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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권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사랑 장석주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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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 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오늘 나는>을 나는 권태에 관한 시로 읽는다. 흔들리는 깃털이 목적 없듯이 오늘을 통과하는 내 삶에 어떤 목적이 없다. 해는 떴다가 지고, 낮이 간 뒤 밤은 온다. 수억 년 지구 위에서 되풀이해 온 새로울 게 없는 사실이다. 되풀이는 권태를 불러온다. 이 시는 권태의 나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권태에 사로잡히면 목적에 대한 열정은 휘발하고 욕망은 그 부피가 준다. 권태의 유일한 덕목은 분노와 증오마저 누그러뜨려 외견상으로는 주체의 관용이 커진 듯 보이게 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욕망의 부피가 줄었기에 무욕한 인간으로 비치기도 할 것이다. 실은 관용이 아니라 무욕함이 아니라 그 일체에 대한 나태와 피동성에서 빚어진 사태인데 말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 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 새들의 검은 주검이나 이마에 느는 주름들, 그리고 늦은 밤 이웃집에서 벽에 못 박는 망치질 소리…. 이것들은 삶의 표피에서 일어나는 거품들에 지나지 않는다. 잠깐 이마를 찌푸렸다가 푸는 순간 그 거품들은 지나간다. 세계에 대해 피동적인 사람이 그나마 반짝, 하고 열정을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대할 때뿐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자기 영혼의 가장자리를 따라 여행하는 존재인 것이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지구의 끝,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하더라도 사람은 자기 영혼의 내부를 벗어나지 못한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새로운 풍물이 아무리 넘치더라도 결국은 “우리 존재의 필요와 호기심에 가장 잘 부응하는 것들만” 선택하고 받아들인다. 보라, 시인은 다음과 같이 그 잠언을 새기고 있다. “나는 지상에 태어난 자가 아니라 지상을 태우고 남은 자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최후의 움푹한 것이다. 환한 양각이 아니라 검은 음각이란 말이다. 나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신화들을 읽은 후 비탄에 젖어 일생을 보내다가 죽은 후 다음 생에 최고의 전기 작가로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명심하라. 그 운명을 점지하는 자도 바로 나다.”(<아이의 신화>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권태는 자기방기며, 결과적으로 책임과 의무에 대한 면죄부를 만든다. 어떻게? 망각으로써. 잊는다는 건 삶의 텅빔에 대한 소극적인 부정의 한 방식이다. 공허와 뜻 없음, 실망과 오류들을 잊음으로써 마치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멀리 도망간다. 지난 시절, 죽은 친구들, 소소한 번민들을 잊음으로써 그것들을 과거라는 무덤 속에 묻고 새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 새 삶이라고? 그렇다. 이 시는 끝에 놀라운 반전을 숨겨 놓았다. 만사가 재미없음, 혹은 시들함이라는 징후들을 늘어놓으며 나른하게 펼쳐지던 이 권태의 시는 끝에 가서 팽팽한 긴장으로 조인 사랑의 시로 바뀐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시의 화자는 돌연 사랑을 찾음으로써 권태와 망각이라는 종교에서 세상으로 환속한다. 그것은 개종이고 환속이다. 머잖아 나태는 열정으로, 무욕의 느릿함은 욕망의 사나운 질주로 바뀔 것이다. 사랑은 세계를 욕망해야 할 분명한 동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식후에 이별하다>) 사랑이 때때로 무도덕이나 무분별로 빠지는 것은 그것이 세계에 대한 절박한 욕망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심보선(1970~ )은 서울 사람이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나오고 콜럼비아 대학 사회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고, 올해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나왔다. 심보선에 대해 아는 바는 이것이 전부다. 나는 심보선을 개인적으로 만나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시집을 따라가면,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뒤늦게 초급영어를 배우는 중이다. 그는 장남이다. 그것도 “크게 웃는 장남”(<웃는다, 웃어야 하기에>)이다. 그는 장남으로서 “애절함인지 애통함인지 애틋함인지 모를 / 이 집안에 만연한 모호한 정념들”과 싸운다. 그의 장모는 “모국어를 그리워하고 있을 사위에게”라고 시집 속지에 쓴 황지우 시집을 유학 중인 사위에게 부쳐 주었다. 그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그 시집을 읽었다. 그는 대학 다닐 때 데모 한 번 한 적 없는 아내와 함께 산다. 아내는 좌파가 아니면서도 그의 좌파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에 기댄다면, 그는 좌파다. 사회운동가인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에서 온 좌파 급진주의자로 오해”(<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를 받는 좌파다. “나는 씨익, / 웃을 운명을 타고났기에 씨익, / 한번 웃으면 / 사나운 과거도 양처럼 순해지곤 합니다”(<편지>)라는 시를 보면 순하고 낙관적인 좌파다. |
첫댓글 저도 좌파기는한데...비겁한 좌파 인것같아요...심보선...멋진시인이군요...엄청 좌절감에 사로잡히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