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저스는 뉴욕 양키스와 함께 메이저리그의 양대 명가에 꼽히는 구단이다. 비록 성적면에서는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그동안의 업적을 고려하면 명문이라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1947년 단장 브랜치 리키는 최초로 흑인선수인 재키 로빈슨을 등용하면서 100년 가까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인종의 벽'을 허물었다. 로빈슨과 다저스는 온갖 박해를 견뎌내며 빅리그 역사에 선구자로 남았다.
1957년 구단주 월터 오말리는 프랜차이즈를 로스엔젤리스로 옮기는 파격을 단행했다. 뉴욕의 거대시장을 버리고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것은 말 그대로 '사건'이었다.
1995년 노모 히데오의 신인왕 등극은 새 시대를 알리는 전조였다. 노모와 박찬호의 대활약은 메이저리그의 눈을 아시아시장으로 돌리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밖에 신시내티 레즈와 함께 시작한 최초의 야간경기(1938년), 최초의 정규시즌 라디오 중계(1939년), 최초 연관중 3백만 돌파(1978년) 등 다저스는 명실공히 '메이저리그의 개척자'였다.
다저스는 양키스(26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이상 9회)에 이은 월드시리즈 최다승 4위팀(6회). 그러나 다저스의 사감(史監)에는 쓰라린 기억도 많다. 12번의 월드시리즈 패전은 이 부문 최다기록이다.
다저스에게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라는 '철천지 원수'가 있다. 뉴욕 시절부터 서로 으르렁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은 프랜차이즈 이전 후에도 각각 로스엔젤리스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여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1951년 당시 '황금시대'를 보내고 있던 다저스는 시즌 내내 선두를 유지하다 막판에 가서 자이언츠에게 덜미를 잡혔고, 결국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세계로 울려퍼진 한 방'을 맞았다. 1965년도 최종전에서 자이언츠에게 동률을 허용한 끝에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끝내기 밀어내기로 패했다.
이로부터 28년 뒤인 1993년, 이번엔 다저스가 고춧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다저스와 자이언츠의 시즌 최종전. 다저스는 이미 지구 4위가 확정되어 부담이 없는 상황이었고, 샌프란시스코는 승부의 향방에 따라 지구우승이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였다. 하지만 다저스는 끝까지 물고늘어져 자이언츠의 포스트시즌행을 저지했다.
<아메리칸어소시에이션>의 최강자, 브루클린 브라이드그룸스가 내셔널리그로 활동무대를 옮긴 것은 1890년. 신입생의 전력은 막강했다. 다른 내셔널리그 팀들이 <플레이어스리그>의 출범으로 인한 주전선수들의 유출을 막지 못한 반면, 다저스는 대부분의 선수들을 지켜냈다. 그 해 다저스는 내셔널리그의 '111년 역사'를 개막하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후 부진했던 다저스는 1899년 찰스 에베츠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구단주 해리 반 더 호스트간의 밀약이 성사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에베츠는 다저스 지분의 30%를 반 더 호스트에게 내주는 대가로 오리올스의 네드 헨런 감독과 핵심 선수들을 받아왔다.
1899,1900년에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도 이때 합류한 윌리 킬러, 허기 제닝스, 조 켈리, 짐 허그스, 덕 맥제임스 덕분이었다. 그러나 다저스는 이들이 은퇴한 후 40년동안 리그 우승을 두 번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침체기를 보냈다.
다저스가 명문팀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 것은 1938년 래리 맥파일이 부회장에 취임하면서다. 맥파일은 짧은 5년의 재임기간 동안 전력강화에 매진함은 물론 다저스를 재정적으로 튼튼하고 인기있는 구단으로 만들었다.
맥파일의 뒤를 이은 브랜치 리키는 '황금시대'의 막을 연 주인공이었다. 최초의 팜시스템 개발자로도 유명한 리키는 1947년 '인종의 벽'을 허물었고, 온화한 버트 쇼튼을 감독에 임명했다.
