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일기 ▣
- 이해인-
잎새와의 이별에
나무들은 저마다
가슴이 아프구나
가을의 시작부터
시로 물든 내 마음
바라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에
조용히 흔들리는 마음이
너를 향한 그림움인 것을
가을을 보내며
비로소 아는구나
곁에 없어도
늘 함께 있는 너에게
가을 내내
단풍 위에 썼던
고운 편지들이
한잎한잎 떨어지고 있구나
지상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
붉게 물들었던 아픔들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려
새로운 별로 솟아오르는 기쁨을
나는 어느새
기다리고 있구나
▣ 가을 편지 ▣
-이해인-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 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 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2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3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 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 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5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읍니다.
사과씨만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읍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6
기쁠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 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 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8
빛 바랜 시집, 책 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 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 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 가을바람 편지 ▣
-이해인-
꽃밭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코스모스 빛깔입니다.
코스모스를 노래의 후렴처럼 읊조리며
바람은 내게 와서 말합니다.
나는 모든 꽃을 흔드는 바람이에요.
당신도 꽃처럼 아름답게 흔들려 보세요.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믿음과 사랑의 길에서
나는 흔들리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면서 살아온 것 같네요.
종종 흔들리기는 하되
쉽게 쓰러지지만 않으면 되는데 말이지요.
아름다운 것들에
깊이 감동할 줄 알고
일상의 작은 것들에도
깊이 감사할 줄 알고
아픈 사람 슬픈 사람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많이 울 줄도 알고
그렇게 순하게 아름답게 흔들리면서
이 가을을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