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인물 | 문 건 | 제작년 | 지은이,출처 |
805년(류차달선대),류차달 | 흥률사중건 상량문 | 1365년 | 법원선사 |
류차달 대승공 | 류보발(12세)묘지명 | 13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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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차달 | 류승(10세)딸(權溥처)묘지명 | 1344년 | 안동권씨 |
류차달,류효금 | 류돈(11세) 묘지명 | 13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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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4세),보춘(5세),총(6세) | 류공권(7세)묘지명 | 1196년 | 발굴 늦음 |
류차달 | 류량(14세)졸기 | 1416년 | 왕조실록 |
문화류씨족보 | 영락보 | 1423년 | 류영 |
류차달 | 대승공묘갈명 | 1543년 | 외손홍춘경 |
2. 문화류씨 족보 자손록
① 시조 류차달 : 두번째줄에 “太祖征南時多出車乘以通糧道以功”(태조정남시 다출차승이 통량도이공)
② “수레와 군량이 남정시 공이 되다”는 배경 설명입니다.(흥률사 상량문)
3-1. 2008년 문화류씨 무자보 총목 114, 115쪽 흥률사 상량문 해설
문화류씨시조 류차달 대승공에 대한 가장 오래된(最古)의 기록으로 타성씨 보학자들은 연구자료로 자주 사용하는데 흥률사중수량상소기서(興栗寺重修樑上所記書)는 至正16년(고려 공민왕5년) 법원선사가 중창개조(重剏改造)하면서 삼국유사를 참고하여 쓴 상량문이며 1423년(세종5년) 영락보가 발행되고 가정22년(1543년,중종38년)에 외손 홍춘경이 대승공 묘갈을 쓰기에 흥률사상량문이 문화류씨 최고(最古) 기록입니다.
① 흥률사 창건 년대 805년
② 사해황제 일구복지
㉠ 사해황제 : 서남해안에서 무역상을 하던 호족들 모임(다음에 추가설명)
㉡ 일구복지 : 하나의 상서로운 지역이 되었다”는 四海兄弟(四海皇帝,사해형제,사해황제)들이 중요한 일을 앞두고 복되고 좋은 일이 있을 장소(사해 형제들이 모이는 장소)에 자주 모이게 되었습니다.
③ 백년이 지나 : 805년에서 백년 후는 905년이다. 궁예가 901년 고려(高麗)를 건국하였습니다.(왕건의 고려와 구별하여 흔히 후고구려라고 부름)
903년 3월 왕건에게 수군을 지휘하게 하여 후백제의 금성(錦城,羅州)을 공취하고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이라하고 청주(淸州) 인호(人戶) 1천인을 철원으로 옮기는 등 사전 준비하였고 905년 7월 철원으로 다시 천도합니다.
흥률사 창건 백년전후 전쟁은 903년 나주 해전(전투)뿐입니다.
④ 사원이 쇠락하고 : 흥률사가 폐허되어
⑤ 승려가 찾지 않았습니다(승려들조차 찾지 않는 절을 류차달이 찾아간 뜻은? 대승공 할아버지가 손자 류차달에게 현몽하려고 흥률사에 가게 함).
⑥ 신인(神人) : 100년후 즉 903년 폐허된 흥률사에 와서 졸면서 꿈을 꾼 신인이 있었습니다.
⑦ 청의동자 : 어느 특정사항에서 꿈에 현몽하여 좋은 길을 인도해줄 사람은 조상이거나 신령인데 여기서는 류차달 祖父(할아버지)로 봅니다.
류차달 祖父가 아닐 수 있는데 손자인 류차달을 스님도 찾지 않는 폐허된 절로 인도하고 수많은 궁예 장수중에 왕장군이 군량미가 없다고 알려줄 사람은 류차달祖父와 작제건이 형제처럼 지냈다는 이야기가 성립합니다.
⑧ 왕장군 진중에 군량이 없다 : 왕건이 궁예장수이기에 태조가 아닌 “왕장군”이며 군량미를 도와주라는 것입니다(궁예왕을 도와주라 해야 정상적임)
⑨ 신인이 잠을 깨어 : 류차달이 꿈을 꾸기 위해 스님이 계신 절이 많은데 폐허된 절로 스님도 없는 절에 간 것은 류차달할아버지가 흥률사로 대승공을 인도한 것입니다.
⑩ 하루밤에 수레 천대에 군량미를 실었다는 것은 903년 류차달이 20대초반(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것)인데 하루에 식량 수레천 대분을 마련한 것은 류차달이 財力을 축적했다기보다는 선대에 해상무역으로 財物을 모은 후 유주에 와서 살고 있었다는 근거로 世宗實錄地理志 文化縣 편에 柳씨는 來姓(이주한 성씨)이라고 되어 있어 류차달선조(父, 祖父)가 무역으로 富(財寶)를 축적하여 儒州로 왔고 류차달 선조(父, 祖父)는 황해도 어디에서 무역을 하여 부를 축적했는지 유주로 온 기록이 없으나 류차달을 고구려 후손입니다.
⑪ 신군 천여명 : 류차달 아버지가 家兵 천명을 나주 전투에 출전하면서 군량을 아들은 류차달이름으로 제공합니다.
