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
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본래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는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 위치한 태안사에 건립한 비였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비의 전문은 구례 화엄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필사본(筆寫本)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적인선사는 경주사람으로 속성이 박씨이며, 법호는 혜철(慧徹)로 선종 9산문의 하나인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한 사람이다. 785년(원성왕 1)에 출생하여 15세에 출가하였으며, 30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에서 선종승려로 명성을 떨치던 지장선사(智藏禪師)에게서 수학하였다. 55세까지 중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선종사상을 공부하다가 귀국하여 처음에 무주(광주광역시) 쌍봉사에 머물렀다. 후에 곡성 태안사로 옮겨 동리산문을 개창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861년(경문왕 1)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탑비는 경문왕의 왕명으로 872년(경문왕 12)에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한림랑(翰林郞) 최하(崔賀)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중사인(中舍人) 요극일(姚克一)이다. 요극일(姚克一)은 이밖에도 여러 개의 비문을 썼는데, 통일신라시대에 구양순체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 하대 선종사상의 성격, 9산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의 개창과 관련된 사실을 연구할 때 핵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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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金壽泰, 2000, 「甄萱政權과 佛敎」『후백제와 견훤』, 百濟硏究所
(논문)金壽泰, 1999,「全州 遷都期 甄萱政權의 變化」『韓國古代史硏究』15
(단행본)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Ⅱ, 國史編纂委員會
(단행본)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논문)李智冠, 1991, 「谷城 大安寺 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文」『伽山學報』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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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古代篇, 亞細亞文化社
(단행본)아세아문화사, 1984, 『태안사지』
武州桐裏山大安寺寂忍禪師碑頌幷序
入唐謝恩兼宿衛判官翰林郞臣崔賀奉敎撰
