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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正光) 5년 봄, 북변의 군진 가운데 하나인 옥야진(沃野鎭)에서 병사들이 진장(鎭將)을 살해하고 봉기하였다. 북위 왕조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이들의 반란은 곧 장성 지대의 다른 군진들로 확산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 ㉠ )의 시작이다. 반란 지역출신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이후 서위, 북주, 수, 당 등 네 왕조의 ㉡지배 집단을 형성하였다. |
<해설>
㉠ 사건 : 6진의 난
㉠ 배경 : 호 ‧ 한간의 결혼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胡姓을 漢姓으로 바꾸고, 胡俗과 胡語의 금지와 漢語의 강요, 그리고 華夷일원화를 위한 姓族分定令(성족분정령) 제정
㉡ 용어 : 관롱집단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145쪽>
효문제의 문벌주의와 漢化정책은 북조 권력을 지탱해 주던 병사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519년 우림‧호분의 병사 약 1천여 명이 수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우림과 호분은 평성에서 낙양으로 이주한 선비족의 자손에서 선발된 정예군이었는데, 문관에 비해 불리한 승진 때문에 불만을 품고 봉기한 것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524년에 북변의 육진 중 옥야진의 병사 파락 한발릉이 주장을 살해하고 봉기하자 반란은 북변 전체로 확대되었다. 육진이란 북위 초 평성을 몽골고원의 고차족과 유연족으로 부터 방위하기 위해 둔 것인데, 처음에는 선비족의 명문출신과 귀부한 한족 호족의 자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 그들에 대한 대우가 열악해져 중앙에서 파견된 진장들에게 천시되고 사역되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이 불만이 폭발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효문제 시기의 여러 정책에 대한 반발적 성격도 있었다. 이때 육진의 군대를 격파하고 등장한 인물이 산서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갈족의 추장 이주영이었다.
<동양사개론 255쪽>
효문제의 漢化정책 중 중요한 내용을 보면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호 ‧ 한간의 결혼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胡姓을 漢姓으로 바꾸고, 胡俗과 胡語의 금지와 漢語의 강요, 그리고 華夷일원화를 위한 姓族分定令(성족분정령) 제정을 들 수가 있다. 효문제의 한화정책으로 선비족의 상류계층은 점차 한인호족과 혼거하면서 귀족화하였다. 그리하여 토지를 겸병하고 한인 농민을 소작인으로 사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효문제의 한화정책은 선비부족사회에 심각한 문제와 갈등을 불러 일으켜 북위정권이 동서로 분열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긴 것은 바로 선비부족의 근거지를 유목지대에서 농경사회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나 수도를 옮겼다고 해서 선비족 모두가 화북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고, 선비부족의 대부분은 만리장성 연변에 남아서 효문제의 낙양정권과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화북으로 이주한 선비족은 점차 귀족화하면서 관직을 독점하였다. 이리하여 낙양으로 옮겨와서 한화된 선비족과 그렇지 못한 북방의 선비족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이리한 갈등은 다음 효명제 때에 6진의 반란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160쪽 날개>
중국학자 진인각은 지역적으로 관(섬서성)·롱(감숙성) 일대의 선비족 및 그들과 결합한 한족지배층을 관롱집단이라 불렀다. 이들은 호족적 색채가 강한 혼혈 출신으로 상호 통혼을 통해 강한 결속력을 유지했고, 서위·북주·수·당의 지배층을 이루었다.
<아틀라스 중국사 61쪽>
서위 이래 관롱 지역의 호한 영웅 중 무력과 재지를 갖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북주, 수, 당의 황실 및 창업 공신도 관롱집단의 핵심인 팔주국의 후예들이었다. 북주를 일으킨 우문태와 당 고조 이연의 조부 이호는 팔주국의 한 사람이고, 수 문제 양견의 아버지인 양충은 십이대장군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팔주국의 한 사람인 독고신을 중심으로 혼인 집단을 형성하였으니 독고신의 장녀는 북주 명제의 황후, 4녀는 당 고조의 어머니, 7녀는 수 문제의 황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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