궁예가 892년 양길부하가 된후 양길이 준 100여 기병(騎兵)을 바탕으로 세력을 넓혀 양길을 치고 후고구려를 개국했기에 903년 궁예 병력이 약 3,500명 정도인데 왕건을 의심(믿을 수 없어)해서 병력을 내주지 않아 처가인 류천궁 선박수리소에서 선박을 지원 받고 류천궁 요청으로 류차달이 병사와 군량(미)을 재공하게 됩니다.
⑫ 지금까지 기록된 신인 이름이 류차달이다.
⑬ 이런 기록들이 삼국유사에 있다. 즉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상량문을 씀.
⑭ 지정16년 : 고려 공민왕 5년(1356년) 법원선사가 흥률사를 중창하면서 쓴 상량문입니다.
⑮ 기사보에 이르기를 : 1689년발행 문화류씨 기사보에 “비록 과장되었지만 예전 어른들이 古跡으로 버리지 않는 연유로 후손에게 알린다”하였습니다.
필자 견해는 과장된 부분이 “수백년” “하루밤에 수레일천대” “신군 천여명” 등입니다.
3-2. 추가 설명(시대순으로 설명)
②-1 사해황제 : 서남해안 세력들이 흥률사에 모이는 팩트
청해진 해산후 서남해안 해적을 작제건이 막아주는 세력이라 주장하는 나주사학자가 있는데 청해진 장보고처럼 무역상호족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면 장보고처럼 만명정도 병력이 있어야하는데 궁예가 양길부하로 있을 때 894년 명주를 토벌하려 갈 때 병력이 600명으로 출발했는데 명주(강릉)가는 도중에 3500명 충원되었는데 896년 작제건 아들 왕륭이 해적을 물리칠 병력이 있었다면 궁예에게 귀부(항복)하지 않을 것이기에 궁예가 출현하지 전까지 작제건이 패서지역 호족들의 세력에 중심에 있었고 패서지역 호족들을 연합체를 하려고 내세운 실체(fact)가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사해형제(四海兄弟)입니다. 서남해안호족은 온세상 형제이기에 함께 우리를 스스로 보호하자 입니다.(왕건이 태조가 된후 “사해형제”를 “사해황제”로 바꾸었기에 흥률사 상량문에만 사해황제라는 문구가 나오고 다른 문헌에는 “사해형제” “사해”로 나오는데 왕건이 태조가 된후 왕사(王師)인 “이엄”이 사해(온천하)가 왕 것이다라하여 사해황제로 바꿉니다)
②-2 사해황제 : 태조 왕사(王師)의 “왕은 사해가 집이다”
고려 태조10년(927) 팔공산 동림수(桐林藪)에서 5000 군사를 모두 잃는 대참패를 당하고 신숭겸이 왕의 의복을 바꿔 입고 대신 죽는 사이에 겨우 목숨을 구하여 빠져나오게 됩니다.
태조 11년(928) 이엄대사를 왕사로 책봉하고 삼한통일방안을 묻을 때 대답은 “대저 도(道)는 마음에 있고 일에 있지 않으며, 법(法)은 자기에게서 말미암지 남에게서 말미암지 않습니다. 또 제왕(帝王)과 필부(匹夫)는 닦을 바가 서로 다르니 비록 군대를 이끌고 가더라도 또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왜 그러냐 하면 임금은 사해(四海)로 집을 삼고 만민(萬民)으로 자식을 삼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아야 하나 죄 있는 무리들이야 어찌 논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제선(諸善)을 봉행(奉行)하면 이것이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됩니다(夫道在心, 不在事, 法由己, 不由人. 且帝王與匹夫, 所修各異, 雖行軍旅, 且黎元. 何則 王者 以四海爲家, 萬民爲子. 不殺無辜之輩, 焉論有罪之徒. 所以諸善奉行, 是爲弘濟).”
무고한 백성은 죽이지 말되 죄 있는 무리들은 가차없이 응징하라는 적극적인 통일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출처 : 간송미술관역구실장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30-왕건의 후삼국 통일배후 禪僧세력)
②-3 王建과 청해진세력의 형제 사랑
작제건이 장보고 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금의환향하여 송악 지방의 우두머리가 되고 왕륭은 장보고 세력의 일익을 담당하는 제해권자 중의 한 명이었으나 장보고 피살된 뒤부터 세력기반이 흔들렸는데 영암에서 온 청해진 세력과 연합하여 중심세력으로 부상합니다.
왕건은 19세때(895년)에 부친을 따라 궁예 휘하에 들어가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물머리가 합쳐지는 조강구를 차지하여 상권을 장악하여 서남해안호족(4해황제연맹)과 함께 제해권을 확보합니다.
901년 금성(錦城,나주) 남쪽지역을 약탈해 청해진 세력에 도전한 견훤을 응징하려고 청해진 세력과 합작하여 903년 나주 정벌을 단행합니다(903년 양주(良州,현재 경남양산)성 호족 김인훈(金忍訓)이 구원을 요청하자 궁예 허럭을 받아 배를 돌려 양주까지 출병하는 해양세력 형제 사랑)
왕건은 청해진 세력과 밀착되어 있는 사자산문(화순쌍봉사)과 가지산문(장흥보림사) 등 선종세력(*)과 나주 청해진 세력의 내응(적 또는 외부와 남몰래 통함)에 힘입어 나주를 청해진 세력의 새로운 근거지로 삼게 합니다.