夫鍾也者叩之聲之聞之可能定慮鏡也者磨之光之照之足以辨形以物之無情猶妙用若此矧伊夙間氣生蘊靈願心非妄心行是眞行空中說有色際知空方淨六塵自超十地所體大於虛空之大所量深於瀚海之深神通也不可以識識智慧也不可以知知者乎卽禪師其人也禪師諱慧徹字體空俗姓朴氏京師人也其先少耽洙泗之迹長習老莊之言得喪不關於心名利全忘於世或憑高眺遠或染翰吟懷而已祖高尙其事不歷公門於朔州善谷縣閑居則太白山南烟嵐相接左松右石一琴一樽與身相親之人也娠禪師之初母氏得夢有一胡僧儀形肅雅衣法服執香爐徐徐行來坐寢榻母氏訝而復異因茲而覺曰必得持法之者當爲國師矣禪師自襁褓已來凡有擧措異於常流至如喧戱之中不喧安靜之處自靜觸羶腥則嘔血見屠殺則傷情遇坐結跏禮人合掌尋寺繞佛唱梵學僧冥符宿業斷可知之矣年當志學出家止于浮石山聽華嚴有五行之聰罔有半字三餘之學何究本經以爲鉤深索隱豈吾所能墻仞所窺不可不說於是編文織意積成券軸決囊代之膏肓袪群學之蒙昧同輩謂曰昨爲切磋之友今作誘進之師眞釋門之顔子也洎二十二受大戒也一日前夢見五色珠令人可重忽在懷袖之中占曰我已得戒珠矣受戒初飄風亙天扶搖不散下壇了恬然而靜十師謂曰此沙彌感應奇之又奇也旣統具戒修心潔行念重浮囊持律獲生身輕繫草不以諸緣損法不以外境亂眞旣律且禪緇流之龜鏡也竊念佛本無佛强以立名我本無我未嘗有物見性之了是了喩法之空非空黙黙之心是心寂寂之慧是慧筌蹄之外理則必然頃得司南是也仍嘆曰本師遺敎海隔桑田諸祖微言地無郢匠乃以元和九載秋八月駕言西邁也時也天不違乎至誠人莫奪其壯志千尋水上秦橋迢遞而變換炎凉萬仞山邊禹足胼胝而犯冒霜雪步無他往詣龔公山地藏大師卽第六祖付法於懷讓傳道一一傳大師也大師開如來藏得菩薩心久坐西堂多方誨爾來我者略以萬計莫非知十之學禪師曰某生緣外國問路天地不遠中華故來請益儻他日無說之說無法之法流於海表幸斯足也大師知志旣堅稟性最悟一識如舊密傳心印於是禪師已得赤水所遺靈臺豁爾如大虛之寥廓也夫夷夏語乖機要理隱非伐柯執斧孰能與於此乎未幾西堂終乃虛舟莫留孤雲獨逝天南地北形影相隨所歷名山靈境略而不載也到西州浮沙寺披尋大藏經日夕專精晷刻無廢不枕不席至于三年文無奧而未窮理無隱而不達或黙思章句歷歷在心焉以違親歲積宣法心深遂言歸君子之鄕直截乾城之浪開成四祀春二月方到國也是日君臣同喜里閈相賀曰當時璧去山谷無人今日珠還川原得寶能仁妙旨達摩圓宗盡在此矣譬諸夫子自衛反魯也遂於武州管內雙峰蘭若結夏時遭陽亢山枯川渴不獨不雨亦無片雲州司懇求於禪師師入靜室爇名香上感下祈小間甘澤微微而下當州內原濕滂沱旣而大有又㞐理嶽黙契谷忽有野火四合欲燒庵舍非人力之所救亦無路以可逃師端坐黙念之中白雨暴下撲滅盡之渾山燎而一室獨存嘗住天台山國淸寺預知有禍拂衣而去人莫知其由不久擧寺染疾死者十數入唐初與罪徒同舡到取城郡郡監知之枷禁推得欵禪師不言黑白亦同下獄監具申奏准敎斬三十餘人訖次當禪師師顔容怡悅不似罪人自就刑所監不忍便殺尋有後命而幷釋放唯禪師獨免如此寂用不可思不可得也其回天駐日縮地移山禪師亦不病諸盖以和光同塵不欲有聲矣谷城郡東南有山曰此桐裏中有舍名曰大安其寺也千峰掩映一水澄流路逈絶而塵侶到稀境幽邃而僧徒住靜龍神呈之瑞異蟲蛇遁其毒形松暗雲深夏凉冬燠斯三韓勝地也禪師擁錫來遊乃有縣車之意爰開敎化之場用納資稟之客漸頓雲集於四禪之室賢愚景附於八定之門縱有波旬之儻梵志之徒安得不歸於正見悟吠堯之非斯乃復羅浮之古作曹溪之今也哉文聖大王聞之謂現多身於象末頻賜書慰問兼所住寺四外許立禁殺之幢仍遣使問理國之要禪師上封事若干條皆時政之急務王甚嘉焉其裨益朝廷王侯致禮亦不可勝言也時春秋七十有七咸通二年春二月六日無疾坐化支體不散神色如常卽以八日安厝於寺松峰起石浮屠之也嗚戱色相本空去來常寂不視生滅濟度凡迷前諸未度忽失前緣已得後度須達理者以爲報盡形謝而痛惜哉於焉輟斤絶絃也終前三往所㞐山北而令伐杉樹大可四圍曰有人死則將此作函子葬之歸於寺壁上敎畵函子圖因告生徒曰萬物春生秋死我則反之已後不得與汝輩說禪味道矣屬纊之初野獸悲號山谷盡動鴉集雀聚盡有哀聲近浮圖有一株松靑䓗欝茂山內絶倫從開隧後春夏白秋冬黃永有吊傷之色也上聞禪師始末之事慮年代久而其跡塵昧以登極八年夏六月日降綸旨碑斯文以鏡將來仍賜諡曰寂忍名塔曰照輪淸淨則聖朝之恩遇足矣禪師之景行備矣其詞曰
唯我大覺兮現多身 性本空寂兮用日新
旣律且禪兮無我人 高山仰止兮莫與隣
寶月常圓兮照圓津 福河澄流兮蕩六塵
漸頓如雲兮未爲賓 語黙隨根兮永珠眞
雨撲山火兮救昆珍 時患魃旱兮感龍神
非罪臨刑兮後命臻 預迯禍殃兮及無因
遷化忽諸兮夭大椿 門徒百其兮血染巾
賜諡寂忍兮塔照輪 斯恩永世兮何萬春
中舍人臣克一奉敎書
咸通十三年歲次壬辰八月十四日立沙門幸宗
碑末福田數法席時在福田四十常行神衆法席本定別法席無本傳食二千九百三十九石四斗二升五合例食布施燈油無田畓柴田畓幷四百九十四結三十九負坐地三結下院代四結七十二負柴一百四十三結荳原地鹽盆四十三結奴婢奴十名婢十三口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무주 동리산 대안사 적인선사 비송(碑頌)과 서(序)
입당사은 겸 숙위 판관 한림랑 신 최하(崔賀) 왕명을 받들어 찬함.
