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새로운 지폐 시안을 발표하다
작년 10월 7일 노르웨이 중앙은행(Norges Bank)은 자국의 새로운 지폐 시안을 발표했다. 유럽의 북방 한계선인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노르웨이는 스위스, 리히센슈타인 등과 함께 유럽연합(EU)에 속하지 않은 국가인 까닭에 유로화가 아닌 자국의 화폐 단위인 크로네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으로 진행한 지폐 리뉴얼이 지난 2001년일 정도로 오래된 터라, 보안상의 위험에 미리 대처하고자 새로운 지폐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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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인 2001년 발행한 1,000크로네. 앞면 초상의 주인공은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이며, 뒷면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태양(The Sun)’이 도식화되어 담겼다. ©Norges Bank |
2017년 발행 예정인 새로운 지폐의 시안은 작년 초 총 여덟 팀의 디자인 회사를 대상으로 초청 형식으로 치른 공모전을 통해 선정되었다. 노르웨이 중앙은행이 밝힌 대로 화폐로서 갖추어야 할 안전장치, 즉 훼손과 위조, 변조를 방지하기 위한 요소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지폐 디자인의 변형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쨌든 노르웨이의 새로운 지폐는 발표 직후 노르웨이 현지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대체 이 지폐의 무엇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긴 것일까.
바다, 노르웨이의 정체성
화폐는 단순히 돈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국기 다음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제2의 얼굴’이란 말처럼 국가의 정체성 표현에 탁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해당 국가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위인, 유적, 자연경관, 동식물 등을 등장시키곤 한다. 이번 노르웨이의 새로운 지폐 주제는 바로 바다(the sea)였다.
피오르(fjord) 해안으로 잘 알려진 노르웨이는 유럽에서 해안선이 가장 긴 국가로 꼽힌다. 그 길이가 무려 8만 3천km에 달할 정도다. 노르웨이 경제에서 바다와 관련된 수산업과 유전 산업은 국가의 기간 산업으로 간주된다. 주거 지역 또한 해안에 밀접해 있어 대부분의 노르웨이인에게 바다란 옛 바이킹 시절부터 익숙한 공간이다. 즉 그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국민의 삶 깊숙이 들어온 바다는 노르웨이라는 국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셈이다.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디자인
노르웨이 중앙은행은 공모전 결과를 발표하며 복수의 회사를 지목했다. 즉 지폐의 앞면과 뒷면의 디자인이 각각 다른 회사의 작업이다. 앞면은 ‘메트릭 시스템(The Metric System)’의 ‘노르웨이인의 삶의 공간(Norwegian Living Space)’이 선정됐고, 뒷면은 ‘스뇌헤타(Snøhetta)’의 ‘경계의 아름다움(Beauty of Boundaries)’이 차지했다.
등대, 배 등 노르웨이인과 바다와의 공간적인 접점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한 메트릭 시스템의 작업은 노르웨이 중앙은행으로부터 “지폐에 필요한 보안 요소를 담기에 적합하며, 동시에 개방적이고 밝은 노르딕 문화의 전형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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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 앞면에는 특정 모티프와 해양 알파벳을 나타내는 깃발이 있다. 알파벳의 합은 노르웨이(NORGE)다. ©Norges Ba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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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크로네 앞면: 노르웨이 서쪽 끝인 송노피오라네 주에 있는 우트베르(Utvær) 등대. 깃발 속 해양 알파벳은 R이다.
• 100크로네 앞면: 9세기 바이킹이 타던 곡스타드 선(The Gokstad ship)의 모습. 깃발 속 해양 알파벳은 O다. <X-BOW?형 선체, 디자인 소유권자: 울스테인 디자인 & 솔루션스(Ulstein Design & Solutions AS)>
• 200크로네 앞면: 노르웨이에서 잡히는 대구와 청어. 깃발 속 해양 알파벳은 N이다.
• 500크로네 앞면: 콜린 아처(Colin Archer)가 고안한 구명정. 깃발 속 해양 알파벳은 G다. <보트 디자인: 콜린 아처, 사진: 안데르스 베르 빌세(Anders Beer Wilse), 린 크로그 한센(Linn Krogh Hansen)>
• 1,000크로네 앞면: 바다의 거센 파도 풍경. 깃발 속 해양 알파벳은 E다.