(*) 선종세력 : 신라왕실은 敎宗불교였으나 지방호족들은 禪宗(조계종파)도움을 받아 세력형성하였으며 왕건을 도와준 선승세력은 도선국사(실상사혜철제자) 도의(道義禪師,흥률사,류차달이 찾아간 절) 징효(澄曉)대사 절중(折中,왕건스승) 선각(先覺)대사 형미(逈微,先覺國師) 대경(大鏡)대사 여엄(麗嚴), 진철(眞澈)대사 이엄(利嚴,太祖王師), 법경(法鏡,太祖國師)대사 경유(慶猷,太祖王師) 경보대사(금산사,도선제자) 등
청해진 휘하에 있던 서남해 연안 각 해상세력들(4해황제)이 왕륭을 맹주로 삼아 장보고 때와 마찬가지로 서남해안을 장악하지만 견훤 휘하에 있던 당시 영암청해진(현 완도청해진)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909년에 나주로 2차 출병을 하여 염해현(영광)에서 견훤이 오월국(吳越國)으로 보내는 배를 빼앗게 되는데 정주 류천궁(왕건 장인) 선박수리소에서 전함들을 수리한 후 군사 2,500명을 거느리고 910년까지 영암진도와 고이도(皐夷島,압해현)을 점령합니다. 912년 나주로 3차 출병하여 덕진포 해전 몽단파전군해전을 하고 914년(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견훤휘하 청해진 세력을 소탕하고 개경에 가기 위해 오씨부인이 있는 희여재를 지나 여황포(현 본량)로 갑니다.
②-4 사해황제 : 김인창박사의 “덕진포해전”에 의하면 846년 장보고가 사망하고 그를 추종하던 장수들 중 정년장군은 고향(영암)으로 돌아와 정착하고 인근지역은 물론 서남해안 지역의 해상 호족들을 관리하고 영암 일부호족들은 송악(개성) 인근 정주해안3)으로 옮겨 활동(최지몽 등) 했다고 합니다.
※주3 정주해안 : 장보고가 무역호족들의 해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는데 장보고가 죽은 이후 부하들은 정주(패서지역)과 서남해안으로 돌아가 활동하다가 서남해호족들이 “우리는 형제다”라며 흥률사에 모여 4해형제동맹을 만들었고 4해형제 손자대에 와서 왕건을 도와주게 되어 견훤이 무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이후 10년동안 완산주로 수도를 옮기지 못한 것은 서남해안 호족들이 견훤에 비협조적이기 때문이며 왕건이 궁예부하일 때 왕건을 도운 세력들이 서남해안 호족인데 그 호족을 이끈 주역이 작제건(왕건할아버지)과 류차달 祖父 때 흥률사에서 모인 서남해안 4해형제 세력은 작제건 류차달 류천궁을 포함하여 염주류긍순 정주류덕영 연안유상희 아산박술회 영광전종희 나주여황나총례 진주왕봉규 울산박윤웅 등이며 왕건이 태조가 된후 4해형제를 4해황제라하게 됩니다.
②-5 근대 학자들의 사해
※ 柳麟錫 毅菴集 檄告八道列邑
※ 흥률사 상량문에 “흥률사가 사해황제 모이는 장소” 인데 사해황제 주동인물이 류차달(흥률사 상량문이기에) 류천궁선조(100년후 류차달이 왕장군 도우라는 꿈을 꾸기에)라는 것이고 작제건은 왕건 할아버지이기에 왕건 선조라 하지 않고 작제건이라했습니다.
⑦ 청의동자 : 청의동자가 류차달할아버지라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지만 꿈에 좋은 일하라고 할 사람은 할아버지라는 것이고, 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은 알겠지만 류차달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계시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데 그렇다고 동시대 사람인 도선국사처럼 “오이를 먹고 태어나다” “건훤처럼 ”지렁이가 왔다가서 태어나다“ ”윤선달처럼 “잉어가 살려주었다” 할 수 없고 타문이 만들어준 아버지 할아버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대승공(류차달)에 대한 불효이기에 더 연구해서 류차달 선대를 찾아야 하지만 청의동자와 류차달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류차달할아버지, 왕건이 덕진포해전에서 도와준 수신(水神)이라하듯 청의동자神이라 해야하는가?이 생기는데 神이라 하지 않고 청의동자라 했기에 류차달 祖父는 무리한 설정이 아닙니다.
⑪ 신군 천여명 : 류차달이 나주해전에만 家兵 천명과 군량을 제공했고 이후 수 많은 전투에 군량(미)만 제공한 증거로 허선문(許宣文, 양천허씨 시조, 부천부근 호족)는 태조가 천안을 가기 위해 한강에 왔을 때 船와 군량미를 제공하여 공암촌주(孔巖村主)에 봉했는데(부천시사, 부천시사편찬위원회, 2002) 개국공신 명단에 없고(양천허씨대종회에서 허선문을 왕건의 假父라 불리고 삼한공신이라 함), 이도는 고려 건국후 934년 운주성전투에서 금강이 범람하여 태조에게 배(船)와 가병 3천명과 군량미 지원하여 2등개국공신이 됩니다.