무릇 종이라는 것은 그것을 치고 소리 나게 하고 (그 소리를) 들어서 정려에 들게 하며, 거울은 그것을 갈고 빛을 내고 비추어서 모양을 변별하게 하니, 무정의 물건으로도 묘용이 이와 같다. 하물며 여러 겁 사이에 기(氣)가 생하여 신령한 원력을 낳고 쌓으니 마음은 망녕 된 마음이 아니요 행은 참된 행동이며, 공(空) 가운데 유(有)를 설하고 색(色)의 끝에서 공을 알아 바야흐로 육진을 정화하며 스스로 십지를 뛰어넘으니, 체득한 바가 허공이 큰 것보다 크고 헤아리는 바는 바다의 깊이보다 깊어, 신통함은 식(識)으로써 알 수 없으며 지혜는 지(知)로는 알 수 없음에 있어서이랴! 바로 선사(禪師)가 그러한 사람이다.
선사의 이름은 혜철(慧徹), 자는 체공(體空), 속성은 박씨(朴氏)이고 서울[경주] 사람이다. 그 선조는 젊어서는 공자(孔子)의 발자취를 찾았고 장년에는 노장(老莊)의 말을 익혔으며, 얻고 잃음을 마음에 두지 않았고 명리를 세상에서 떨쳐버려, 어떤 때는 높은데 올라 멀리 바라보고 어떤 때는 붓으로 회포를 읊을 따름이었다. 그 할아버지도 그 일을 고상히 여겨 관직을 거치지 아니하였고 삭주(朔州) 선곡현(善谷縣)에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곧 태백산 남쪽 연기와 남기가 서로 어우러지고 좌우에 소나무와 바위가 있는 곳에서 가야금과 술잔 하나로 스스로를 벗하는 사람이었다.
선사를 임신하였을 무렵에 그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한 서역 승려가 있어 모습과 태도가 엄숙하고 단정하며 승복을 입고 향로를 가지고 서서히 와서 침상에 앉았다. 어머니가 의아하고 이상하게 여겨 이 때문에 깨어 말하기를 “반드시 법을 지니는 아들을 얻으리니 마땅히 국사(國師)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강보에 쌓여 있던 시절부터 행동거지가 보통 사람과 다름이 있어서, 떠들고 노는 가운데 가도 떠들지 아니하고 고요한 곳에 이르면 스스로 정숙하였으며, 누린내 비린내를 맡으면 피를 토하고 도살하는 것을 보면 마음을 상하였다. 앉을 때는 결가부좌를 하고 남에게 예를 표할 때는 합장하고 절에 가서 불상을 돌면서 범패를 불러 스님을 본받으니 전생의 업에 그윽하게 부합함을 단연코 알 수 있었다.
지학(志學)의 나이[15세]가 되자 출가하여 부석산에 머물러 화엄을 배웠는데 다섯 줄을 함께 읽어내리는 총명함이 있었다. 삼승의 경전 공부가 없으면 어찌 본경(화엄경)을 연구하겠으며, 깊이 천착하여 숨은 이치를 밝혀내고 어찌 내가 한 길 되는 담장으로 기웃거려 엿본 것이라도 설명하지 않을 수 있으랴 생각하였다. 이에 문장을 엮고 뜻을 짜맞추어 모아서 권축을 이루어 예로부터 고치기 어려운 잘못을 판결하고 배우는 이들의 몽매를 떨쳐버리니, 동학들이 일러 말하기를 “어제는 학문을 닦는 벗이었는데 오늘은 가르치고 이끌어 주는 스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불문(佛門)의 안회(顔回)이다”라고 하였다.
