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육 여사 지시에 따라 앵벌이 소년 따라 굴속을 기어 들어가보니
입력 : 2014.08.21 09:50
1973년 12월 24일 성탄전야였다. 평소 일체 경호를 하지 못하게 했던 영부인께서는 그날도 나만을 데리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쓸쓸하게 지낼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영등포 근로자 합숙소였다. 그 당시 서울에는 영등포 합숙소와 남대문 합숙소, 동대문 합숙소 등 근로자 합숙소가 3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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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동대문구내의 근로자합숙소를 찾은 육영수 여사가 근로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육 여사는 명절 때나 연말이면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았으며 근로자들도 그런 육 여사를 매우 반갑게 맞이했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막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근로자들과 육 여사는 난로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근로자들의 애로사항, 정부에 대한 요망 등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고시 공부를 하다가 시험에 실패해 날품을 팔고 있다는 손근숙(가명)이라는 청년이 정부 시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불만을 털어놓았다. 태도가 매우 도전적이었으며 자포자기에 가까운 언행이었다. 새마을운동은 길만 넓힌다고 되느냐, 공무원의 부패는 얼마나 심한지 아느냐 등 육영수 여사로서는 답변하기 곤란한 문제들을 집요하게 들고 나왔다. 특히 서울시 민원창구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불친절을 사정없이 규탄했다. 사명감과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을 민원창구에 배치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육 여사께서는 끝까지 웃으면서 그의 불평을 들어주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영부인께서 집으로 전화를 해왔다. 지금 곧 합숙소 세 군데를 들러서 손 청년을 포함해 근로자 몇 사람을 청와대로 데리고 오라는 말씀이었다. 각 합숙소에서 3명씩을 골라서 9명을 데리고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양택식 서울시장이 접견실에 들어와 있었다. 영부인께서 그를 부른 것이었다.
영부인은 준비한 만둣국을 일행에게 대접하면서 어젯밤 손 청년이 한 이야기를 양 시장에게 했다. 그리고는 “이 청년에게 맡겨볼 만한 일자리가 없을까요?” 하고 의견을 물었다. 영부인의 뜻은 단순히 취직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불만으로 가득 찬 그에게 민원창구 공무원들의 고충과 애로를 직접 경험토록 해 줄 기회가 없겠느냐는 뜻이었다.
양 시장은 손 청년을 다음날 서울시장실로 불러서 본인이 희망한다면 그를 임시직으로 채용할 용의가 있음을 일러주었다.
1974년 1월 4일자로 손근숙 청년은 임시직으로 채용되어 관악구청 민원봉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민원창구에 앉은 그는 자신이 주장한 대로 열과 성을 다해 일을 했다. 그러나 그가 밖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말단 공직자의 생활이 너무 달랐다. 박봉에 힘겹고 고달팠던 것이다.
얼마 후 그는 결국 사표를 내고 관악구청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의 손 청년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혹시 고시에 합격해 희망하던 고위공직자의 길을 갔는지 이 글을 쓰면서 매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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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 방문을 간 육영수 여사.
청와대에 온 ‘앵벌이’ 소년1973년 2월, 늦겨울 추위가 예사롭지 않던 어느 날 경기여고를 다니던 박 대통령 둘째딸 근영양이 하굣길에 광화문 부근 육교 위에서 윗옷을 입지 않은 채 엎드려 구걸하는 속칭 ‘앵벌이’ 소년을 보았다. 근영양은 청와대로 돌아와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육 여사는 비서실 직원을 시켜 급히 그 소년을 청와대에 데리고 오도록 했다. 10세 정도의 부랑아였다.
영부인은 그 소년이 입을 옷을 사오도록 하고 따뜻한 물에 목욕을 시킨 후 새 옷을 입히고 저녁을 먹였다. 나는 그 소년이 어디서 잠을 자고 있는지 가서 보고 오라는 영부인의 지시로 그날 밤 소년을 차에 태우고 소년이 사는 곳으로 갔다.
신촌 연세대 맞은편 언덕 위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에 이르자 그 소년이 땅 밑으로 연결된 듯한 통풍구로 기어들어갔다. 으스스했지만 나도 손전등을 들고 그 소년을 따라서 좁은 통풍구로 겨우 기어들어갔다. 캄캄했다. 머리 위쪽에는 철근이 삐죽 나와 있었고 바닥은 흙바닥이었다.