류차달이 병사 천명과 군량을 한번 제공했다면 2등공신이 될 수 없기에 903년부터 936년까지 수 많은 전투에 군량을 제공한 것이 정설입니다.
⑮ 기사보에 이르기를 “비록 과장되었지만”에서 “수백년”과 “하루밤에 수레일천대”는 설명했으니 “신군 천여명”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903년 나주전투에 동원된 병력을 천명으로 추산(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논문)하는데 류천궁家兵과 왕건아버지家兵, 류차달아버지家兵을 합하여 천명이 출전하는데 군선은 왕건 장인 류천궁이 군량미는 류차달이 제공하였으며 병력수가 적어 견훤이 왕건군대가 오는지 모르고 당했습니다.
4. 903년 나주해전과 본량(임원빈박사 논문 발췌함)
세계 4대 해전에 한산도 해전(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倭 수군을 대파한 전쟁이며 한국 4대 해전에 903년 나주 해전이 포함됩니다(1대 2대 3대 해전은 외국과 전쟁이지만 4대해전은 우리민족끼리 전쟁임).
① 고구려 고건무 제독과 수나라 래호아의 해전(612년)
"살수대첩"에서 고구려 고건무 제독과 수나라 래호아의 평양 해전.
②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의 백강전투(663년)
왜倭에서 온 부여풍이 병선 4백여척과 약 4만의 군대로 백제부흥군과 연합하여 나당연합군과 벌린 전투
③ 해상왕 장보고의 동아지중해 해적 토벌과 해상권 장악(828~846)
청해진대사 장보고(?~846)는 왜구 등의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왕이 되어 동아지중해(동아지중해 : 좁게는 발해와 황해를 넓게는 황해 남해 동해를 더 넓게는류큐열도 일대까지를 아우르는 바다를 유럽의 지중해와 같이 보는 동국대 교수 윤명철 교수를 중심으로 한 역사학계의 이론)를 장악하였다.
④ 궁예와 견훤의 금성전투에서의 해전(903년) 태봉국 궁예의 장수 왕건과 후백제 왕 견훤의 해전
장보고 이후 불과 60년이 지났을 즈음 궁예의 태봉국은 903년 왕건을 사령관으로 금성(錦城,현羅州)을 공략하여 귀부 시켰다.
왕건은 수상세력 작제건의 손자로서 금성전투에 예성강지역을 배경으로 한 수상세력을 활용하여 수군을 동원4)하였다.
※주4 수상세력을 활용하여 수군 동원 : 궁예가 나주해전에 참여한 군대를 주지 않기에 해상호족들이 家兵을 동원하여 왕건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패서호족들이 궁예를 믿지 못했지만 궁예도 처가인 산천강씨들이 있는 송악(개경)으로 갔으나 왕건 가문은 신천강씨 강보육을 왕건 증조라 하고 왕건 장인 류천궁은 같은 柳씨인 류차달 등 패서호족들이 믿을 수 없어 903년 나주해전후 905년 철원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왕건이 수많은 궁예부하중 한명인데 패서호족들이 가병을 내주는 것은 궁예에게 목숨을 내놓는 것이기에 형제가 아니면 가병을 내주지 않기에 나주해전에 가병을 내준 주역이 류천궁 류차달 왕건 가문입니다.
경기도 지역의 태봉국이 견훤이 지키는 충청도 지역을 지나서 육로로 나주를 공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상세력이었던 왕건이 바닷길로 나주를 친 것이고 당연히 해전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금성태수는 나총례였다.
당시 금성(錦城)은 바다에 접한 도시였다. 여황현(*)5) 까지 바닷물이 들었을 것이며 금성태수 나총례와 나주장자 오다련이 수하에 수달(水獺, 능창)이라는 수군 장수를 거느리고 있었다.
<* 여황현艅艎縣: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광역시로 합병되기 전 광산군 본량면. 조선시대에는 나주의 속현이었으며 옛 지명인 여(艅)와 황(艎)에 모두 배주(舟) 들어 있는 것이다>
※주5 “여황현(*) : <*”는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장의 각주임
해상세력인 왕건이 역시 해상세력인 금성태수 나총례와 손을 잡기 쉬웠을 것이고 그렇기에 왕건은 큰 전투를 치르지 않고 금성을 귀부 시켰지만 견훤과의 해전 그리고 금성을 지키는 수군과의 해전에 승리하였기에 고려 건국의 기반이 되는 금성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해전의 네 번째를 금성전투의 해전으로 든다.
※ 출처: https://il11.tistory.com/290 [.밝누리.의 인생 노트]임원빈6)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장.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장 "다시보는 리더십 이순신" 포스토 신문 연재기사
※주6-① 임원빈 : 임원빈(任元彬·1958년생)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석사·박사) 해군사관학교 철학교수, 해군 대령으로 전역 /이순신 리더십 전문가로 활동 중, 이순신 대상(2010)/경남 전남 공동 주관, 『고려시대 수군 관련 사료집』(4인 공편), 신서원, 2004.등 저서 논문 다수.