22세에 이르러 대계를 받았다. 그 전날 꿈에 오색 구슬이 보였는데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 홀연히 옷소매 속에 있는 것을 보고 점쳐 말하기를, “나는 이미 계주를 얻었노라” 하였다. 계를 받던 시초에 회오리바람이 일어 하늘까지 뻗쳐 폭풍이 되어 흩어지지 아니하였는데, 계단(戒壇)에 내려오자 염연하고 고요해져, 10사(師)가 일러 말하기를“이 사미의 감응이 기이하고도 기이하다” 하였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 마음을 닦고 행동을 정결히 하며 마음으로 계율을 중히 여기어 율을 지키기를 생명을 얻듯이 하였고 몸은 풀에 묶여 있는 듯 가벼이하고 여러 조건 때문에 법을 해치지 않으며 바깥 대상 때문에 진실을 어지럽히지 않아서 이미 율(律)과 선(禪)은 스님네의 귀감이었다.
가만히 생각컨대‘부처는 본래 부처가 없는데 억지로 이름을 세운 것이요, 나는 본래 내가 없는 것이니 일찍이 한 물건도 있지 아니하다. 견성(見性)의 깨달음은 바로 이 깨달음이니 비유하면 법(法)은 공(空)하되 공(空)이 아니며, 묵묵한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고 적적한 지혜가 바로 이 지혜이니 문자 바깥의 이치는 반드시 곧바로 지남(指南)을 얻는 것이다’하였다. 이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본사 석가모니께서 남긴 가르침도 오랜 세월이 지났고 여러 조사의 은밀한 말씀도 이 땅에 그것을 전하는 학원이 없구나” 하였다.
이리하여 원화(元和) 9년(814) 가을 8월에 서쪽으로 갔다. 이 때는 하늘도 지성이면 어그러지지 아니하고 사람도 그 장한 뜻을 빼앗지 아니하였다. 천 길 물을 찾아 건너니 진교(秦橋 : 중국)는 아득히 멀어서 철이 바뀌었고 만 길 산 끝에서 헤매어 우(禹)의 발이 갈라진 것처럼 되었으나, 서리와 눈을 무릅쓰고 걸어 다름 아닌 공공산(龔公山) 지장대사(智藏大師)를 찾아가 뵈었다. 곧 육조는 회양(懷讓)에게 법을 부촉하고 회양은 도일(道一)에게 전하였으며 도일은 대사에게 전한 것이다.
지장대사는 여래장을 열어 보살심을 얻고 오랫동안 서당(西堂)에 머물며 여러가지로 오는 자를 가르치니 대략 만 명을 헤아렸는데 하나를 배워 열을 알지 아니함이 없었다. 선사가 말하기를 “소생은 외국에서 태어나 천지 간에 길을 물어 중국을 멀다 아니하고 찾아와서 배우기를 청합니다. 다만 훗날 무설지설(無說之說)과 무법지법(無法之法)이 바다 밖[신라]에 유포되면 그것으로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대사는 (선사의) 뜻이 이미 굳고 품성이 잘 깨달을 만함을 알고 한 번 보고도 옛날부터 안 것 같아 비밀히 심인을 전하였다. 이에 선사는 이미 적수(赤水)에서 잃은 구슬을 얻은 듯 마음에 환히 깨달으니 태허의 끝없이 넓음과 같았다. 무릇 오랑캐와 중국의 말이 다르지만 중심 되는 실마리와 숨은 이치는 도끼자루를 베는 데 도끼를 잡지 않는다면 누가 이에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얼마 아니되어 서당이 임종하니 이에 빈 배에 머물지 아니하고 외로운 구름처럼 홀로 떠나 천지와 남북 간에 모양과 그림자가 서로 따르며 돌아다녔다. 명산과 신령한 곳을 두루 편력한 바는 생략하여 싣지 아니한다.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이르러 대장경을 펼쳐 탐구함에 밤낮으로 오로지 정진하여 잠시라도 쉬지 아니하였다. 침상에 눕지도 않고 자리도 펴지 아니하여 3년이 되자 문장이 오묘하여도 궁구하지 못함이 없고 이치는 숨겨져 있어도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또는 묵묵히 문장과 귀절을 생각하여 역력히 마음에 간직하였다.
모국을 떠나 여러 해가 되고 법을 펼칠 마음이 깊어져 드디어 군자의 나라(신라)에 돌아갈 것을 말하고 신기루와 같은 파도를 가로질러 개성(開成) 4년(839) 봄 2월 고국에 도착하였다. 이날 여러 신하가 함께 기뻐하고 동네에서 서로 경하하며 말하기를 “당시 옥 같은 사람이 가버려 산과 골짜기에 사람이 없더니 오늘 그 구슬이 돌아오니 하천과 들은 보배를 얻었다. 부처님의 오묘한 뜻과 달마의 원만한 종지가 다 여기에 있도다. 비유컨대 공자께서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옴이라”하였다.