1947년부터 1956년까지 10년간 다저스는 6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내셔널리그 최고의 팀으로 군림했다. 가장 나빴던 해의 성적이 3위일 정도였다. 재키 로빈슨(2루수)은 피 위 리즈(유격수)와 함께 최강의 키스톤 콤비를 이루었으며, 1948년에는 전설적인 명포수 로이 캄파넬라가 가세했다. 1949년은 외야수 듀크 스나이더가 주전으로 도약, 길 허지스(1루수)-캄파넬라의 파워라인에 무게를 더했다.
마운드의 주인공은 돈 뉴컴이었다. 1949년 신인으로서 팀내 최다승인 17승을 거두며 혜성처럼 등장한 뉴컴은 부상에 시달린 1954년만 제외하면 이 기간동안 매년 평균 20승 이상을 올렸다.
황금시대의 최절정은 1953년이었다. 이때 거둔 105승은 아직도 다저스의 최다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특히 타선이 돋보여 다저스는 타율, 출루율, 장타율, 득점, 홈런, 총루타, 도루 등 공격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다저스는 6번 도전했던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에게만 무려 5번이나 패해 아쉬움을 남겼다.
다저스의 복수는 1955년에서야 이루어졌다. 첫 2경기를 모두 패하며 악몽을 되풀이하는 듯 했던 다저스는 3차전에서 2실점 완투승, 7차전에서 완봉승을 따낸 자니 포드리스의 대활약으로 극적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포드리스는 처음 제정된 월드시리즈 MVP의 영광도 안았다.
양키스의 돈 라센에게 월드시리즈 퍼펙트게임의 수모를 당한 1956년, 구단주 월터 오말리는 '팀을 로스엔젤리스로 옮기겠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발표했다. 오말리의 폭탄선언과 함께 다저스의 브루클린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로스엔젤리스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출발은 좋지 못했다.
세번이나 MVP를 수상했던 포수 로이 캄파넬라는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불운을 겪었으며, 재키 로빈슨과 함께 피 위 리즈의 콤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담한 에베츠필드에 익숙해 있던 다저스 타자들에게 메모리얼콜리세움은 허허벌판으로 느껴졌다. 다저스는 1958년 14년만에 리그 7위로 추락하는 아픔을 맛봤다.
하지만 다저스는 이내 새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타선에서는 모리 윌스가 나타나 그라운드를 온통 휘젓고 다녔으며, 돈 드라이스데일과 샌디 쿠펙스의 좌우듀오는 투수왕국의 새역사를 열었다.
1962년은 다저스 역사상 최고의 해로 기록될 뻔했다. 다저스타디움이 개장했으며, 윌스는 47년만에 시즌최다도루기록(104개)을 경신하고 MVP를 수상했다. 드라이스데일과 쿠펙스는 사이영상과 방어율 1위를 나눠가졌으며, '최초의 흑인선수' 로빈슨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하지만 '숙적' 샌프란시스코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샌프란시스코는 무서운 뒷심으로 시즌내내 선두를 달리던 다저스를 동률 1위로 끌어내리고, 타이브레이크 끝에 월드시리즈 진출권을 따냈다.
1963년은 쿠펙스를 위한 해였다. 쿠펙스는 다승(25) 방어율(1.88) 탈삼진(306)의 3관왕을 차지하며 사이영상과 MVP를 동시에 거머줬다. 쿠펙스는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두번의 완투승으로 월드시리즈 MVP까지 석권했다.
이듬해 19승으로 잠시 주춤했던(?) 쿠펙스는 1965년과 1966년, 각각 26승과 27승을 거뒀지만, 좌타자용으로 개발한 사이드암 커브가 화근이 되어 선수생활을 접어야만 했다. 쿠펙스는 '가장 화려했던 4년' 동안 97승27패 1,228탈삼진 방어율 1.86 사이영상 3회, MVP 1회, 월드시리즈 MVP 2회의 기록을 남겼다.
1965년, 다저스는 샌프란시스코에 9월초까지 뒤져있었으나, 막판 13연승으로 극적인 리그 우승을 차지, 1962년의 복수에 성공했다. 미네소타 트윈스와 맞붙은 월드시리즈에서도 쿠펙스의 7차전 완봉승으로 두번째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가져왔다.
이듬해 다저스는 다시 내셔널리그를 제패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4연패로 물러났다.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극심한 팔꿈치 통증을 느꼈던 쿠펙스는 2차전 6이닝 4실점(1자책)으로 마지막 무대를 패전으로 장식했다. 쿠펙스의 은퇴 이후 다저스는 8위, 7위, 4위에 머무르며 화려했던 60년대를 마감했다.