※주6-② “수년전부터 왕건의 나주전투가 중요한 전투이고 그 중심에 류차달이 계신다”는 글을 발표했으나 과장과 허구라는 분에게 나주전투와 류차달 그리고 본량면 관련 내용과 대동사가 본량에 있게 된 사연으로 임원빈 교수 글을 소개합니다.
5. 금성군 여황현과 류차달
① 통일신라는 757년(경덕왕16년) 금성군 영현으로 회진현 철야현 여황현을 두었기에 장화황후가 살았다는 현재 도림마을이 여황현입니다.
궁예3년(903년) 왕건이 금성군을 처서 10개군현을 빼앗은 후 나주군이라 했습니다.
고려 성종은 983년 전국을 12목으로 개편하면서 나주군을 나주목으로 고치고(여황현은 나주군임) 1018년 나주목을 5개속군(무안 담양 곡성 낙안 남평)과 11개 속현(철야 반남 안노 복룡 원율 여황 창평 장산 회진 진원 화순)과 고읍에 압해현으로 개편합니다.
대승공 사우 대동사가 있는 본량동은 백제 때 목천현(木川縣)이었고 신라 때는 여황이라 하였으며, 한말에는 여황면이 있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나주군에 편입되어 본량면이 되었습니다. 1988년 광주직할시에 편입되어 광산구 본량출장소가 개설되었고, 1998년 본량동이되었습니다
영암군은 신라 757년 영암군으로 개칭되고 고려초 행정구역은 완도청해진 보길도 추자도 진도 해남일부지역(삼산 옥천 화원 북평 송지) 등 이었고 1895년 현 신북면 주변에 나주부 비읍면 종남면 원정면 반남면 북이종면이 있었는데 1896년 나주부 영암군 비읍면으로 개편하고 나주였던 신북일부지역(모산,이목동 등)이 1914년 영암군으로 편입됩니다.
비읍면은 모산 이목동 유곡 갈곡 학동 양계 종오 우정이며 북종이면은 금수 장산 명동 구장터 천동 월평 행정 월지입니다.
② 903년 나주 성문을 열어준 금성태수 나총례(錦城羅氏始祖)는 정종조7)에 삼한벽상 1등공신이 되고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로 금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나총례(羅聰禮)의 후손들은 940년 부터 조선 후기 1747년까지, 800년 동안 나주나씨(현 금성 나씨)였습니다.
여황나씨가 나주나씨로 변한 羅富 후손과 나총례는 다른 계통이지만 금성태수 나총례가 여황포구에서 임원빈박사 논문에 의하면 왕건 군사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왕건이 903년 나주 해전을 할 때 류차달이 신군과 군량을 지원 했기에 해전에 참여한 신군(류차달 家兵)으로 부터 여황포구 전황을 들었을 것인데 여황이 본량으로 대동사가 있는 지역입니다.
1945년 본량에 대승공사우를 건립하자고 결의 했던 할아버지들께서 이런 사실과 당시 나주였던 무안 곡성에 충경공후손이, 담양에 중문지후사공후손이 화순에 검한성공 후손이 여황에 좌상공후손이 나주목비읍에 하정공 후손 등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주7 정종 : 고려왕조는 제1대 태조(太祖,918년6월~943년) 제2대 혜종(惠宗, 943년~945년) 제3대 정종(定宗, 946년~949년) 제4대 광종(光宗, 949년~975년) 제5대 경종(景宗, 976년~981년) 제6대 성종(成宗, 982년~997년)으로 이어지는데 정종은 즉위후 개국공신인 박술희를 살해한 죄와 반역을 꾀한 죄 등을 물어서 왕규 일파를 제거할 때 많은 임명을 살상하여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주력했고 이때 공신(전북대 박천식교수는 3,200명이 공신이라함)이 된 인물이 많고 성종은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했지만 엄연한 국교로 자리 매김한 불교 역시 무시하지 않았고 불교와 유교를 접목시켜서 고려에 유교적 제사를 도입하여 종묘 혹 태묘라고 불리는 유교식 왕실 제사를 채택하여 안치된 군주들에게 묘호를 올리고 이때 류차달을 제외한 많은 개국공신들이 시호를 받고 종묘나 태묘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기인제도는 궁예에 이어 왕건이 실시한 호족통합정책으로 지방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개경에 머물게 하는 제도인데 문화류씨는 태조가 류차달8) 아들 류효금을 개경에 인질로 잡아 두지 않고 유주에서 6대까지 살다가 7세손 류공권이 1155년(의종 9) 국자시(國子試)에 급제하여 국자감에 입학하면서 중앙정치에 들어오게 됩니다.
※주8 류차달 : 고려 개국공신 29명중에 장군이 아닌 호족은 류차달 뿐이며 작제건과 류차달할아버지가 형제동맹(4해황제)을 맺었기에 왕건을 계속 도와 주었고 고려 개국후에는 유주로 낙향하였기에 류차달 가문에는 기인제도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고려 개국후 3개월만에 반란을 하려고 경종(景琮)이 조카를 청주로 내려 보내고 공직(매곡성주)이 자기 아들을 경종에게 대려 오라고 한 것을 염상(3등 개국공신)에 발각되어 경종은 9월15일 처형되고 공직은 견훤에게 도망간 것처럼 다른 지방호족은 아들을 개경에 머물게 했습니다.
