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line of Assyriology
1803 독일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 다리우스 비문의 일부해독 1818 영국의 풍경화가 "로버트 커 포터" 베히스툰 산의 풍경화 유럽에 소개 (1822 샹폴리옹 로제타석 해독) (1829 제1차 세계고고학 협회 회의) (1830 "카를 오트프리트 뮐러" ,고고학 입문서> 출간) 1833 "찰스 텍시어" 소아시아 탐사하여 히타이트의 하투세스 발견 1835 "H.C.롤린슨(Henry C. Rawlinson)" 베히스툰 비문 발견 1836 "F.체스니" 증기선으로 유프라테스 항해 시도 1842 "폴 에밀 보타(P.E. Botta)" 쿠윤지크(니네베) -두르샤르킨(사르곤 2세의 코르사바드 성벽)발견 1843 프랑스 내무부 에밀보타 공식 지원 1846 "롤린슨" <페르시아의 설형문자 개론> 출간 1847 에밀보타 발굴종료, 루브르 아시리아박물관 개관
쐐기문자가 본격적으로 해독되기 이전에는 고대메소포타미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오로지 베로수스(*註1), 헤로도토스, 크세노폰 등의 완벽히 전해지지 않는 역사서 들과 호머의 작품, 그리고 구약성서에서 전하는 단편적인 내용들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사실 매우 불확실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애매모호한 전설과 성경 속의 뜻 모를 구절들만이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할 뿐,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에 전해내려오는 바빌로이나 아시리아의 화려한 궁전이나 장엄한 신전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저기에 솟은 완만한 둔덕들은 누가 보아도 그저 자연이 만든 낮은 산일 뿐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대한 인류의 망각은 이 시절의 학문이 주로 이집트에 관련되어 있었고, 이집트가 바로 인류의 발상지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성경에 무려 152차례나 언급된 아시리아 제국이나 에덴동산은 다만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Robert Ker Porter
(1) Q_032 - Nimrud (March 1911) :Nimroud [Ruins of Ziggurat - Tower of the Ezida, the tower of the god Nebo in Borsippa (a ziggurat or Mesopotamian tower temple). Once thought to be the Tower of Babel, until the discovery of Esagila, the great temple of Morduh in Babylon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2) 커 포터가 모술 근처의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비루스 님루드(Birs Nimrud)를 그린 그림으로 이것이 약 79m 높이에 달하는 신전양식의 지구라트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계산한 바로는 약 49m)
(1) drawing of defeated rebels from the Bisitun relief (2) Persian porter (3) Drawing of a colossal bull in the ‘Gate of All Nations’ at Persepolis (4) drawing of decoration on the tomb of Xerxes at Naqsh-i Rustam (5) Capitals of columns &c. at Persepolis
종군화가였던 로버트 커 포터(Sir Robert Ker Porter, 1777–1842)는 한때 엄청난 찬사를 받았지만 그의 그림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는 단색으로 펼쳐진 메소포타미아의 장엄한 풍광과 말없이 증언하는 고대의 기념물들에 크게 감동받은 나머지 자신의 화풍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는 작품을 남기기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고, 비루스 님루드의 지구라트의 경우에서와 같이 바빌로니아 탑의 용도를 순전히 직관에만 의지해 정확한 추론을 해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많은 그림과 설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박물관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궤짝에 쳐박혀있던 유물들이 과학적인 분류과정을 거쳐 전시되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그것들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고대 동방의 기념눌들에 대해서도 수요가 일기 시작했다. 이제 그 수요를 채워줄 탐험가들을 시대는 필요로 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볼 수 있는 언덕은 때론 그냥 언덕이 아닐 수 있다. 이 지역의 지명에 흔히 붙는 "tell"이라는 접두어는 아라비아어로 둔덕(언덕)을 의미하는데 실로 오랜 역사의 도시들이 그 흙무더기 안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도시는 때로는 이전 도시의 폐허위에 그대로 건설되는 경우도 많았다. 위의 스케치는 레이어드(A. H. Layard)가 니네베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언덕을 그린 것으로 보통의 안목이 아니면 이 엄청난 고대의 역사를 보고도 스쳐 지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통찰력과 열정을 지닌 사람들의 역사가 바로 메소포타미아 발굴의 역사이다.
Paul-Emile Botta
"What can all this mean? Who built this structure? In what century did he live? To what nation did he belong? Are these walls telling me their tales of joy and woe? Is this beautiful cuneiformed character a language? I know not. I can read their glory and their victories in their figures, but their story, their age, their blood, is to me a mystery. Their remains mark the fall of a glorious and a brilliant past, but of a past known not to a living man." "I had the first revelation of a new world of antiquities.- P.E. Botta
성서의 진실을 증명해 준 것으로 여겨진 스미스의 대홍수 토판문서는 이라크의 니느웨에서 출토된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적대 세력 앗시리아의 수도였다. 서기전 7세기경 요나라 불리는 이스라엘의 한 예언자가 있었다. 야훼는 그로 하여금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선교를 하기 바랐다. 하지만 해외 정세에 밝았던 예언자로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시무시한 전쟁술을 발전시킨 앗시리아의 수도를 선교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야훼의 명령을 피해서 당시 사람들이 지중해 건너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하던 스페인의 무역 도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 바다에 풍랑이 몰아쳐 파선의 위기에 놓이자 사람들은 누군가 신에게 죄를 지은 결과라고 해석하였다.