그와 달리 스뇌헤타는 지폐에 ‘픽셀 디자인’을 도입하며 파격이란 말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지폐 디자인의 공식을 깬 전무후무한 예를 선보였다. 막대 모양의 픽셀들은 각자에 부여된 색으로 마치 오래된 컴퓨터 프로그램이 만든 것 같은 그라데이션 효과를 자아내며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추상적인 모습을 추구한다. 노르웨이 중앙은행은 이에 “전통과 현대적인 표현을 동시에 성취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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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크로네의 뒷면에는 영감이 된 모티프와 함께 풍속에 따른 파도의 세기가 패턴으로 표현되어 있다. ©Norges Bank |
[이미지 상세 설명]
• 50크로네 뒷면: 지평선 위의 등대. 초속 1.6m의 가벼운 산들바람은 순한 파도를 만든다.
• 100크로네 뒷면: 화물선. 초속 3.4m의 순한 산들바람은 물마루를 만들 준비를 한다.
• 200크로네 뒷면: 고기잡이배. 초속 8m의 싱그러운 바람이 만든 파도의 높이는 1m 이상이다.
• 500크로네 뒷면: 석유 시추기. 초속 13.9m의 폭풍 속에서 파도는 하얀색 포말을 뱉어내며 깨져 바다를 쌓아올린다.
• 1,000크로네 뒷면: 수평선. 초속 20.8m의 강력한 돌풍이 높은 파고를 부르고 짙은 풍광은 바람의 방향조차 잊게 한다.
이성적인 시나리오가 만든 바다 풍경
스뇌헤타의 지폐 디자인에서 중요한 것이 단순히 ‘픽셀’을 사용한 참신한 표현 기법만은 아니다. 작업의 방점은 부드러움과 단단함,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접합해 역동하는 바다를 표현한 이성적인 시나리오 구축에 있다. 각 지폐는 픽셀 모티프와 큐빅 패턴, 그리고 오가닉 패턴의 조합으로 자신만의 스토리를 가진다. 가장 작은 단위인 50크로네와 가장 큰 단위인 1,000크로네를 비교하면 이해가 훨씬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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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크로네, 100크로네의 뒷면©Norges Bank |
50크로네를 구성하는 픽셀은 ‘지평선 위의 등대’에서, 1,000크로네는 ‘지평선 그 자체’에서 형태의 모티프를 가져왔다. 여기서 재미있는 구석은 각 픽셀의 비율이 지폐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50크로네는 픽셀은 가로 세로의 비율이 비슷하고, 1,000크로네는 가로의 비율이 세로보다 월등히 크다. 그 이유는 바로 풍속 때문이다.
전자는 초속 1.6m의 가벼운 숨결 같은 바람이 부는 바다를 상정한바, 모티프인 등대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뚜렷이 보이고 색감도 다양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초속 20.8m의 강력한 돌풍 때문에 주변 풍경을 인지하기가 쉽지 않고 그 색감도 어두워진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더 극적으로 전해주는 요소는 픽셀 위를 끊임없이 채우는 물결 패턴이다. 50크로네는 물결이 잔잔하고 천천히 반복되는 반면 1,000크로네는 촘촘하고 출렁거리는 물결이 그림 전체를 지배한다. 이렇게 이성적인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바다의 여러 모습은 궁극적으로 긴장과 삶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으로서 노르웨이의 바다를 이야기한다.