고려 개국공신중에 김선궁은 정종때 대승에 추증되고 성종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김선평 이도 함규 김선궁 홍규 김훤술 윤신달 권행이 太師, 三重大匡, 侍中에 추증되고 시호를 받아 태조묘 안동 삼태사묘에 모시는데 류차달은 시호도 관직 추증도 없었습니다.
6. 남도일보(2018년 10월 15일) 전라도 1000년, 고려건국 1100년 기념 <고려건국과 전남의 해양세력> 학술회의 자료(류차달 관련 부분만 발췌함)
◎ 장소 : 목포대학교
○ 토론진행 황상석 조선대초빙교수(장보고글로벌재단)(토론자 강봉룡외)
○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도서문화연구원장)
왕건은 견훤이 포괄하지 못한 서남해지역을 장악하고 그 위세를 몰아 918년에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했다. 후백제의 건국과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전남의 해양세력이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서남해지역은 나말여초에 ‘신문명 3종 세트 선종*1), 차, 청자의 유입 관문으로서의 나주 회진포, 흑산도를 경유하는 한중해로의 발착항구로 기능한 영암 상대포*2), 흑산도 읍동포구 등은 고려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다.
○ 고경석 해군사관학교 교수
장보고가 청해진이 완도 면적을 고려할 때 1만 명의 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청해진의 관할 구역을 신라의 모든 해상*3)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서남해 해상세력을 제압한 청해진 세력이 어량(魚梁)과 염분(鹽盆), 목장과 우마(牛馬) 까지 장악했다.
○ 김갑동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전남 출신으로 궁예 통치 시절에 羅聰禮*4)는 왕건과 결탁하여 나주가 궁예에게 귀속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영암 출신의 최지몽*5)은 왕건의 사부 역할을 하였다.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 대에는 왕규*6)의 모반을 미리 예견하여 혜종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였다. 혜종은 무인이었던 박술희의 보필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전남 지역의 인물들이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왕건 집안이 해상세력으로 일찍부터 전남 지역과 연결*7)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김명진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왕건이 나주 서남해를 공략함에 가장 강력한 견제 세력은 견훤의 후백제 이외에 독자세력인 압해도 능창이었다.
912년에 능창은 갈초도(전남 영광군*8) 군남면 육창마을)에 있는 소적(小賊)과도 서로 연결하며 왕건을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첩보망을 늘여 놓은(종첩縱諜) 왕건의 술책에 능창은 자신의 이동로를 들키어 사로잡혔다.
○ 문안식(동아시아역사문화연구소)
청해진이 혁파된 이후 전남의 연안지역은 군소 해상세력들 중심에 오다련과 능창*9) 등 순천만과 광양만 등에 박영규와 김총으로 상징되는 해상세력이 존재하였다.
※주 1-9는 필자가 독자 애해를 돕기 위해 각주를 답니다.
※주*1 선종 : 신라는 교리중심 불교였으나 신흥호족들은 선법(禪法)을 중시한 선종(조계종계통)을 선호하여 류차달 선대 분들이 흥률사에 모였고 류차달도 선종인 흥률사에 가게 됩니다.
※주*2 영암 상대포 : 당시 신라 국제 무역항
※주*3 신라의 모든 해상 : 황해도 경기 충청 전남 해양 호족세력 관리 등
※주*4 나총례 : 903년 왕건에게 나주 성문을 열어준 금성 태수
※주*5 최지몽 : 영암해상호족으로 청해진 해산후 패서지역 왕건 책사 됨
※주*6 왕규 : 태조의 제15·16비(妃) 아버지로 외손 광주원군을 왕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실폐하고 혜종(나주 장화왕후 아들)의 이복동생 定宗은 왕식렴과 결탁하여 왕위를 노렸습니다.
※주*7 전남지역과 연결 : 청해진 해산이후 영암세력들이 정주이 이주하여 정주세력과 연결되어 왕건의 서남해안 전투에 지원합니다.(김인창박사 글)
※주*8 영광 : 영광 왕건 지지 호족에 전종회가 있습니다.
※주*9 오다련과 능창 : 나총례 오다련은 왕건을 지원하지만 능창 박영규 김총은 견훤을 지지하다가 능창은 왕건에게 잡히고 박영규 김총은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후 왕건을 지지합니다.
7. 결론
광주 대동사는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과 903년부터 역사적인 나주해전과 관련 있는 나주 본량에 있습니다.
① 훙률사 사해황제에 대한 서남해안 군현 자료
왕건 아버지 용륭(?~897년)이 도선국사(827~898년)말을 듣고 왕륭이라 성씨를 고치고 왕건(877년~943년)이 태어나는데 도선국사가 24살때 청해진이 해체되었기에 용륭과 도선국사 나이를 비슷하게 보면 용륭아버지 작제건이 한창 무역을 할때 해적으로부터 보호세력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삼한(사해, 온세상)의 모든 해상무역상이 모여서 스스로 해적으로 부터 보호할 세력이 4해황제 모임이 됩니다.