소년을 따라 엉금엉금 기어서 ‘형들하고 잠자는 곳’이라는 구석까지 갔다. 가마니가 깔려 있었고 낡은 담요가 몇 장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형’들은 없었다. 모두 돈 벌러 나간 모양이었다. 콘크리트 기둥 벽에 그때 유행하던 유행가 가사 한 구절이 낙서되어 있었다. 이렇게 살면서도 노래로 시름을 달래는가, 아니면 희망을 꿈꾸는가 하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튿날 밤 형들과 함께 신촌시장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돌아왔다. ‘시립부랑아아동보호소’에라도 보내야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이튿날 약속시간에 신촌시장에 갔다. 그러나 그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보고를 받은 영부인께서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그때 안 사실이지만 부랑아들은 아동보호소에 가기를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수용되었다가도 틈만 있으면 도망간다고 했다.
⑥"과잉충성 그만해요" 아부를 싫어했던 육 여사
입력 : 2014.08.18 13:57 | 수정 : 2014.08.18 14:07
어느 날 경회루에서 육영수 여사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양지회 주최로 경로잔치가 열렸다. 코미디언 남보원씨를 비롯한 연예인 수명이 나와 노래와 코미디로 노인들을 즐겁게 했다. 악단 연주소리와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가까운 청와대까지 들렸던 모양이었다. 경호실에서 경복궁 사무실로 연락이 오기를 “각하 집무실에 노랫소리가 들리니 노래를 삼가 달라”는 것이었다. 양지회 총무 권옥순(윤주영 전 문공장관 부인) 여사가 영부인께 그 말을 전했다. 육 여사는 괜찮으니 그냥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행사를 다 마치고 나서 나는 영부인을 모시고 청와대로 돌아왔다. 현관에서 경호과장이 나와 인사를 했다. 영부인은 그에게 “거기서 연락했어요?”라고 물었다. 그가 어물어물하자 “집무실에서 뭐가 들린다고 그래요”라고 언짢게 말했다. 2층 비서실장실에서 내려오던 김성진 대변인과 마주친 영부인은 “그렇게 과잉충성하지 말아요”하는 것이 아닌가. 김 대변인은 영문도 모른 채 얼굴을 벌겋게 하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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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회루에서 육영수 여사가 베푼 경로잔치
어느 날 육영수 여사는 나에게 이런 불만을 털어놓았다.
“청와대에서 발표하는 대통령 관련 기사를 보면 ‘김정렴 비서실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수행했다’는 내용이 항상 붙어 다니는데 국민들이 읽으면 식상할 것 같아요. 대통령께서 지방에 가시면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은 으례 수행하게 되어 있는데 그 사실을 꼭 기사로 보도를 해야 되나요. 그러지 않아도 대통령 측근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지루하게 느끼겠어요.”
나는 이 말을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에게 전했다. 김 대변인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대통령 측근에서는 누구도 그 같은 문제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항상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육영수 여사의 눈에는 그것이 보인 것이다. 그 후로는 그런 식의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
대통령의 생신일박 대통령이나 영부인은 면전에서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매우 겸연쩍어 했으며, 아부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생신일이 음력으로 9월 30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음력으로 생일을 지내는 것이 국민 정서에 맞지 않아서 음력이 아닌 양력 9월 30일을 생일로 했기 때문에 그날은 국무총리가 국무위원을 대표해 화분을 들고 청와대로 올라와 축하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어느 핸가 양력 9월 30일 모 장관이 대통령께 보고를 마친 다음 시간이 늦어서 박 대통령 내외분과 청와대에서 저녁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 장관은 9월 30일이 매우 길한 날이며 이날 태어난 사람은 위인이 많다는 등 사주풀이를 하고 돌아갔다. 그날은 박 대통령의 진짜 생일이 아니었다. 이튿날 육 여사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들은 왜 그렇게 아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웃었다. 1917년 음력 9월 30일은 양력으로는 11월 14일이다. 그 얼마 후부터는 박 대통령은 양력 11월 14일을 공식 생신일로 삼았다.
육 여사는 혹 부속실 직원들이 영부인을 칭찬하는 말이라도 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속에 없는 말 하지도 말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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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회를 관람중인 육영수 여사.
