 만공(滿空)에게서 연원(淵源)하게 된 것임
6) 일본 총독(日本 總督)에게 일갈(一喝)
마곡사 주지(麻谷寺 住持)로 있던 1937년(年) 3월(月), 총독부(總督府)가 전국 31본산(全國 三十一 本山) 주지(住持)와 도지사(道知事)를 모아 미나미 지로[남차랑(南次郞)] 일본 총독(日本 總督)의 주재(主宰)로 ‘불교 진흥책(佛敎 振興策) 마련’이란 미명하(美名下)에 한?일 불교 합병(韓日 佛敎 合倂)을 획책(劃策)하는 회의(會議)를 개최(開催)했는데, 그 자리에서 미나미[남(南)]가 “전(前) 총독(總督) 데라우치[사내정의(寺內正毅)]는 조선불교(朝鮮佛敎)에 끼친 공(功)이 크다”고 하자, 만공(滿空)은 벌떡 일어나 “데라우치[사내정의(寺內正毅)]는 조선 승려(朝鮮 僧侶)로 하여금 일본 승려(日本 僧侶)처럼 파계(破戒)하도록 했으니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 큰 고통(苦痛)을 받을 것”이라고 분연(奮然)히 소리치면서, “정치(政治)와 종교(宗敎)는 분리(分離)되어야 하며, 불교 진흥(佛敎 振興)은 정부(政府)가 불교(佛敎)에 간섭(干涉)하지 않을 때 가능(可能)하다”고 일갈(一喝)하자, 미나미[남(南)]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고 함
그날 밤 만공(滿空)의 둘도 없던 친구(親舊)인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 1879~1944) 스님이 찾아와 “이왕(已往)이면 주장자(?杖子)로 저 쥐새끼 같은 놈들을 한 방씩 갈겨 주지 그랬나”라고 하자, 만공(滿空)은 “미련한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큰 사자(獅子)는 원래(原來) 할(喝 : 깨달음을 주기 위(爲)해 크게 소리침)을 하는 법(法)”이라고 응수(應手)했다고 함
7) 입적(入寂)
1941년(年) 서울(Seoul) 선학원(禪學院)에서 개최(開催)한 전국고승법회(全國高僧法會)의 설법(說法)에서 계율(戒律)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振作)시켜 한국불교(韓國佛敎)의 바른 맥(脈)을 이어가자고 역설(力說)하기도 했던 만공(滿空)은 말년(末年)에 덕숭산(德崇山)에 전월사(轉月舍)를 짓고 지내다가 1946년(年) 10월(月) 20일(日) 나이 75세(歲)?법랍(法臘) 62세(歲)로 입적(入寂)했는데, 입적(入寂)하던 그해 봄 만공(滿空)은 시봉(侍奉) 스님을 불러 “더 살면 험악(險惡)한 꼴을 볼 것이니 올해 시월(十月) 스무날쯤 가는 게 좋겠다”고 했고, 바로 그날 아침 목욕(沐浴) 후(後)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네, 나와 이별(離別)할 때가 되었네 그려.” 하더니 열반(涅槃)에 들었다고 함
3. 일화(逸話)
거구(巨軀)에 육척장신(六尺長身)으로 힘이 장사(壯士)였던 만공(滿空)은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 : 1889~1930) 장군(將軍)과 팔씨름을 하면 이길 때가 많았다고 하며, 또 풍류(風流)를 즐길 줄 알았기에 만공(滿空) 주위(周圍)에는 남농 허건(南農 許楗 : 1907~1987)?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 1891~1977) 등 화가(畵家)들을 비롯해 글쓰고 그림 그리고 소리하는 예인(藝人)들이 항상(恒常)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그럴 때면 만공(滿空)은 늘 옆에 끼고 있던 ‘공민왕(恭愍王) 거문고’를 타며 함께 풍류(風流)를 즐겼다고 함
만공(滿空)의 거처(居處)였던 덕숭산(德崇山) 소림초당(小林艸堂) 앞의 작은 다리 갱진교(更進橋)는 달빛을 벗삼아 만공(滿空)이 거문고를 타던 곳으로 유명(有名)하며, 그 거문고는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 1877~1955) 공(公)에게 신표(信標)로 받은 것으로 공민왕(恭愍王)이 직접(直接) 만들어 탄 이후(以後), 대대(代代)로 조선왕조(朝鮮王朝)에 전(傳)해온 왕가(王家)의 가보(家寶)였다고 하는데, 현재(現在)는 수덕사(修德寺)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에 보관(保管)돼 있으며, 거문고의 뒤판(板)에는 만공(滿空) 스님이 지었다는「거문고 법문(法文)」이 씌어 있음
