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체시온, 즉 분리파(Secession)라는 용어는 ‘분리된 서민(secessio plebis)’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고대 로마사에 따르면, 특권 귀족계급(Partiscius)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로마의 서민계급(Plebis)이 도시 외곽에 새로운 집단을 형성했는데, 이러한 저항의 몸짓이 바로 ‘분리’를 의미했다. 이처럼 제도권에서 탈퇴함으로써 정통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총체적 변화를 추구하는 ‘분리’의 움직임이 19세기 말 유럽의 젊은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독일의 뮌헨 분리파(1892), 베를린 분리파(1898),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빈 분리파(1897)를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빈 분리파에 대해 알아보자.
사회·문화 전반의 보수주의 속에서 싹튼 예술적 변화의 씨앗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지 빈(Wien)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인구 200만에 육박하는 국제도시이자, 전기•철도·자동차 등 현대 사회로서의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카페와 살롱에서는 철학자, 과학자, 심리학자, 전위 문학가들의 지적인 대화가 오갔고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그러나 1848년 왕위를 계승한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가 다스리던 19세기 말에 이르러, 진보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체감하는 제국의 실상은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가 “세계가 종말을 맞게 될 때, 나는 빈으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20년 늦게 일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농담할 만큼, 세기말 빈의 보수주의는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팽배해 있었다. | |
1860년대 건설된 환상(環狀) 도로인 링스트라세 (Ringstrasse)는 제국의 보수주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오래된 도시를 말발굽 형태로 싸고 도는 간선도로 링스트라세 주변에는 국회의사당, 오페라 하우스, 극장, 교회, 박물관 등 호화로운 공공건물들이 지어졌지만 건물들은 고전주의와 고딕양식, 르네상스 양식과 같은 과거의 영광스런 양식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또한 세련되고 부유한 중산층들이 살고 있는 도로 안쪽과는 달리 바깥쪽으로는 말단 군인, 상점 점원, 공장의 노동자와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유럽 최악의 빈민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과거의 양식적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답습하는 이러한 건축 양식을 역사주의 양식이라 한다. 이는 진부하고 평범한 미적 기준을 요구하는 당시 공공기관에서 비롯되었고, 이로 인해 빈 사회는 틀에 박히고 융통성 없는 관료주의로 특징지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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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빈 사회·문화 전반의 보수적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링스트라세 부르크링’ 구역의 모습(1872년) <출처 : Otto Normalverbraucher at en.wikipedia.org> | |
클림트를 필두로 한 19명의 미술가, 폐쇄적인 빈 미술계로부터의 ‘분리’ 선언
미술계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1861년 창립되어 대다수의 미술가들이 소속되어 있던 ‘빈 미술가연맹(Genossenschaft bildender Künstler Wiens, Künstlerhaus)’은 빈의 유일한 전시공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보수적인 전시위원회는 공공기관의 공식적인 인정과 후원을 얻어내고자 안이하고 정치적인 전시회를 조직하는데 급급했다. 또한 그 독점적 위치를 이용하여 상업적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하는 진보적인 미술가들의 전시는 여러 차례 요구에도 불구하고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자 1897년 4월, 당시 35세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빈 미술가연맹에 서한을 보내고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 1868~1918),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 1870~1956),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 1867~1908)를 포함한 19명의 젊은 미술가와 함께 ‘오스트리아 미술가연합(Vereinigung bildender Künstler Österreichs)’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했다.
오스트리아 미술가연합은 앞서 1892년에 비슷한 행보를 겪은 뮌헨 분리파를 따라 빈 분리파로 불리기도 했다. 조직의 초대회장을 맡은 클림트는 서한을 통해 “해외 미술과의 지속적인 접촉과 순수한 목적의 미술전시 구성, 그리고 공공단체들의 새로운 미술에 대한 관심 촉구”로 요약되는 선언문을 제시함으로써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존 단체와의 ‘분리’를 표명했다. 우선 진보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한편 폐쇄적인 빈 미술계를 극복하기 위해 미술의 국제적인 교류를 시도했다. 당시 빈 사람들은 영국이나 독일, 네덜란드 미술과 같은 외국의 앞선 작품들을 접해본 적이 없었고 마네, 고갱, 쇠라, 반 고흐 역시 낯선 이름이었다. 빈 분리파는 새로운 미술을 지지하는 외국작가들의 작품을 들여오고 자신들의 작품 또한 적극적으로 외국에 소개하고자 했다. | |
알프레드 롤러 [베르 사크룸] 창간호 표지, 1898년 |
콜로만 모저 [베르 사크룸] 표지, 1899년 |
빈 분리파의 구상은 그들의 첫 번째 전시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1898년 1월에 잡지 [베르 사크룸(Ver Sacrum)]을 창간하고 3월에 개최한 첫 전시회에서는 로댕(August Rodin), 휘슬러(James Abbot Whistler),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크노프(Fernand Khnopf), 클링거 (Max Klinger) 등, 독일에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로 알려진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을 구사하는 미술가들이 대거 소개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빈 분리파의 대표 양식으로서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슈틸(Secessionstil)이라 불렸다. 이들의 핵심은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통합하여 미술과 생활의 총체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그 예로 빈 분리파의 기관지 [베르 사크룸]의 표지와 본문, 레이아웃, 타이포그래피 모두가 분리파의 시각적 이상을 표현한 개별 작품으로서 발행되는 책들이 하나의 총체 예술 작품에 해당했다.