교향악단 공연 취소1972년 가을 국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에 박 대통령께서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영부인께 “각하께서는 축구시합 구경만 가시고 예술 활동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다”는 음악인들의 불평을 전해 드렸더니 두 분이 상의하셔서 그해 가을 국립관현악단 정기연주회에 가시기로 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일 연주회는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가 아니라 국립합창단과 소년 합창단 등을 대거 동원한 교성곡(交聲曲)이란 이름의 대규모 합창제였다. 막이 오르자 음악연주 대신에 사회자가 대통령 업적을 칭송하는 시를 읊고 있었다. 청와대 정무비서실과 문공부 당국자들의 과잉충성이 빚어낸 사고(?)였다. 옆에서 보니 쌍안경으로 무대를 꼼꼼히 살피던 박 대통령의 눈꼬리가 올라가면서 불쾌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관람을 마치고 연주자들을 찾아가서 격려한 뒤 청와대로 돌아온 박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린이합창단은 왜 동원했느냐 그런 연주회는 당장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문공부 계획에 따르면 그 연주회는 지방순회까지 예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박 대통령의 모처럼의 교향악단 참관은 그 후 다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통령이 매년 국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를 참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부인께서 나에게 모처럼의 건의가 이렇게 돼서 안됐다는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⑤40년전 그날, 내 주머니 속의 육 여사 뼛조각
2014.08.14 10:51
1974년 8월 15일, 영부인 피격 장면을 나는 청와대 직원 관사에서 텔레비전으로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기념식 중계 실황을 시청하다가 보게 되었고, 대통령 영부인이 피격되었다는 긴급연락을 받고 곧바로 서울대학 병원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부상을 당한 영부인은 을지로6가에 있는 국립의료원을 거쳐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 옮겨져 있었다. 내가 응급실에 황급히 들어서니 경호원 한 명이 간호사를 돕기 위해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는 영부인의 두 다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경호원 대신 영부인의 버선 신은 두 발을 위로 치켜든 채 안고 서서 간호사의 응급처치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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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 총탄에 피격된 육영수 여사의 마지막 모습
머리에 총탄을 맞은 영부인은 이미 의식불명 상태에서 헉, 헉하는 불규칙적인 호흡소리를 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치명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무 놀랍고 안타까워 몇 차례 영부인을 불러보았다. 가쁜 호흡만 몰아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절박한 순간이 내가 그토록 존경하며 따르던 영부인을 마지막 보내는 임종의 순간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영부인이 응급처치를 받고 수술실로 옮겨진 직후에 광복절 기념식 행사를 모두 마친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의과대학장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뒤에는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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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통령이 허리를 굽혀 영부인 소지품을 줍는 장면
나는 그 순간의 박 대통령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핏기가 가신 검은 얼굴은 거의 샛노랗게 변해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문 무서운 얼굴이었다. 참담하고 황당한 일이 불과 몇 십분 전에 대통령 본인의 면전에서 벌어진 것이 아닌가. 박 대통령은 의사들에게 “최선을 다해주시오”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는 대통령 전용 입원실로 올라가 수술 경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체포된 저격범은 조총련에 관련된 재일교포라는 긴급보고가 박 대통령에게 올라왔다.
영부인에 대한 수술은 오래 걸렸다. 비서실 직원이 총동원돼 영부인 수혈을 위해 채혈을 했다. 나는 영부인이 끼고 있던 반지와 총상으로 떨어져 나온 이마의 뼛조각을 응급실에서 의료진으로부터 받아 시신 입관 때까지 호주머니에 보관하고 있었다. 머리에 총탄을 맞을 때 머리뼈가 부서지면서 떨어진 파편을 수습한 것이었다. 그분이 운명하는 순간, 가시는 이를 아쉬워하는 듯 내리던 비가 잠시 그치더니 병원 창밖으로 내다본 하늘이 영부인이 돌아가실 때 입으셨던 황금색 물방울 무늬의 한복 색깔처럼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튿날 여러 신문에 그런 사실이 보도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매우 신기한 일이다.