실제 50, 100, 200, 500, 1,000크로네까지 총 5종의 지폐 뒷면을 가로로 길게 이어놓으면, 마치 디지털 기술로 바다의 지평선을 구현한 추상화처럼 보인다. 이런 스뇌헤타의 접근법은 실제 화폐 제작 과정에서 변형이 일어난다 해도 그 성취의 의의가 쉽사리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5종의 화폐 뒷면을 모두 이은 모습. 마치 노르웨이의 바다를 함축한 추상화 같다
세계 여러 나라의 화폐들은 액면가에 따라 각 화폐별로 서로 다른 디자인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액면가에 관계 없이 전부 동일한 디자인을 사용하는 나라도 있다. 영연방 제국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을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는 똑같은 고인돌 그림을 액면별로 색상만 바꿔 사용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을 사용하고 있는 영연방 제국 화폐
똑같은 고인돌 그림을 색깔만 바꿔 사용한 짐바브웨 화폐
지폐의 규격은 크게 일정 규격형, 차등형, 세로 고정형 등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액면금액에 따라 규격이 다르지만, 북남미 국가에선 지폐의 전 액면이 동일 규격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많다. 미국의 화폐들은 모든 권종의 크기와 도안, 색상을 동일하게 사용하며 지폐에 들어가는 인물 초상만 달리하고 있다.
외국 지폐의 유형은 크게 유럽형과 미국형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유럽형은 액면에 따라 크기가 다르며, 고액권일수록 커지는 경향이 있다. 또한 요판다색(凹版多色) 인쇄에 숨은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지폐의 테두리가 없으며, 인물 초상이 크고 화려한 게 특징이다. 서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여러 나라의 지폐가 이 유형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미국형은 액면에 관계없이 크기가 대부분 동일하며 바탕무늬가 없고, 요판단색으로 인쇄한다. 테두리와 숨은 그림이 없으며, 인물 초상이 작고 수수한 것이 특징이다. 주로 북미, 중남미 국가들의 지폐가 여기에 해당한다
인물 초상이 작고 수수한 미국 달러화
한편 옛 사회주의 국가의 화폐들은 대부분 국가 휘장, 정치 지도자와 노동자들의 초상, 선동적인 테마들이 많이 사용되어 자본주의 국가의 지폐들과 디자인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꽃파는 처녀, 각 계층의 인물상, 천리마 동상, 노동자상과 김일성 초상, 김일성 생가 등을 나타낸 북한의 화폐를 비롯하여 레닌의 초상이 들어간 구소련의 화폐와 모택동의 초상, 한복을 입은 조선족 그림이 들어간 중국 화폐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복을 입은 조선족 그림이 들어간 중국의 화폐
지폐가 최초로 발행될 당시에는 화폐로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형 지폐가 많이 만들어졌으나, 오늘날에는 취급상의 편의를 고려해 점차 축소되고 있는 경향이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1950년대를 전후해 기능적인 측면이 강한 고전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조형성과 실용성이 강조된 현대적인 감각으로 바뀌고 있다. 디자인 선진국인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화폐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식하여 이탈리아, 헝가리, 벨기에, 노르웨이 등에서는 화폐 디자이너와 이를 요판에 새긴 조각가의 사인을 화폐에 넣어주기도 하고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는 디자인에 대한 발행기관의 지적 소유권을 표시하기도 한다.
화폐 도안은 인물, 신(神), 동식물, 문화유산 등 다양한 소재가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인물은 주제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국왕이나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의 초상에서 점차 예술가, 과학자 등으로 바뀌고 있다. 이들 화폐의 초상은 외국의 경우 대부분 생존 인물은 채택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으나, 우리의 경우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생전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위로부터 프랑스, 스위스, 노르웨이의 지폐각각 왼쪽이 구화폐이고 그 옆이 신화폐로, 크기는 작아지고 모양은 화려해졌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나비, 원숭이, 새, 해바라기 등과 같은 다양한 동식물이 등장하고 있다. 일부 나라에서는 개구리, 뱀, 나방까지도 모델로 채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주제들은 한편으로 각 나라의 특성을 대표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꽃의 나라로 알려진 네덜란드에서는 해바라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꽃을, 고대 서양 문명의 시조인 그리스에서는 아테네 상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코끼리 등을 화폐에 등장시켜 그 나라만의 독특함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색상에 있어서도 단색과 어두운 색상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색상에서부터 밝고 경쾌한 색상까지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위로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덴마크, 네덜란드, 그리스 지폐화폐 도안의 소재가 다양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1960~70년대까지 남대문, 독립문, 첨성대 등의 문화재가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1980년대 이후 인물상으로 대치되었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검소하고 단순한 미국형보다는 인물상의 크기가 크고 화려한 유럽형으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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