장보고 친구인 정연이 서남해를 보호해주었기에 완도 청산도 당집에 위패를 모시게 되었고 일부세력(최지몽 등)들은 정주지역으로 가서 활동합니다.
작제건 류차달 등이 주도했던 四海皇帝들의 세력들이 함께 활동하다가 892년 견훤과 901년 궁예에 의해 견훤 휘하에 들어간 4해황제세력들이 견훤에 협력하지 않고 그렇다고 궁예도 아닌 4해황제 손자인 왕건에게 협력하게 된 배경인 당시 서남해안 군현 현황입니다.
㉠ 영암
영암은 757년 영암군으로 개칭되고 고려초 행정구역은 완도청해진 보길도 추자도 진도 해남일부지역(삼산 옥천 화원 북평 송지) 등 이었고 나주였던 시종과 금정 신북일부지역(모산,이목동 등)이 1914년 영암군으로 편입됩니다.
㉡ 진도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무안군 영현으로 진도현이었는데 고려 태조 23년(940년) 나주에 소속시켰습니다.
고려 원종 12년(1271년)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토벌함에 진도가 함락되어 주민 대부분 몽고로 잡혀가고 진도는 빈터가 되었는데 충정왕 2년(1350년) 왜구의 침입으로 모든 주민이 내륙9-1)인 월악(현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 명산(현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과 금산(현 해남군 삼산면)으로 피난을 하여 80년간 진도에 행정기관을 설치하지 아니하였습니다.
㉢ 완도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청해진을 설치하고 851년 청해진 파진하여 청해진 군대와 주민들을 벽골군(지금의 전북 김제)으로 강제 이주9-2)시켰는데 장보고가 23년간 청해진에서 해적으로부터 해상세력을 보호 했습니다.
삼별초는 진도 이외에 완도 법화사지는 삼별초 항쟁의 중심지이기에 고려 원종12년(1271년) 삼별초난 때 송징장군 입도했고 81년후 공민왕 원년(1352년)주민 입주 허용했으며 청해진은 영암군 이었으나 고종33년(1896년) 대한제국 칙령 제13호에 의거 영암 해남 강진 장흥에 속한 유인도75개 무인도135개를 통합 19면으로 완도군 설군됩니다.
㉣ 완도 장보고
마을주민이나 민속학자들은 1980년대 초반까지 작은 섬 주인으로 ‘송징’ ‘송장군’ ‘송대장군’을 꼽았습니다.
송징은 고려 삼별초군과 함께 완도로 들어와 조운선을 털어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집니다. 완도읍을 비롯 죽청리 정도리 등에서는 송장군을 마을신으로 모십니다.
청해진 당집의 가운데에는 주신에 송징(宋徵)장군 우측은 정년(鄭年)장군 좌측은 혜일대사가 배향되어 있습니다.
장도에서는 송징이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장보고는 배향 대상이 아니였다가 1982년에 배향9-3)의 대상으로 추가되었습니다. 장도 지역에서는 장보고 아닌 송징이 주 배향 대상이었습니다
장좌리 당제의 문헌상 기원은 성종 6년(1530년)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사묘(祀廟)조에 등장하는 호국신사(護國神祀)이며 음역 1월 15일 제사를 지내며 청해진유적(사적 제308호, 속칭 장도)의 당집에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관리 운영되고 있습니다.
※주9-1.2.3 : 김인창박사의 “덕진포 해전”글에서 청해진 해산이후 만명의 군대와 주민을 김제로 이주 시키지만 장보고 세력중에 일부는 김제로 가지않고 영암으로 돌아와 완도지역을 지키고(청해진 당집에 정연장군 위패를 모신 것) 다른 세력(최지몽 등)은 정주지역을 가서 이들이 서로 해상인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준(청해진이 영암 땅) 보이지 않는 단결된 림이 1350년 충정왕이 진도를 떠나라고 할때 영암(해남 삼산도 영암땅임) 호족들이 진도민(유림)을 받아들입니다.
해안세력들이 형제 관계가 된 것은 청해진이 해산되자 신라인들은 장보고를 암살한 조정을 믿을 수 없어 신라를 경유하지 않고 당과 일본에 직접적인 교류에 하려니 해적으로 부터 보호할 장치로 805년 흥률사에서 온세상(4해) 형제들이 모여 4해형제동맹을 맺고 100년후 나주해전에 이들 후손인 왕건을 돕게되고 왕건이 태조가 된후 “사해황제”라 합니다.
㉤ 무안 신안
신라 경덕왕 16년(757) 무안군이었고 고려 혜종원년(944)에 물량군, 성종 10년(991)에 나주목의 무안군, 명종 2년(1171)에 나주목 무안현입니다.
목포는 무안현이며 통일신라시대 압해군(壓海郡)에 갈도현(碣島縣,영광군남), 안파현(安波縣,장산도), 염해현(鹽海縣,임자도)를 두었으나 고려시대 나주목(羅州牧)에 장산현(長山縣) 육창현(六昌縣,영광군남),임치현(臨淄縣,무안),압해현(壓海縣)을 두었습니다.