공휴일이라 서산 농장에 내려가 있던 김종필(金鍾泌) 총리가 신직수(申稙秀) 정보부장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김 총리는 신 부장에게 “이것은 한사람이 한 짓이 아닐 것이다. 박 대통령이 시승식에 참석하게 돼 있었던 청량리 전철역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옆에서 보니 두 사람 모두 사색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대성통곡그날 저녁 7시를 조금 넘어서 비가 오는 가운데 영부인의 유해가 서울대병원을 떠나 청와대에 도착하였다. 나는 유해 운구차를 뒤따라갔다. 박 대통령은 검은 양복을 입고 지만, 근영 두 자녀분과 함께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해는 청와대 본관 1층 영부인 접견실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유해를 모셔놓은 접견실 입구에서 나는 마구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냥 서서 울고 있는데 나를 본 박 대통령이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는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국무위원들이 대통령의 통곡 소리를 듣고 옆방에서 뛰쳐나와 대통령의 우는 모습을 보고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 김정렴(金正濂) 비서실장이 내 옆구리를 탁 치면서 “각하 모시고 이러면 어떻게 해”하며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박 대통령을 집무실로 모셨다. 영부인의 유해는 대접견실로 다시 옮겨져 빈소가 차려졌다. 빈소가 마련된 대접견실 구석에 눈을 감고 앉아 있으려니 갖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군 작업복을 염색해서 입고 다니던 나에게 취직하려면 양복이 필요할 것이라며 양복감과 외툿감 각 한 벌씩에 수공료까지 넣어주시던 영부인…, 평생 처음으로 입어보는 양복과 외투를 입고 영부인께 꼭 보여드려야 한다며 그 바쁘신 영부인을 뵙겠다고 우기던 나를 웃으며 자상하게 만나주시던 어머니 같은 영부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박 대통령은 매일 이른 새벽에 2층 침실에서 내려와 분향을 했다. 당직자들의 말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오랫동안 영부인 빈소에 머물렀으며 때로는 흐느껴 우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다고 했다.
“어머니 오늘 제가 텔레비죤에 나오니까 잘 보세요” 육 여사는 그날 아침 청와대에 와 있던 어머니 이경령 여사에게 행사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렇게 인사를 했다.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이경령 할머니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도 빈소에 끊이지 않았다.
그때 프랑스에 유학하고 있던 근혜씨는 장례식 3일 전에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박 대통령은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가 따님을 태우고 들어오면서 차내에서 저격사건의 전후사정을 설명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큰 따님이 너무 놀라고 상심할 것을 염려하여 귀국길에 오른 따님에게 편지를 써서 외교행낭으로 급히 주일한국대사관으로 보내 따님이 일본 공항에서 귀국 전에 아버지의 편지를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존중이 배어 있는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장례 당일 청와대 정문 옆에 있는 작은 문 뒤에서 운구 행렬이 경복궁을 돌아 나갈 때까지 지켜서 보고 있었다. 그 인상적인 장면을 김성진(金聖鎭) 청와대 대변인이 직접 소형카메라에 담는 모습이 보였다. 운구행렬이 경복궁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신직수 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모시고 본관으로 올라갔다. 뒤따라 가면서 보니 대통령이 손수건을 꺼내 코를 푸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장례식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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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8월 19일 청와대 정문에 서서 운구행렬을 마지막 지켜보는 박 대통령
④육 여사의 결벽, "아버지는 후덕한 분이 아니었어요"
: 2014.08.13 14:05 | 수정 : 2014.08.13 15:33 프리미엄조선 김두영 전청와대비서관
1970년 7월 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개관식 때의 일이었다. 서울 시내 국민학교 교장과 어린이 대표들이 초청된 가운데 개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고 있었다. 식순에 따라 어린이회관 건축에 협조한 20여 명에게 설립자인 육영수 여사께서 직접 감사패를 전달하게 되었다. 사회를 보던 내가 감사패 문안을 읽고 육영재단 상임이사였던 정우식씨가 감사패를 하나씩 육 여사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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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7월 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개관 테이프를 끊는 설립자 육영수 여사.(윤치영, 곽상훈, 김성곤씨와 양택식 서울시장이 함께 서 있다.)
그런데 감사패를 잘못 집는 바람에 받을 사람과 상패의 이름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그냥 전달했으면 식이 끝나고 나서 서로 바꾸어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육 여사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이름이 다르다고 정 이사에게 되돌려 주었다. 당황한 정 이사가 감사패를 찾느라 이것저것 마구 섞어놓은 바람에 계속 감사패 이름과 사람이 틀려 나갔고 급기야 차곡차곡 쌓아둔 감사패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식장 안에 있던 어린이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KBS-TV가 그 행사를 중계했는데 개관 첫 날 어린이회관은 어린이들에게 크게 망신을 당한 셈이 되고 말았다.
육 여사는 천성적으로 결벽했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서도 거의 완벽주의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꺼림칙하거나 의심을 살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를 밝히고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아버지는 후덕한 분이 아닙니다”1972년 10월 25일자 모 경제신문에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에 재직했던 김 모씨가 육영수 여사의 가친 육종관(陸鍾寬)씨에 관한 짤막한 글을 기고한 일이 있었다. 그 내용은 충북 옥천의 토호인 육종관씨는 천성이 착하고 후덕하여 같은 마을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늘 보살피고 도와주어 인심을 크게 얻었다는 것이었다.