이윽고 무주(武州) 관내 쌍봉난야에서 여름 안거를 하였을 때 햇볕이 너무 뜨거워 산천이 말라붙었는데 비는 물론 조각구름조차 없었다. 주사(州司)가 선사에게 간절히 청하니 선사가 고요한 방에 들어가 좋은 향을 사르며 하늘과 땅에 기원하였다. 잠시 후 단비가 미미하게 내려 무주 관내의 들을 적시더니 죽죽 쏟아져 큰 비가 되었다. 또 이악(理嶽)에 머물러 묵계(黙契)할 때 골짜기에 홀연히 들불이 일어 사방에서 불이 나 암자를 태우려 하는데 인력으로는 구할 바가 아니요 또한 도망갈 길도 없었다. 선사가 단정히 앉아 묵묵히 생각하는 중에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져 불을 모두 꺼버리니 온 산이 불탔으나 오직 일실(一室)만이 남았다. 일찍이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머무를 때도 화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옷을 털고 떠났는데, 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온 절에 전염병이 돌아 죽은 자가 십여 명이었다.
처음 당나라에 갈 때 죄인의 무리와 함께 같은 배로 취성군(取城郡)에 도착하자 군감(郡監)이 이를 알고 칼을 씌워 가두고 추궁하였다. 선사는 흑백을 말하지 않고 또한 같이 하옥되었는데, 군감이 사실을 갖추어 아뢰고 교를 받아 30여 명을 목 베었다. 마침내 순서가 선사에게 이르자 선사는 얼굴이 온화하여 죄인 같지 않았고 스스로 형장에 나아가자 감사가 차마 바로 죽이라고 하지 못하였다. 곧 다시 명령이 있어 석방되니 오직 선사만이 (죽음을) 면하였다. 이처럼 선적의 쓰임[寂用]이 생각하기도 힘들고 얻기도 어려웠다. 하늘의 운행을 돌려 해를 붙잡고 땅을 줄여 산을 옮겼다. 선사는 또한 장애에 걸림이 없었으나 뛰어난 덕을 감추고 세속에 섞여 살며 명성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곡성군(谷城郡) 동남쪽에 산이 있어 동리(桐裏)라 하였고 그 속에 암자가 있어 이름을 대안(大安)이라 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막아 가리고 한 줄기 강이 맑게 흘렀고, 길이 멀리 끊기어 세속의 무리들이 오는 이가 드물고 경계가 그윽히 깊어 승도들이 머물러 고요하였다. 용(龍)과 신(神)이 상서와 신이를 나타내고 해충과 뱀은 그 독과 모양을 숨기며, 소나무 숲이 빽빽하고 구름은 깊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바로 이곳이 삼한(三韓)의 승지(勝地)였다.
선사가 석장을 잡고 와서 돌아보고 한적하게 머무를 뜻이 있어 이에 교화의 도량을 열어 자질을 갖춘 사람을 받아들이니, 점교·돈교를 닦는 사람이 사선(四禪)의 방에 구름처럼 모이고 현인과 우매한 이들이 팔정(八定)의 문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설사 마왕 파순의 무리와 바라문 수행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정견(正見)에 귀의하여 요임금을 보고도 짖는 개의 잘못을 깨닫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나부(羅浮)의 옛 일을 다시 봄이요, 조계의 오늘을 이룩한 것이다.