또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에는 이 거문고와 함께 만공(滿空)이 일본 패망(日本 敗亡)을 전(傳)해 듣고 기뻐하며 무궁화(無窮花) 꽃봉오리를 붓삼아 썼다는 ‘세계일화(世界一花 : ‘세계(世界)는 한 송이 꽃’이라는 뜻임)’라는 편액(扁額)도 걸려
천황에게 마력이 있다고 일본 사람들은 믿어왔다. 그래서 일단 천황에게 칼을 들이대면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청난 군대를 지휘하는 뛰어난 무장조차도 천황의 저주를 두려워하여 승산이 있다해도 그대로 항복할 정도로 그 위력은 대단하다.
카마쿠라(鎌倉)막부[바쿠후(幕府)] 3대 쇼오궁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実朝)가 형인 2대 쇼오궁 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賴家)의 아들인 쿠교(公暁)에게 암살되자 조정과 막부의 대립은 심화되고 결국 코토바(後鳥羽) 상황[죠오코오(上皇)]은 당시 카마쿠라의 가장 유력한 실권자인 호오죠오 요시토키(北条義時)의 토벌을 결의한다. 이에 대해 카마쿠라 막부는 19만명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군으로 저항하여 조정의 계획은 단번에 분쇄되고 만다. 그 때 만약 조정 측이 니시키노 미하타(錦の御旗, 관군을 나타내는 빨간색 바탕의 비단 천에 해와 달을 금과 은으로 자수 해넣은 깃발)를 들고 진군해왔다면 막부는 무조건 항복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결과는 깃발은 올려지지 않았고 전쟁은 막부의 승리로 끝났으나 천황의 저주공포는 그 직후에 현실로 나타났다. 오키(隠岐)로 유배된 코토바 상황은 막부를 저주하다 10년 후에 죽었고 그 해부터 막부의 중요인물이 줄줄이 변사한다. 미우라 요시무라(三浦義村)·호오죠오 토키후사(北条時房)가 먼저 급사하고 3년 후에는 막부를 지배하고 있던 식켕[執権, 카마쿠라(鎌倉)시대에 쇼오궁(将軍)을 보좌하고 정무를 총괄한 직책으로 사실상 실권을 쥔 최고직] 호오죠오 야스토키(北条泰時)가 발광하여 급사한다. 이 때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천마봉기[템마호오키(天魔蜂起)]라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을 전율케 한다. 이런 이유로 근대 일본이 탄생하려고 할 때에도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마지막 쇼오궁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니시키노 미하타(錦の御旗)에 떨며 항복을 하고 정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타이세에 호오캉(大政奉還)을 단행하고 만다.
역사를 살펴보면 천황의 권력과 제도는 어디까지나 정치권력을 잡은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상(幻想)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사람의 손에 의해 파괴된다. 하물며 형태가 없는 권위라면 언젠가 그 위광(威光)이 없어질 때가 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에 한해서만 예외가 존재하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지금까지 일본에서의 천황의 권위는 그를 둘러싼 정치세력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져온 가공(架空)의 산물이라고 해도 불가해한 점도 없지는 않다. 그러기에 역사 속에서 천황제는 정치세력의 기묘한 역학 관계 속에서 특유의 불가사의함을 생존논리로 지금까지 버티어 왔다. 여기에 때로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 속에서 천황의 권력은 지배 혹은 탄압의 논리로 이용되어 온 적이 많다.