신문기고를 우연히 읽은 대통령 영부인께서 나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후덕하고 인심 좋은 분이 아니었어요. 남의 사정을 이해하고 조그만 도움이라도 주셨던 분은 어머니였어요. 아버지를 잘 아는 옥천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무어라고 하겠어요. 그분이 잘못 알고 계시니까 글 쓴 분에게 정중하게 전화를 해서 글을 써주셔서 고맙지만 아버지는 그런 후덕한 분이 아니었다고 바로 잡아드려요.”
나는 즉시 김씨에게 전화를 걸어 영부인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아무리 아버지의 일이라 하더라도 틀린 것은 바로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육 여사였다. 나는 그 후 나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은 김씨가 그때 육 여사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육 여사가 결재를 하지 않은 이유청와대 민정비서실에서는 영부인 앞으로 온 민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고할 때 ‘영부인’ 결재란을 만들어 서류를 가져 왔었는데 영부인께서는 그 서류를 다 보고 나서도 그 난에 결재를 하지 않고 그냥 보고서류만 읽어보고 관계 비서실로 돌려보냈다.
대통령 부인은 법적으로 공적인 서류에 결재할 결재권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공사의 구별이 철저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민정비서실에서는 부속실 직원이 제멋대로 결과 보고토록 지시한 것이라는 오해가 생겼다. 부속실 민원처리를 맡았던 나로서는 영부인에게 건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정비서실에서는 열심히 조사해서 보고를 했는데 영부인께서 사인을 안하시니까 제가 중간에서 제멋대로 민원처리를 하면서 장난치고 있는 줄 알고 있으니 그저 보셨다는 뜻으로 사인을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했다. 그 후부터는 마지못해 결재란에 사인을 했다.
영부인 기증 약품 증발-
- 한영우 박사.
스웨덴 왕실 의사로 일했던 한영우(韓映愚) 박사라는 한국인 의사가 있었는데 이분은 매년 종합비타민을 육 여사에게 보내 나환자들이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게 하였다. 1972년에 영부인께서 많은 양의 약품을 경기도에 넘겨주었는데 그 전달을 내가 맡아서 했다. 그 며칠 뒤 “육 여사가 보낸 비타민이 증발됐다”는 기사가 동아일보 석간에 실렸다.
대통령 지시로 내무부에서 진상조사를 해보니 상당량의 비타민이 구호대상자에게 전달되지 않고 경기도지사 관사에 은닉되어 있었음이 밝혀졌고 김현옥(金玄玉) 내무장관의 건의에 따라 경기도지사가 다음날 면직되었다.
영부인은 이 문제를 두고 여러 차례 나에게 아쉬움을 표시했다. 내가 경기도에 의약품을 인계할 때 단단히 주의를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하셨다. 또한 영부인의 친서라도 같이 보냈더라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능력 있고 아까운 사람이 잘렸다”고 미안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무척 아쉬운 마음이었다. 나는 경기도청 사회과 담당자를 청와대 본관으로 불러 창고에 보관된 비타민 수십만 정을 인계할 때 대통령 영부인의 기증품이 그렇게 증발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③청와대 현관까지 들어온 전무후무한 영업용 택시
입력 : 2014.08.11 09:44
육영수 여사는 방송극작가인 이서구(李瑞求, 1899~1981)씨나 박목월(朴木月, 1916~1978) 시인 같은 분들과의 대화를 무척 좋아해 그분들을 가끔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1973년 늦은 봄, 어느 날 오후였다. 이서구씨가 육 여사의 초대로 청와대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서구씨는 1960년대 인기 방송드라마 작가로 활약한 유명 작가였다. 그는 해방 전 서울 장안의 뭇 여성을 울렸던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곡인 ‘홍도야 울지마라’의 가사를 쓴 분이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와대는 경호관계로 영업용 택시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와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가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차가 없는 경우에는 부득이 남의 차를 빌려 타고 와야만 했다. 아니면 효자동이나 삼청동에서부터 본관까지 걸어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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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극작가 이서구씨.