㉥ 대원군 때 나주
규장각 소장 『나주군읍지』(1899년, 奎 10781)에 수록된 1872년 군현지도(규10483,나주지도)에 의하면 羅州牧은 지금의 나주 시내를 포함하여 나주시 공산면 노안면 다시면 동강면 문평면 반남면 세지면 비읍면 왕곡면과 영암군 금정면과 시종면북부 신안군 지도읍 압해면 자은면 암태면 안좌면 비금면 흑산면 도초면 장산면 장성군 대화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면 평동면 무안군 삼향면 일대에 해당하는 고을이었습니다.
② 왕건과 나주와 관련 있는 금성나씨 나총례, 황주최씨 최지몽, 나주오씨 오다련, 광산김씨 김길(三重大匡) 영광전씨 전종회 순천 박영규 등
③ 류차달과 함께 왕건에게 군수품을 지원했던 전의이씨 이도, 양천허씨 허선문
④ 류차달과 활동했던 고려 개국공신 부계홍씨 홍유, 경주배씨 배현경, 평산신씨 신숭겸, 면천복씨 복지겸 안동권씨 권행, 안동김씨 김선평, 홍주홍씨 홍규, 인동장씨 장정필, 파평윤씨 윤신달, 면천박씨 박술희, 선산김씨 김선궁, 해평김씨 김훤술 등을 대동사에서 만나 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⑤ 위 글이 허구나 과장되었다면 흥률사 상량문과 해전사 연구학자 임원빈박사와 왕건의 덕진포해전을 발표한 김인청박사, 왕건의 서남해안 연구한 김명진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와 목포대 강봉룡 한정훈교수와 김병인 전남대 사학과 교수 연구자료를 부정한 것입니다.
제가 1960년대 할아버지로부터 문화류씨와 영암 사람들이 왕건을 많이 도와 주었다는 말을 듣고 1990년대 전대 교수와 향토사학자들이 학술대회에서 할아버지와 똑 같은 말을 들었으나 당사 그 교수님 이름을 기록해 놓지 않아 제가 헛소리한다고 오해를 받아도 반박할 증거가 없었는데 이번에 영암문화원홈페이지에 김인창박사가 청해진 해산후 영암사람들이 정주로 가서 패서호족과 연결되고 그들 손자대에 와서 왕건의 서남해안전투에서 정주로 간 최지몽 등과 영암해안세력들이 협조했다는 글이 있고 임원빈박사가 903년 나주해전에서 궁예수군은 예성강지역 해상호족들이 家兵을 나주어 왕건 수군으로 동원해주었다는 글이 있어 지금까지 대승공 탐구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탐구하고 자료를 분석하여 알아낸 내용을 여러 종원과 공유하고자 하는 것인데 저의 글을 읽고 새로운 내용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고 그 내용을 여러 종원에게 알렸으면 하는 희망이고 잘 못된 내용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며 보통 제가 어느 부분을 탐구하면 SNS상에 올려 검증을 받고 보완하여 2~3년후에 유주춘추에 투고 합니다.
저와 자주 만나 토론한 일부 종원이 제가 어떤 칭찬을 바라지 않는데 류재균은 많이 알고 있는데 인터넷에 다 있는 것을 읽고 아는 척한다고 칭찬하는 것 같지만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인격적 무시라 하는 것은 2000년초까지는 어떤 선조 문제를 탐구하려면 도서관에 책이 없으면 서점에서 신간도서를 사고 비석이나 현판에 초서로 된 한자를 해석하기 위해 옥편을 며칠 씩 보고 안되면 한학자를 찾아 갔는데 지금은 고전 자료는 도서관에 가지만 대부분 도서는 인터넷에서 보는데(한자도 인터넷 옥편으로 찾음) 인터넷자료는 오류가 많아 반드시 검증을 해야하는 노력이 필수이기에 인격적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조에서 규장각에 근무한 관리가 아니면 삼정승도 많은 자료를 찾아 볼 수 없는데 2020년대는 세종이나 정조보다 더 많은 책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세상인데 이런 시대 변화를 모르고 인터넷에 있다고 본인이 알고자 하는 영역을 다 보기 위해서는 도서관 대신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유주춘추에 원고를 투고할 때는 ⑤이런 부분은 삭제합니다).
첫댓글 글 한편을 쓰기위해 몇달씩 또는 몇년씩 자료를 수집하여 글을 쓰고 교정보고 한참 후에 수정하고 보완하고 쓰는데 읽는 사람 중에 노인들(나도 꼰대 늙은이 이지만) 읽고 무엇인가 말을 해야 자기 인격이 올라가는 줄 알고 말하자니 내용을 잘 몰라서 주제와 관련 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늙으면 말을 줄이라고 하는데 할 말은 없으니 재균이는 각주도 달줄 모른다(카페, 밴드, 페북 등은 각주기능이 없는데 그걸 모로고 한말) 초등교장 출신들은 야무것도 모르면서 떠들고 다닌다(나를 초등학생으로 보는 것임)라고 해놓고 또 만나면 밥먹고 돌아서면 무슨 말했는지 모르는 분들이기에 마음에 상처는 받지 않지만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회의때도 보면 꼰대들은 무슨 말인가 해야 존재감이 있는줄 알고 말이 안되는 반대를 하거나 회의안건과 관련 없는 말을 하는 분들과 종사를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