문성대왕이 이를 듣고 상말(象末)의 시대에 여러 몸으로 나투었다고 이르고 자주 서신을 내려 위문하면서 또한 (선사가) 주석하는 절의 사방 바깥에 살생을 금하는 당(幢)을 세울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물으니 선사는 봉사(封事) 약간 조를 올렸는데 모두 당시 정사의 급한 일이라 왕이 매우 가상히 여겼다. 그가 조정을 도와 이롭게 하고 왕후(王侯)들이 예를 올린 것 또한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시 춘추는 77세요, 함통(咸通) 2년(861) 봄 2월 6일 질병이 없이 앉아서 천화(遷化)하니 지체가 흩어지지 않고 신색이 보통 때와 같았다. 곧 8일에 절의 송봉(松峰)에 안치하고 돌을 세워 부도로 하였다. 슬프도다! 색상(色相)은 본디 공하여 오고 감이 항상 고요하니 생멸을 돌아보지 않고 미혹한 범인(凡人)을 제도하였는데 전에 제도 받지 못한 자들은 홀연히 전생의 인연을 잃고 후생의 제도를 얻는다. 모름지기 진리에 도달한 사람은 보(報)를 다하였다고 여기어 형체가 시들어지니 비통하도다. 어느덧 대패를 거두고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임종 전에 세 번 머무르던 산의 북쪽에 가서 삼나무를 베어내게 했는데 크기가 네 아름이었다. (선사가) 이르기를“사람에게는 죽음이 있으니 장차 이것은 관을 만들어 장사지내거라”하고 절에 돌아와 벽 위에 관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만물은 봄에 나고 가을에 시드나니 나는 곧 돌아갈 것이다. 이후로는 너희들과 함께 선(禪)을 이야기하고 도(道)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하였다. 임종할 무렵 들짐승이 슬피 울부짖어 산과 골짜기가 다 흔들리고 갈가마귀 참새가 모여들어 모두 슬피 울었다. 부도 가까이에 한 그루 소나무가 있어 푸르고 울창하여 산중에 빼어났는데 무덤길을 낸 후로는 봄 여름에는 하얗고 가을 겨울로는 누렇게 되어 길이 조상하는 모양이 있었다.
임금께서 선사의 모든 행적을 듣고 세월이 오래되면 그 자취가 티끌처럼 흐려질까 염려하여 즉위한 8년(868) 여름 6월 어느 날에 윤지(綸旨)를 내려 이 글을 비에 새겨 장래의 거울이 되게 하셨다. 이에 시호를 내려 적인(寂忍)이라 하고 탑명을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 하니 성조(聖朝)의 은혜로운 대우가 넉넉하였고 선사의 빛나는 행적이 갖추어졌다. 사(詞)는 이렇다.
우리 선사의 큰 깨달음이여! 여러 몸을 나투었도다.
성(性)은 본디 공적함이여! 그 작용이 날로 새롭도다.
율(律)을 지키고 선(禪)을 행함이여! 무아(無我)한 사람이로다.
높은 산처럼 우러러 봄이여! 더불어 짝할 이가 없도다.
보배로운 달처럼 항상 원만함이여! 중생의 길을 비추었다.
복된 물줄기가 맑게 흐름이여! 육진(六塵)을 쓸어가네.
점돈(漸頓)이 구름처럼 모여듦이여! 손님으로 대하지 못하였네.
설법과 침묵은 근기(根機)에 따름이여! 영원히 참된 보배로다.
비가 산불에 쏟아짐이여! 곤진(崑珍 : 절)을 구하였네.
가뭄을 걱정함이여! 용신(龍神)이 감응하였네.
죄인이 아니로되 형장에 나아감이여! 후명(後命)이 이르렀도다.
미리 재앙을 피함이여! (남들이)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홀연히 천화(遷化)함이여! 대춘(大椿)이 일찍 죽음이라.
백명이 넘는 문도들이여! 피눈물로 수건을 적시네.
시호를 적인(寂忍)이라 하사함이여! 탑은 조륜(照輪)이라 하였도다.
이 은우(恩遇)가 세상에 영원함이여! 어찌 만년 뿐이리요.
중사인 신 극일(克一)이 왕명을 받들어 쓰고
함통 13년 세차 임진 8월 14일 세우다. 사문 행종(幸宗).
비말(碑末) 복전수와 법석. 당시 복전은 40인이며 항상 신중법석(神衆法席)을 행하였고 본래 정한 특별한 법석은 없다. 본전(本傳)은 식(食) 2,939석(石) 4두(斗) 2승(升) 5합(合)이며 예식(例食)으로 보시한 등유는 없다. 전답시(田畓柴)는 전답을 합하여 494결(結) 39부(負), 좌지(坐地) 3결, 하원(下院) 대전(代田) 4결 72부, 시지(柴地) 143결, 두원(荳原) 땅의 염전 43결이다. 노비는 노(奴) 10명(名) 비(婢) 13구(口)이다.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출처] 혜철국사(惠哲國師)-부도비문|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