가끔 비서실 차를 청와대 입구에 대기시켰다가 손님을 모시기도 했지만 운전사들이 손님 얼굴을 몰라 실수를 저지르는 예가 있었다. 육 여사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겪는 이런 불편에 대해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다. 이서구씨도 자가용이 없어서 차를 빌려야 했는데 그날따라 차를 빌려 타는 일이 잘 안 된다고 연락이 왔다. 노구의 이서구씨가 청와대 본관까지 걸어서 올라오는 것은 본인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 영부인께서 나에게 지시를 했다. 경호실장실에 연락해서 이서구씨가 타고 오는 택시를 본관까지 올려보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영부인의 지시를 경호실장실에 알렸다. 육 여사는 “시내에 돌아다니는 택시를 아무거나 세워서 타고 올 텐데 그 택시 기사가 청와대로 올 줄 어떻게 미리 알고 나쁜 짓 할 준비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도 동감이었다.
이서구씨가 탄 택시가 본관 현관까지 올라왔다. 청와대 경내 입구에서부터 경찰관이 동승해서 안내를 해왔다. 아마 그 택시는 청와대 본관까지 올라온 전무후무한 택시가 될 것이다.
그 후 나는 김포공항에 가끔 갈 기회가 있었는데 경찰관들이 공항 입구에서 자가용은 차를 세워서 검색을 하면서도 영업용은 일체 하지 않는 경우를 보면서 ‘이서구씨의 택시’를 생각하곤 했다.
육 여사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일에 지성이었다. 성장기에 후덕했던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여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남편이 거사한 혁명에 대한 공동의 무한 책임감이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남편이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황천의 객이 될지도 모를 혁명에 뛰어든 것은 누가 무어라고 하든 이 민족의 가난 때문이었다고 육 여사는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이 나라 백성을 구해 내는 일은 박 대통령과 육 여사의 사고와 행동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육 여사 차의 교통사고1974년 봄에 강원도 춘성군에서 양잠대회가 열렸다. 육영수 여사가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 편으로 경기도 가평군을 지나다가 갑자기 도로 반대편에 있던 엿장수에게 달려가려고 언덕 밑에서 뛰어든 5, 6세 정도의 소녀를 치었다. 영부인의 행차에는 평소에도 경호 차량도 없고 관할 경찰서에서 경비를 하거나 교정 정리를 하는 일이 일체 없었다. 그것은 육 여사의 뜻이었다. 육 여사는 사색이 되었다. 뒤따라오던 정소영(鄭韶永) 농수산부장관 승용차에 다친 소녀를 태워 급히 가평에 있는 병원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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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5월 28일 강원도 춘성군 신북면에서 열린 제3회 전국 새마을 양잠대회에 참석해 뽕을 따는 육영수 여사.
영부인이 양잠대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경찰로부터 “소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보고가 왔다. 육 여사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나에게 즉시 병원에 가보도록 지시했다. 육영수 여사는 그날 양잠대회를 마친 후 오후 3시경에 소양강 댐에서 한국자연보존협회가 주최한 치어(稚魚) 방류행사에 참석해 비단잉어, 초어 등 10여만 마리의 치어를 소양강 물속에 풀어놓아 자라게 했다.
나는 그날의 모든 행사를 마친 후 영부인을 모시고 청와대에 돌아왔다가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곧바로 그날 밤 춘천에 있는 외과병원으로 이송된 그 소녀를 보러 갔다. 그 소녀가 아직 의식을 차리지는 못했지만 정상 호흡을 하고 있었다. 춘천에 있는 병원에 경기도 경찰국장 박영호(朴榮鎬)씨가 와 있었다. 그는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사표를 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국장이 잘못한 게 뭐가 있나. 그것은 대통령의 뜻도 아니다”고 말했다. 그 소녀는 진단 결과 골절도 내출혈도 없음이 판명되었다. 일시적인 쇼크였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하자 영부인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죽었더라면 평생 가책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텐데…”라고 고민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았다. 어린이의 상태에 대한 나의 보고를 들은 박 대통령께서 “어린아이가 많이 놀랬던 모양이군. 괜찮다니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영부인은 며칠 후 그 소녀와 소녀의 부모를 청와대로 함께 불러서 위로해 주었다.