다저스가 피터 오말리 체체로 막을 연 1970년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는 다저스와 신시내티 간의 격전장이었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의 10시즌 동안 둘이서 지구 우승을 나눠가진 것만 아홉번(신시내티 6회, 다저스 3회). 또한 그 중 일곱번은 나란히 1·2위에 올랐다.
두 팀의 스타일은 정반대였다. '빅레드머신'으로 대표됐던 신시내티가 자니 벤치, 토니 페레즈, 조 모건, 피트 로즈, 조지 포스터, 켄 그리피 시니어의 기관총 타선을 내세웠다면, 다저스는 돈 서튼, 클로드 오스틴, 앤디 메서스미스, 버트 후튼, 토미 존, 마이크 마셜의 마운드에 승부를 걸었다. 물론 70년대 내셔널리그의 최강자는 신시내티였지만, 그들을 가장 괴롭힌 상대가 다저스였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 다저스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최고의 내야진이었다. 스티브 가비(1루수)-데이비 룹스(2루수)-빌 러셀(유격수)-론 세이(3루수)로 구성된 다저스의 내야는 메이저리그 최강이자 최장(最長)의 내야진이었다. 1973년에 구축된 이 멤버는 무려 1981년까지 이어졌다.
1974년, 신시내티에 번번히 무릎을 꿇었던 다저스는 102승으로 신시내티를 4경기 차로 눌렀다. 서튼과 메서스미스가 39승을 합작했고, 지미 윈이 32홈런을 날렸으며, 마셜은 마무리투수로서는 경의적인 106경기에 출장, 208이닝을 던지며 불펜투수 최초로 사이영상을 차지했다.
토미 라소다가 감독에 취임한 1977년과 그 이듬해, 다저스는 2년 연속으로 신시내티를 2위로 밀어내고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1978시즌이 끝나자 신시내티는 우승 실패의 책임을 물어 스파키 앤더슨 감독을 해임했다. 앤더슨의 해임으로 시작된 빅레드머신의 해체는 결국 다저스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따낼 수 있었던 2번의 기회를 '미스터 10월' 레지 잭슨이 이끈 뉴욕 양키스에 막혀 모두 놓치고 말았다.
1981년 다저스에는 '공포의 신인' 페르난도 발렌주엘라가 등장했다. 발렌주엘라는 에이스 제리 로이스 대신 등판한 개막전에서 2-0 완봉승을 거뒀고, 결국 그해 신인왕과 사이영상을 석권하며 '페르난도마니아'를 불러왔다.
파업으로 시즌이 단축되며 승률 상위 4개팀이 맞붙었던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다저스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차례로 격파하고 월드시리즈에 나섰다. 상대는 상대전적 1승8패의 뉴욕 양키스.
다저스는 로이스와 후튼이 나선 1·2차전을 모두 패하며 역사를 되풀이하는 듯 했지만, 3·4·5차전의 홈경기를 모두 1점차로 잡아내 전세를 역전한 후, 6차전에서 외야수 페드로 게레로의 방망이가 폭발하며 사상 5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47년 이후 월드시리즈 우승 5회, 리그 우승 14회를 기록하며 내셔널리그의 '영원한 강호'로 군림했던 다저스는 1981년을 기점으로 그 '영원한'이란 꼬리표를 떼어냈다. 1983년과 1985년에 지구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덜미를 잡혔으며, 1986년과 1987년에 올린 .451의 승률은 20년만에 나온 최악의 성적이었다.
오렐 허샤이저가 진정한 '불독'의 힘을 보여준 1988년, 다저스는 다시 지구 1위로 올라섰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데려온 외야수 커크 깁슨은 28홈런으로 공격을 주도했으며, 허샤이저는 선배 드라이스데일이 가지고 있던 연속이닝무실점기록을 '59'로 늘렸다.
