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쁘티팔레' 전경
이번 주 서성록 교수(안동대)의 ‘렘브란트를 찾아서’는 성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린 렘브란트의 그림에 대한 서 교수의 평론을 싣는다.
짧은 여행기간이었지만 짬을 내어 파리를 다녀올 일이 생겼다. 개선문 인근에 있는 ‘쁘티 팔레(Petit Palais)’라는 미술관에서 대대적인 렘브란트 판화전을 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탈리스’라고 불리는 국제열차를 타고 서둘러 ‘쁘티 팔레’에 도착해 보니 예쁜 외관과 석조건물의 장식이 인상적이었다.
미술관 안에 호젓한 정원이 있어 방문객들을 한층 편안하게 맞아 주었다. 미술관 곳곳 방문객에게 작품을 감상하는 데 최선을 다하려는 관계자들의 세심한 배려가 묻어났다. 전시 디스플레이에서 안내문 설치, 헤드폰을 이용한 작품설명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한 부분이 없었다.
미술관 운영이나 관리 면에서 그들은 철저함을 보였다. ‘예술 강국’이 그냥 붙여진 이름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자그마한 미술관만 해도 고대의 공예품에서 중세, 르네상스의 기독교 회화와 조각, 17세기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회화, 프랑스 바르비종파에서 인상주의 회화 등 각 시대의 미술품을 폭넓게 소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둘씩 모은 예술품이 이제는 국가의 저력을 떠받치는 듬직한 버팀목 구실을 해주는 것이다.
‘쁘티 팔레’에서 열린 렘브란트 특별전은 성경 내용을 테마로 삼은 판화 전작품을 빠짐없이 전시하고 있었다. 초기에서 말년까지 그가 평생토록 제작한 성경판화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때맞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렘브란트, <목자들의 경배:야경>(에칭, 1652) |
내가 눈여겨 본 작품은 <목자들의 경배:야경(에칭,드라이포인트, 1652)>이다. 이 그림은 들판에서 천군천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들은 목자들이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도착했을 때의 감격적인 광경을 보여준다.
주위는 깊은 밤에 빠져 있다. 너무 잠잠해 세상은 누가 왔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지상에 온 예수는 포대에 쌓여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 옆에서 마리아가 몸을 웅크린 채 아기를 사랑스럽게 지켜보고 요셉은 책을 읽으며 처자를 돌보는 중이다.
오른쪽 구석에서 나오는 불빛은 호롱불이 아니라 아기 예수에게서 나오는 신성의 광채거나 은혜의 불빛으로 풀이된다. 렘브란트는 인공의 호롱불과 은혜의 불빛을 대조시켜 그분의 신성을 강조한다.
광야에서 방금 도착한 목자들은 왼쪽에 포진되어 있다. 어둠에 휩싸여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들은 아기 예수께 경의를 표하며 정중하게 경배를 드리고 있으며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일제히 아기 예수를 바라본다.
그런데 이 판화는 유난히 어둡다. 하도 어두워서 형체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다. 렘브란트의 ‘녹턴’ 그림은 밤풍경을 그린 까닭에 대체로 어두운 편이지만 이처럼 어둡지는 않다. <그리스도의 매장>처럼 슬픈 장면을 표현할 때는 이해한다고 해도 ‘메시아의 탄생’을 전달하는 그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어떤 의미가 이 판화에 내포되어 있을까.
<목자들의 경배>는 판화치고는 음영이 뚜렷해 마치 흑백으로 된 유화같은 느낌을 준다. 판화이면서도 판화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이 그림이 무채색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선 중심이 아니라 톤 중심으로 되어 회화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인물을 처리할 때도 선의 흔적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선보다는 음영으로 인물을 형상화하는 독특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렘브란트 같은 거장만이 해낼 수 있는 남다른 측면이다. 발디누치(Baldinucci)는 “렘브란트가 진정으로 두드러진 것은 동판의 에칭작업을 할 때 그가 발현해 낸 가장 눈부신 수법에 있다. 그 수법은 그 자신만의 것으로 어떤 사람도 사용해본 적이 없고 또 다시 볼 수도 없는 수법”이라고 했다. 사실 그의 판화에서 발견되는 자유자재의 스트로크, 자연스러움, 깊이있는 공간, 명암법은 다른 어떤 판화작가와도 비교할 수 없다. 렘브란트는 주위를 어둡게 처리하여 아기 예수와 가족, 그리고 목자들에게만 시선을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등장인물의 동작 하나하나와 표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그 덕분이다. 중요한 메시지를 들을 때 귀를 쫑긋 세우듯이 메시아와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었다.
이 작품의 진가는 기법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 현장으로 시공간을 넘어 안내하고 있다는 데 있다. 렘브란트는 성경의 기록에 따라 2천년 전의 어느 마굿간에서 일어난 일을 군더더기 없이 묘사하였다. 자신의 어떤 기발한 상상력이나 미숙한 주관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기록에 대한 주의깊은 통찰과 묵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렸다. 단순한 관찰자로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섬기는 예배자로서 예수 탄생의 사건현장 속에 그 자신이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보다시피 그림에서 아기 예수는 보잘것없는 곳에 오셨다. 그를 반기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부모와 복장이 남루한 목자들 뿐이다. 그 분은 우리처럼 타이틀을 중시하지 않으셨고 지위를 따지지도 않으셨다. 주위의 시선을 신경써 겉을 화려하게 장식하지도 않으셨다. 만유의 왕이셨지만 낮고 비루한 곳에, 그것도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가정을 택하여 오셨다.
그림이 어두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자신을 전혀 내세우지 않으시고 우리와 같이 피조물이 되신 그 분의 겸손을 잘 나타내 준다. ‘겸손’이라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자기부인’이라는 표현이 더 옳지 않나 싶다. 처음에는 자기 영광을 버리시더니 나중에는 온갖 수모와 멸시를 참으시고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분, 지금 그 분이 오신 것을 소수의 사람들만이 축하하고 기뻐하고 있다.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