그 중 2차 대전 중인 1940년의 수 년 전부터 현상타파·세계 신질서 건설의 정신적 지주를 키키[記紀, 『코지키(古事記) 710』의 키(記)와 『니혼쇼키(日本書紀) 720』의 키(紀)를 함께 부르는 병칭]에서 찾으려는 태도가 정부에서 생겨났다. 당시 문부성[몸부쇼오(文部省)]의 교학국[쿄오가쿠쿄쿠(敎学局)]은 『국체의 본의[코쿠타이노 홍기(国体の本義)]』·『신민의 길[심민노 미치(臣民の道)]』을 국민 교과서로 출판하고, 천손강림[텐송 코오린(天孫降臨)]땅으로 되어있는 큐우슈우(九州)의 타카치호(高千穂)산의 봉우리에는 학코오이치우[八紘一宇, 여기서 우(宇)는 지붕의 뜻으로 세계를 하나의 지붕으로 한다는 의미로 태평양전쟁 때에 일본의 해외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된 표어로 천황을 거의 신처럼 간주하고 있다]의 석탑을 건립하였다.
1938년에는 외무성 신 관료그룹인 나카가와 토오루(中川融), 우시바 노부히코(牛場信彦) 등 8명은 당시의 외무장관인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에게 천황의 선정을 세계에 알리는 신성한 업무의 전위에 선 외무관료로서 황도외교라는 명칭에 걸 맞는 일련의 근본정책을 갖고 있다고 제언한다. 당시의 관료까지 나서서 천황의 권위 확산을 위해 앞잡이 노릇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동시다발로 회자되었던 것이 「일본은 신이 기초를 다지고 신의 가호를 받는 국가이다(日本は神国)」·「신의 국가는 멸망하지 않는다(神州不滅)」·「천황의 군대는 패하지 않는다(皇軍不敗)」·「카미카제(神風, 신의 위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바람. 특히 원나라 침입 때 원나라의 군함을 침몰시킨 큰 바람. 2차 대전 당시 자살특공대의 호칭으로 쓰이기도 했다)」·「아라히토가미(現人神)」·「교육칙어[쿄오이쿠 쵸쿠고(敎育勅語)]」였다.
아라히토가미란 말은 신은 원래 숨어있는 존재이지만 이 세상에 나타난 신이란 이름으로 천황을 칭한다. 사람의 모습을 갖춘 신, 천황을 존경해서 말하는 호칭으로 아키츠가미(現つ神)라는 말도 썼다. 천황을 지칭하는 말의 하나로 천황은 현신(現神)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 신이라는 관념에 근거하여 천황의 신성함을 기리며 이것을 외경하는 의미를 가진 호칭이다. 그 근거로 『니혼쇼키(日本書紀)』의 〈景行天皇 40년 是歲条〉에 일본 무존(日本武尊)의 말로서 〈짐은 현인신의 자손이다(吾是現人神之子也)〉라고 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이 교육칙어[쿄오이쿠 쵸쿠고(敎育勅語)]이다.