바다의 신에게 인신공양을 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결국 요나가 당첨되었다. 요나는 바다에 산 채로 던져졌고 커다란 물고기가 그를 삼켰다. 사흘이 지난 후 물고기가 요나를 해변에 토해내는 바람에 그는 겨우 목숨을 건졌고 원래의 목적지 니느웨에 도착하여 소명을 수행하였다. 니느웨는 오늘날 이라크의 북부 도시 모술의 티그리스 강 건너편에 자리잡은 거대한 유적지이다. 이곳에는 이슬람의 요나 사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의 무덤 위에 건설되었다고 전해진다.
나폴레옹에 의한 이집트 발굴과 조사에서 우위를 점한 프랑스는 그 어느 열강보다도 먼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탐사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첫 번째 발굴지로 니느웨를 선택했고 1840년 에밀 보타를 니느웨가 위치한 모술의 영사로 파견하였다. 이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7년 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고대 근동의 유적들과 문화재에 익숙해진 보타는 모술의 시장에서 닥치는 대로 골동품을 사들였다. 하지만 그의 원래 목적은 유물들의 출처를 알아낸 후 유적지 자체를 발굴하는 것이었다. 예언자 요나의 무덤 사원이 있는 네비 유누스 언덕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골동품을 캐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보타는 그곳을 발굴하려 했지만 예언자의 신성을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보타는 할 수 없이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쿠윤직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비록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할 만한 보물들을 찾아낼 수 없어서 실망스러웠지만 1842년의 니느웨 발굴은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폴 에밀 보타는 1840년 티그리스 강변의 모술이라는 오스만 제국의 도시에 프랑스 영사관 영사로 취임했다. 모술은 페르시아 만의 바스라와 터키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고 그 무렵 오스만 제국이 힘을 잃어가자 유럽 열강은 다투어 서아시아의 발판을 모술에 마련하려고 하였다. 그가 프랑스를 떠나올 때 독일의 아시아학자 "줄리우스 몰"은 대영박물관의 메소포타미아벽돌에 새겨진 설형문자에 주목하고 모술에서의 기초적인 탐사를 부탁한바 있었다. 보타는 니느웨에 있는 퀸지크(양떼) 언덕을 1년간이나 별 소득 없이 발굴해보기도 했지만, 드디어 1843년 5월 24일, 모술에서 16㎞ 떨어진 코르사바드에서 찾아온 한 사람의 제보로, 비록 니네베는 아니었지만 그때까지 전혀 실체를 알 수 없었던 아시리아 제국의 궁성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사르곤의 성채인 두르샤르킨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두르 샤르킨(Dur-Sharrukin)"은 사르곤의 성채라는 뜻의 도시로 현재 이라크의 코르사바드(Khorsabad)에 위치해 있다. 사르곤 2세 시절에 아시리아의 수도로 모술에서 15km 북동쪽에 위치한다. 사르곤 2세의 사후 제국의 수도는 남쪽으로 20km 떨어진 니네베로 옮겨간다.
그런 와중에 학자들은 이 거대한 기념물들에 대해 점점 뜨거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문의 해독을 원했던 것이다.
Village of Khorsabad Towards ziggurat from palace Reconstructed temple outside citadel (1975)
Gates 5 and 6 (1975) Gate B2 from Southeast High citadel wall at S-w corner (1975)
Displayed in the Louvre
1) Winged genie with spath-(pollen), and pollen/spath-bucket before a Tree of Life panel-(at other museum), giving its blessing. Relief from the north wall of the Palace of king Sargon II at Dur Sharrukin in Assyria (now Khorsabad in Iraq), 716–713 BC. (Department of Oriental Antiquities, Richelieu, ground floor, room 4) 2) Human-headed winged bull. Relief from Palace of Sargon II at Khorsabad. Excavations of Paul-Émile Botta, 1843–1844.
Khorsabad (Dur Sharrukin), ca. 720-705: reconstruction of citadel,
[출처] 장 보테로著 "메소포타미아, 사장된 설형문자의 비밀"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영문위키 웹진 <ANTIQUUS> Dol's fantasy http://www.uned.es/geo-1-historia-antigua-universal/MESOPOTAMIA/zigurats.htm The Oriental Institute -Archaeological Site Photographs: Mesopotamia: Khorsobad [참고] CATHOLIC ENCYCLOPEDIA: Berosus The Legend of the Creation According to Berosus and Damascius The Babylonian Legends of the Creation and the Fight Between Bel and the Dragon told by Assyrian Tablets From Nineveh Discovery of the Tablets A HISTORY OF ART IN CHALDÆA & ASSYRIA -엄청난 인터넷자료입니다 Part I: The Athenian Empire | Part II: Antediluvian Egypt | Part III: Nimrod Hunting | Part IV: The Beast from th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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