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보와 기별지
‘간에 기별도 안 간다.’ ‘아직 기별 없나?’
경복궁의 근정전에 가려면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합니다. 먼저 광화문을 거친 후 흥례문을 지나고 근정문을 넘어야 하지요. 그런데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의 좌측으로 지금의 청와대 부속실 역할을 하던 궐내 각사로 이어지는데, 잘 눈여겨보면 기별청(寄別廳)이라는 현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장소에서 기별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발행하던 신문은 ‘조보’입니다. 조보는 한자로 <朝報> 즉, 조정의 소식을 말합니다. 이 신문은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승정원에서 관장하는데, 그 날의 주요 소식들을 묶어 서울 및 지방 관청에 배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보를 제작하던 곳이 기별청으로, 거의 필사에 의존하였으며 필사는 기별청 소속의 기별서리가 맡았습니다. 제작 업무를 기별청에서 맡다보니 조보를 그냥 <기별지> 라고도 불렀답니다.
완성된 조보를 서울 사람들은 지금의 조간신문처럼 당일 아침에 볼 수가 있었지만, 지방의 경우는 5~10일 치 또는 한 달의 분량을 묶어서 받아 보게 됩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지방에서 나랏일을 한 눈에 알려면 기별청에서 발송하는 조보를 기다려야 했기에, 도착이 늦어지거나 하면 “ 기별청에서 왜 소식이 없지?”라는 말을 쓰다가 나중에는 “왜 기별이 없지?”로 축약되었습니다. 그래서 ‘왜 소식이 없지’와 ‘왜 기별이 없지’가 혼용되다가 어느 때 부턴가 소식의 동의어가 기별로 굳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간에 기별도 안 간다.’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먹을 음식의 양이 너무 적거나, 먹고 나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할 때 불만스럽게 뱉는 말인데, 여기서의 기별은 소식보다는 느낌 혹은 만족의 뉘앙스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기별지 <조보>는 순 한문체로 내용은 주로 왕의 명령과 지시, 조정의 주요결정사항, 관리 임명이었으며, 충효나 정절 등에 관한 사건도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이었던 유교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강화하는 기능도 담당했습니다. 그밖에 자연재해나 농사에 관한 정보도 알렸는데 이러한 점에서 보면 조보는 오늘날의 신문과 기능면에서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독자가 중앙 및 지방 관리로 한정되어 완벽한 언론지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정보에 대한 욕구는 시대고금을 막론하고 있기 마련이어서 비밀리에 조보를 훔쳐서 복사하여 파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급기야 선조 때 일은 터지고 맙니다. 불법으로 조보를 팔고 사는 행위를 국가기밀 누설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가서 많은 이들이 처벌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 동안 판매가 주춤하였지만 그럴수록 조보의 가치는 높아져 완전히 근절되진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의 전근대적인 신문 조보가 차라리 백성 모두에게 전파되어 근대화를 앞당기는 매체로 작용 했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지만, 정보가 넘치는 오늘날 ‘기별 없나?’ 하면서 기다리게 되는 신문은 과연 얼마나 될까하는 반문도 들게 되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