‘분리파 건물’ 건축, 그리고 총체 예술의 이상
빈 분리파 제 1회 전시회는 약 6만여 명의 관람객을 기록하며 대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거부감 대신 새로운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전시회 수익은 분리파의 전시 공간 건축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되었다. 주요 멤버였던 올브리히가 설계를 맡아 6개월 만에 완공된 ‘분리파 건물’은 전시관 정면 외벽에 루트비히 헤페지(Ludwig Hevesi)의 명문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이라는 표어를 새기고, 황금빛의 나뭇잎으로 덮인 둥근 지붕을 얹었다. 그 덕분에 ‘황금 양배추’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고전적인 바로크와 역사주의 양식에 익숙한 빈 시민들에게 올브리히의 분리파 건물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 사크룸]이 그랬듯이, 분리파 건물 역시 그들의 총체적 예술을 실현시키기 위한 개별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전시장의 내부공간은 단일 공간으로 이루어져 가벽을 이용하여 다양한 공간 연출이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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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의 분리파 건물 정면 스케치 |
분리파 건물 모습 |
1902년 제14회 분리파 전시회는 공간, 조각, 회화,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분리파가 추구하는 총체예술작품의 이상을 극명하게 드러낸 예이다. 전시는 내부 디자인을 맡은 요제프 호프만에 의해 베토벤의 천재성을 기리는 일종의 신전처럼 변형되었는데, 막스 클링거가 제작한 [베토벤 조각상]이 중앙의 홀에 위치하고, 앞 뒤 벽면에는 각각 아돌프 뵈엠(Adolf Böhm)과 알프레드 롤러(Alfred Roller)의 패널화가 전시되었다. | |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상]과 알프레드 롤러의 [저무는 밤] 벽화장식이 보이는 제 14회 분리파 전시회의 중앙전시실 모습 |
구스타프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가 전시된 왼쪽 측랑, 오른쪽 뚫린 벽을 통해 벽화의 공백 부분에서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상]을 볼 수 있도록 했다. |
측랑에 해당하는 전시장 입구 왼쪽 방에는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가 세 벽을 장식했고 (벽화는 전시 종료 후 철거되었으나, 1984년 오스트리아 국립 벨베데레 미술관이 원작과 같은 재료와 재질로 복원해냈다), 맞은 편 방에는 요제프 마리아 아우헨탈러(Josef Maria Auchentaller)와 페르디난트 안드리(Ferdinand Andri)의 베토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관람자의 동선은 왼쪽 방의 [베토벤 프리즈]를 감상한 후 중앙 홀의 [베토벤 조각상]으로 이동하게끔 짜여 있었다. 전시 개막식에서는 구스타프 말러가 편곡하고 지휘하는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제4악장을 빈 교향악단의 연주로 들으면서 삼차원의 공감각적인 총체예술을 경험하도록 했다. | |
구스타프 클림트 [적대하는 힘](베토벤 프리즈 중 가운데 벽화) 1902년, 회반죽에 채색, 다양한 재료 상감, 높이 220cm, 오스트리아 미술관 <출처 : Mefusbren69 at en.wikipedia.org>
분리파의 총체예술 개념은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의 ‘음악극(Musikdrama)’, 즉 무용, 음악, 시와 같은 모든 장르가 하나로 뭉쳐서 창조해 내는 종합예술작품 개념에서 영향을 받았다. 분리파는 예술과 수공예, 주도적인 예술과 주변적인 예술, 서로 다른 장르 등 예술 속의 다양한 구분과 서열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술과 생활, 예술가와 수공예가, 건축물과 장식 등이 나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작품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바그너의 종합예술 개념을 잇는다고 할 수 있다. | |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성공적인 통합, ‘슈토클레트 저택’
빈 분리파의 창립 회원이었던 건축가 호프만과 화가겸 디자이너 모저가 주축이 되어 1903년에 설립한 ‘빈 공방(Wiener Werkstätte)’은 분리파의 영리사업체 역할과 함께 이러한 총체예술의 이상 실현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한 단체였다. 식기와 장신구, 건축에 이르는 빈 공방의 예술 형태들은 호프만이 설계한 [슈토클레트 저택(Stoclet Palace)]에 구현되었다.
벨기에의 부유한 실업가이자 미술 애호가 아돌프 슈토클레트(Adolphe Stoclet)의 의뢰로 지어진 저택과 정원, 가구와 바닥재, 카펫과 은제품 등은 빈 공방에서 제작하여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특히 클림트의 황금빛 대형 모자이크 벽화와 대조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기하학적 무늬의 대리석 바닥과 육중한 가구들로 장식된 식당은 이국적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며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성공적인 통합을 선보였다. | |
구스타프 클림트 [기대](슈토클레트 저택 식당의 벽화) 1905~1909년경 포장지에 템페라와 수채, 분필, 연필, 금은박, 슈토클레트 저택 ©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
구스타프 클림트 [충족](슈토클레트 저택 식당의 벽화), 1905~1909년경 포장지에 템페라와 수채, 분필, 연필, 금은박, 슈토클레트 저택 ©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
1904년 빈 분리파는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클림트 그룹은 응용미술을 강조했고, 그의 후계자 요제프 엥겔하르트(Josef Engelhart)가 이끄는 그룹은 순수미술을 중시했다. 이에 호프만과 올브리히, 클림트를 비롯한 일군의 화가들이 탈퇴하자 분리파의 기세도 점점 기울었다. 빈 분리파의 이상은 일상 용품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총체예술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생활 속의 예술’이라기보다는 호화로운 ‘예술적 파라다이스’에 더 가까웠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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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고자 하며,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부설교육원에서 대중들을 위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오스트리아 미술관, 게티이미지, TOPIC / corb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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