②근혜씨 결혼 소문과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
입력 : 2014.08.08 10:01 프리미엄조선 김두명 전청와대비서관
대통령 큰 영애 박근혜씨는 서강대학교 이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우수했으며 사려가 깊고 성실해 비서실에 근무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청와대 직원들도 큰 영애를 대하는 일이 매우 조심스러울 정도로 처신이 신중했다. 차녀인 근영씨는 성격이 매우 쾌활했으며 누구보다 바른 말을 잘했다. 서울 음대 작곡과 출신인 근영씨는 박 대통령 작사·작곡의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을 옆에서 도운 당사자다. 근영씨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청와대에서 사는 동안에도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73년 경 큰 영애 박근혜씨가 당시 서울시장 아들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파다했었다. 어디서 흘러나왔는지도 모를 소문에 대해 육 여사는 아무 말 없이 그 소문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소문이 호사가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옮겨 점점 퍼져 나가자 영부인도 나중에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서울시장 부인을 전화로 불러서 나무랐다.
“남자야 그런 소문이 나도 괜찮지만 여자 쪽은 곤란하지 않느냐. 누가 시장 부인에게 그런 소문을 물어왔을 때 그냥 ‘아니다’라고 웃으면서 대답을 하면 그것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겸양으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 되기 쉬우니 정색을 하고 부인해야 된다”고까지 일러주었다. 육 여사는 측근들에게 “근혜는 좀 늦더라도 공부를 다 마친 후에 좋은 배필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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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2월 21일 서강대 이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박근혜.
1973년 가을 어느 날 지만군이 다니던 중앙고에서 하교하여 청와대로 돌아와 내가 일하던 부속실에 들렀는데 얼굴 한쪽 볼이 부어 있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상급생에게 얻어맞았다는 것이었다. 밴드부 연습실을 우연히 친구들과 지나다가 연습이 끝나고 아무도 없길래 북을 두어 번 두드리다가 들켰다는 것이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퇴근 무렵 영부인으로부터 인터폰이 걸려왔다.
“아까 지만이에게 왜 맞았느냐고 물었다면서요?”
“예.”
“그런 건 왜 물어요. 모르면 어때요? 내가 가슴이 얼마나 아픈데….”
얼굴이 부어오른 지만군을 본 영부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부모 마음은 다 같은데… 아무도 몰랐으면 혼자서 삭이고 말 것을 공연히….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기에는 대통령의 아들이 구타를 당했으니 응분의 조치를 할 수 있으려니 하겠지만 육영수 여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분이며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학교에서는 뒤늦게 대통령 아들이 맞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발칵 뒤집혔다. 학교 측이 때린 학생을 처벌하겠다는 이야기가 들려와 육 여사는 “제발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 얼굴이 부어오를 정도로 맞았지만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던 육영수 여사, 이것이 진정한 공인의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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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본관 후정에서 어느날의 육영수 여사와 박지만.
근영씨가 서울음대 재학 중일 때 대학 친구들과 함께 강화도 전등사로 놀러가고 싶다고 해서 주말에 박 대통령이 일부러 마이크로버스를 내게 하여 대학생들과 같이 타고 전등사를 다녀왔다. 대통령이 관광안내원 노릇을 하면서 일행에게 자세한 설명도 해 주었다.
박 대통령은 강화도를 다녀와서 “요즈음 젊은이들은 어째서 예절을 그렇게 모를까. 대통령이라고 부르기 어려우면 근영이 아버지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다녀와서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니…” 하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대학생들과 가까웠던 육영수 여사육 여사는 순수하고 발랄한 젊은이들을 무척 좋아했으며 대학생들의 과외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육 여사를 좋아했던 대학생들은 육 여사를 캠퍼스로 초청, 좌담회 등을 가졌는데 육 여사가 방문했던 대학은 고대·외대·숙대·영남대·계명대·경희대 등이었다.
서울의 H대학에서 좌담회가 있었는데 한 학생이 박 대통령의 매력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육영수 여사는 그분의 강한 의지력이라고 답변한 뒤 웃을 때의 모습이 어린애같아 더 좋다고 해 강당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을 점수로 매기면 몇 점쯤 되느냐는 질문에는 ‘남편인데 B학점은 주어야 하니 이해해 달라’고 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대통령 부인이 대학 캠퍼스를 찾아가 학생들과 대화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육영수 여사는 대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아서 그들을 도와주었다. 각 대학의 각종 서클이 육영수 여사에게 서신을 보내와 지원을 요청해 오면 반드시 봉사활동에 필요한 경비의 일부를 지원했다.
1973년 여름 서울 K대학의 동아리 대표 조(趙)모군을 청와대에 오라고 해 영부인이 주시는 경비를 전하면서 내가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반정부 데모하느라 학생들은 수업을 못하고 시내 교통이 막혀 시민들은 짜증스럽고…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하나. 내가 좋은 방법을 알려주겠다. 이번 여름 농촌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틈틈이 농민들에게 대학생 자격으로 이야기하라. 이 정부는 도저히 안 되겠으니 다음 선거 때는 반드시 야당을 뽑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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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5월 12일 학생회 초청으로 경희대를 방문한 육영수 여사.