일본인을 근대 천황제라는 주형에 밀어 넣은 것이 교육칙어로 내용으로는 「항상 황실전범 및 헌법을 비롯해 모든 법령을 준수하고 만일 국가의 안위가 위협을 받을 때에는 대의명분에 근거해서 용기를 앞세워 황실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칠 것. 이렇게 함으로써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말씀하신 대로 하늘과 땅이 멸망하지 않고 〈중략〉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짐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훌륭한 신민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대들의 선조가 남긴 미풍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중략〉 이 덕목은 고금을 통해 영원불변이며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바른 길이다. 짐은 그대 신민과 함께 이 길을 소중히 지키고 모두 이 길을 체득 실천할 것을 절실히 바라노라」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각급 학교에 이 복사본이 배부되어 교장은 독특한 억양으로 봉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업무로 생각했다. 이 칙어에 배례를 거부하여 우치무라 칸조오(内村鑑三)는 면직처분을 받았으며 1946년 6월에야 국회에서 그 배제 실효에 관한 결의가 가결되어 등본이 회수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다음 일본을 점령한 GHQ는 〈다이토오아 센소오(大東亜戦爭)〉·〈학코오 이치우(八紘一宇)〉·〈에에레에(英霊)〉라는 말의 사용을 엄격한 검열로 금지시키긴 했지만 이처럼 천황제는 신의 체계의 지원을 받아 정권의 시녀노릇을 하며 많은 폐해를 낳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일본인의 신에 대한 관념이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잠재되어 있지만 신과 천황의 결탁은 항상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일본의 통치의 구조는 〈천황〉을 빼놓고는 언급할 수 없다. 일본이 국가로 탄생한 이래, 국가의 상징으로서 지위를 계속 유지해온 것은 천황이다. 다만, 천황이 직접 구체적으로 국가를 통치한 것은 고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고 현실 정치를 행한 것은 귀족이나 무가를 중심으로 한 막부였다. 근대가 되어, 소위 「메에지 헌법」이 시행되어 천황이 헌법의 시행자가 되었지만 정치 제도는 「의원내각제」가 되어 정치의 책임은 정부에게 있었다.
2차 대전에서는 일본이 패배하고 맥아더 사령부의 주도로 헌법이 개정되어 1947년 5월3일에 신헌법이 시행되었다. 이 신헌법에서는 주권자가 천황에서 국민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헌법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이라고 되어 있고 헌법 제6조에서는 수상을 임명하고 대법원장을 임명하고 제7조에는 천황의 국사행위에 관한 것이 명시되어 있다. ① 헌법개정, 법률·조약의 공포 ② 국회의 소집 ③ 중의원 해산 ④ 선거의 공시 ⑤ 국무대신 등의 임면과 인증 ⑥ 대사면의 실시 ⑦ 영전의 수여 ⑧ 비준서·외교 문서의 인증 ⑨ 외국 대·공사의 접수 ⑩ 의식의 집행 등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내각의 조언·승인에 의해서 행하는 것으로 실체적으로는 천황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본래의 전통적인 천황제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권위(천황)」와 「권력(정부)」을 병립해서 기능하고 있는 일본 통치의 구조이다. 이른바 황금분할인 것이다.
일본에는 돈·권력·명예의 균분등식이 있다. 천황은 명예(권위)만 갖고 총리는 권력만 갖는다. 기업은 권력과 명예는 없지만 돈을 갖는다. 그런 식으로 일본 사람들 개개인이 갖고 있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합산해 셋으로 나누면 대충 비슷하다는 얘기이다. 타케우치 히로시(竹内宏)라는 평론가는 이 같은 균분[킴붕(均分)]등식을 일본 사회를 안정시키는 합리적인 묵계라고 지적했다. 돈과 권력과 명예의 균분등식은 일본 역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적 불문율로 이어져왔다. 에도 막부 시대에도 천황은 명예를, 쇼오궁은 권력을, 상인은 돈을 나누어 가졌다. 일본 재계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츠시타 그룹 창업자 마츠시타 코오노스케(松下幸之助)는 생전에 정계진출을 한사코 뿌리쳤다. 그는 자신이 정계에 나가는 대신 사재를 털어 젊고 유능한 정치 지망생들을 키우는 마츠시타 정경숙[세에케에쥬크(政経塾)]을 만들었다. 기업인은 돈과 권력을 동시에 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것도 결국은 균분의 형식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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