하지만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점치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허약한 공격력으로 데이빗 콘-드와이트 구든-론 달링으로 이어지는 메츠의 삼각편대를 뚫을 수 있을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한다면 104승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대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다저스에는 허샤이저가 있었다. 비록 허샤이저는 팀타선의 불발로 챔피언십 1차전과 4차전에서 모두 패전의 멍에를 안았지만, 7차전의 완봉승으로 다저스를 월드시리즈로 이끌었다. 오클랜드와 격돌한 월드시리즈, 호세 칸세코와 마크 맥과이어의 '배시 브라더스'도 허샤이저 앞에서는 솜방망이에 지나지 않았다.
허샤이저는 2차전의 완봉승, 최종전인 4차전의 2실점 완투승으로 챔피언십 시리즈 MVP, 월드시리즈 MVP를 동시에 수상했다. '부상병' 깁슨은 1차전 9회말에 대타로 등장, 당대 최고의 마무리투수였던 데니스 에커슬리로부터 극적인 대타홈런을 뽑아냄으로써 기선제압의 일등공신이 됐다.
극적인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다저스는 다시 추락하기 시작했다. 1991년 대럴 스트로베리와 브렛 버틀러의 영입으로 잠시 활기를 되찾는 듯 했지만, 1992년에는 99패로 그 해 메이저리그 최악의 승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다저스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것은 40년전 브랜치 리키가 다져놓은 '신인농장'이었다. 1992년에는 에릭 캐로스가 나타나 에디 머레이로부터 1루를 물려받았으며, 1993년에는 마이크 피아자가 신인포수 최다홈런기록을 35개로 늘렸다. 1994년에는 라울 몬데시가 강견을 자랑하며 메이저리그 신인 어시스트기록(16개)을 세웠다.
1995년에는 '토네이도 열풍'이 불었다.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다승왕 출신인 노모 히데오는 전매특허인 포크볼을 내세워 236개의 탈삼진을 기록, 새로운 '닥터 K'로 부상했다. 1996년 토드 홀랜스워스의 신인왕 수상으로 다저스는 신인왕 제도가 도입된 1947년 이후 최초로 5년 연속 신인왕 배출이라는 뿌듯한 기록을 세웠다.
1995년 다저스는 홈런군단 콜로라도 로키스를 꺾고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처음으로 치러진 디비전시리즈에서는 신시내티에게 3연패로 물러났다.
1996년 7월 토미 라소다는 심장이상으로 쓰러지며, 20시즌 동안의 감독생활을 마감했다. 빌 러셀 대행체제로 시즌을 마무리한 다저스는 와일드카드를 획득했지만, 다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게 3연패의 수모를 당했다.
1998년 3월19일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됐다. 구단주 피터 오말리가 더 이상 구단을 운영할 능력이 없다며 다저스를 FOX의 루퍼트 머독에게 넘긴 것이다. 48년간 이어졌던 오말리家의 지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소유한 테드 터너와의 경쟁심 때문에 야구판에 뛰어든 머독은 전폭적인 투자를 시작했지만, 다저스는 이로 인해 급체하고 말았다. 전통적으로 팜을 중시하는 팀에게 주어진 백지수표는 그저 어색한 돈일 뿐이었다.
시즌 중반 다저스는 '프랜차이스 플레이어'인 마이크 피아자와 3루수 토드 질을 플로리다 말린스로 보내고 게리 셰필드, 바비 보니아, 짐 아이젠라이크, 찰스 존슨을 받아오는 '블럭버스터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하지만 충격요법의 전혀 효과는 없었고, 성적은 더 떨어져 지구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99시즌을 앞두고 다저스는 사상 최초의 억대계약으로 케빈 브라운을 영입하고, 새사령탑으로 명장 데이비 존슨을 데려왔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2000시즌에는 숀 그린까지 보강하며 월드시리즈 우승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오히려 대표적인 '밑빠진 독'으로 전락했다.
2001시즌이 끝나면서 다저스에는 몇가지 변화가 생겼다. 다저스를 추락의 늪으로 내몰았던 케빈 말론 단장이 물러났으며, 짐 트레이시 감독이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한 것.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난 연봉을 줄이기 위해 박찬호 등 기존의 전력을 대폭 물갈이했다.
올시즌 다저스는 일본에서 영입한 이시이 가즈히사, 게리 셰필드를 내주고 데려온 오달리스 페레스 등 투수진이 맹활약하며 예상 밖의 선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방망이의 지원 없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