그 학생은 청와대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래도 되느냐고 나에게 되묻고는 고개를 몇 번 갸우뚱하며 청와대를 떠났다.
1974년 8월 14일 각 대학 유네스코 학생회원들이 10여 일간의 조국순례 대행진을 마치고 최종 목적지인 부여 백마강을 향해 도보로 행진을 하고 있었다. 정오 무렵 도보행군으로 땀에 흠뻑 젖은 그들에게 서울서 내려온 해태제과 냉동차에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배급되었다. 육 여사께서 그곳까지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15일, 대학생들이 백마강에서 8·15광복절 기념행사를 가진 그 시각, 영부인은 총탄에 맞아 서울대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①육영수 여사 지시로 쌀가마 들고 철거민촌 찾아갔더니…
입력 : 2014.08.06 05:06 프리미엄조선 김두영 전청와대비서관
육영수(陸英修·1925~1974) 여사!
1974년 8월 15일. 현직 대통령 부인으로 북한의 흉탄에 49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지 올해로 만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이들은 아직도 그 분의 고결한 생애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젊은이들로부터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육 여사에 대한 비판적인 글이나 말을 어디에서도 보고 들은 일이 없다. 육 여사는 진정 어떤 분이었나?" 나는 내가 겪은 사소한 일들을 통해 인간 육영수의 편린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려고 한다. 서투른 솜씨로나마 나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추억한다./필자
아카시아 꽃과 할머니
북한에서 만난 북녘 동포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쇠고깃국에 흰 쌀밥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고 한다. 그들이라고 왜 고대광실에 천석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없겠는가.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도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온 가족이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인 때도 있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은 절대량이 부족해서 심지어 전국적으로 밤나무 같은 유실수 재배를 권장해 그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보려고 서글픈 안간힘을 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지난 날의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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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고 있는 육영수 여사.
70년대 초 아카시아 꽃이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핀 어느 해 늦은 봄날이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한 가정주부로부터 청와대 대통령 영부인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조그만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 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보다 80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육영수 여사는 이런 사연의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받았고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많이 도와주셨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영부인의 지시로 쌀 한 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은 모든 게 몰라보게 달라진 최신 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철거민들이 정착해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그 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집을 겨우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아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왔노라고 인사를 건넨 후 어두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초막 같은 집에는 전깃불도 없이 희미한 촛불이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찾아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그릇에 수북한 흰 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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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막촌을 찾은 육영수 여사.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갑자기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서 식량을 늘려 먹을 생각은 않고 흰 쌀밥이 웬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참 앉아 있으려니까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 둘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을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밥이 아니라 들판에서 따온 흰 아카시아 꽃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메어오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나에게도 저런 할머니가 계셨는데…. 저 할머니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나는 가지고 간 돈과 쌀을 전해주고는 아무 말도 더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다. 그 며칠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무심코 그 이야기를 했다. 내외분은 처연한 표정에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때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던 박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에서 가난만은 반드시 내손으로….”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60년대 초 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해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만난 박 대통령.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가난한 나라에서 돈 벌기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원. 서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붙들고 울기만 했던 그때, 박 대통령은 귀국길에 야멸차리만큼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가난만은 반드시 내손으로….’ 이런 결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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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서독을 방문한 육영수 여사가 파독광부를 만나기 위해 함보른 탄광을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국가기록원
크림전쟁(1853~1856) 때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부상병을 돌보았던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50~1910)이 영국 왕 에드워드 7세로부터 받은 공훈 훈장증서에는 이런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물질로 도와라, 물질이 없으면 몸으로 도와라, 물질과 몸으로도 도울 수 없으면 눈물로 위로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가난뱅이 나라의 대통령 내외가 그들을 눈물 아닌 그 무엇으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을까.
나는 매년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 되면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함께 뛰어놀다 배가 고프면 간식 삼아서 아카시아 꽃을 따먹던 쓸쓸한 추억과 70년대 초 성남에서 만난 그 할머니의 모습이 꽃이 질 때까지 내 눈앞에 겹쳐서 아른거리곤 한다. 그날 밤 내가 만난 올망졸망한 꼬맹이들은 지금은 50대를 바라볼 텐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