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즉, 韓中日의 古代 歷史는 모두 거짓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종족들의 뿌리 부터 잘못 설정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中華人民共和國을 형성하고 있는 가장 많은 종족을 漢族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의 漢族들은 오리지널 漢族이 아닙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의 漢族들은 淮水 남쪽의 倭人들로 추정되는 남방계 종족과 漢族의 原流인 華夏族의 西晉 왕조와의 혼혈종족이 지금의 漢族인 것입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오리지날 漢族은 소수민족일 뿐이며 다수의 남방계 漢族은 西晉이 멸망하자 西晉의 司馬氏 잔당들이 지금의 揚子江 일대로 망명을 떠 났고 揚子江 일대의 남방계 토호 세력과 결합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혼혈 漢族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倭人들에 대한 오해 입니다.
우리가 倭=日本이라는 선입견으로 倭라는 종족을 바라 보기 때문에 동아시아 역사의 근간이 무너 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오랑캐"라는 지극히 漢族 중심적 용어에 우리가 매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랑캐라고 하면 야만적이며 노략질을 일삼는 북쪽의 종족들을 聯想하지만 오랑캐란 역사를 쓴 漢族들의 시각일 뿐입니다.
대륙 역사의 종족적 뿌리는 중원 서쪽의 유목민족인 원시 투루크 계열의 종족들입니다.
이들이 동쪽으로 이동 하면서 농경민족으로 변모 했으며 대륙 동쪽의 倭人들과 혼혈종이 나온 것입니다.
바로 이 혼혈종들이 현재의 우리와 같은 모습의 종족들입니다.
劉邦의 漢나라는 오리지널 華夏族이 세운 나라입니다.
우리 역사의 근간인 신라 역시 건국 과정에서 華夏族이 참여를 했다 라는분명한 기록이 존재 하기 때문에 우리의 혈통에는 분명히 華夏族의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입니다.
또한 新羅안에는 倭人들이 가득 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의 혈통에는 倭人들의 피가 흐른다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백제는 그 자체가 矮人들의 나라로 보입니다.
즉, 우리가 倭人들을 부정하고서는 우리 역사가 불완전 완성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樂浪朝鮮과 高句麗라는 나라 역시 華夏族으로 보입니다. 東夷는 華夏族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만, 樂浪朝鮮과 高句麗라는 나라의 뿌리인 夫餘와 鮮卑族은 유목민족인 淳維인 것입니다. 鮮卑와 夫餘는 淳維(匈奴) 입니다. 淳維는 黃帝軒轅의 苗裔 입니다. 이제 華夏族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北方係 漢族의 형성과정
유목민족의 가장 큰 부족의 군장이였던 炎帝는 자신들의 부족민들이 항상 이동하는 유목생활로는 궁핍함을 모면할 수 없다고 생각 했지요. 이에 따라 炎帝는 자신들이 이동하지 않고서도 주위에서 자라는 풀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풀을 일일이 자신이 먹어가면서 구분을 했다고 합니다. 이 결과를 가지고 炎帝는 자신들의 부족민들에게 먹을 수 있는 풀을 경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쳣던 것입니다. 당시로 봐서는 염제의 농경은 혁신이며 혁명이 였던 것입니다. 혁신은 필연적으로 반발하는 세력이 나타나는 것이며 이 반발 세력의 또 다른 부족의 군장이 蚩尤天王입니다. 蚩尤와 炎帝와의 싸움에 黃帝가 炎帝의 편을 들어 73차례의 전쟁을 치루었다고 하지요. 이것이 인류 최초의 大戰이라는 "涿鹿大戰(탁록대전)"입니다. 참고 : http://cafe.daum.net/mijiwon/OV4W/涿鹿大戰 그러나 黃帝는 蚩尤와의 전쟁 이전에 炎帝와의 전쟁을 통해 염제의 부족을 지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추정컨데 이 과정에서 黃帝는 炎帝의 농경사회를 받아 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黃帝가 蚩尤를 물리치고 천하통일을 한 이후 黃帝의 苗裔의 나라인 夏 왕조는 농업을 하기 위한 治水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春秋時代의 200여개에 달하는 모든 나라들의 왕조는 周王朝의 친인척들의 혈통들 입니다.
周武王은 黃帝의 苗裔 입니다.
따라서 炎帝의 후예인 姜齊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모두 黃帝의 苗裔들인 것입니다.
역사가 歪曲되었을 뿐이지 황하 북쪽의 나라들은 모두 유목의 傳統을 따르는 황제의 묘예 왕조들이며 황하의 남쪽은 농경을 하는 黃帝와 炎帝의 후예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농경사회를 이룬 황제와 염제의 후예들을 華夏族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들이 순수한 혈통의 오리지날 漢族들인 것입니다.
먼 훗날 秦나라가 富國强兵의 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은 灌漑施設의 인프라가 잘 되어 있었던 關中平原의 곡창지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하 북쪽의 유목민족들은 형성과정은 夏 王朝의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권력을 빼앗긴 하 왕조의 잔단들이 북쪽으로 달아나 유목생활을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라고 史記 夏本記는 傳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목민으로 돌아간 하왕조의 유목민들을 淳維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마천은 史記를 통해서 匈奴라는 이름은 본래 淳維(순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순유의 苗裔들은 獯鬻(훈육)과 獫狁(험윤)으로 불리워 오다가 급기야 司馬遷에 의해 匈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이며 이 匈奴는 현재 까지 유목민족의 代名詞가 된 것입니다.
《史記索隱》引用張晏記載,在商朝建立時,淳維向北方。 장안의 기록을 인용한다면 상나라가 세워질 당시에 순유는 (상나라의) 북방에 있었다. 此外,又記載淳維為夏桀之子, 이 밖에 또 순유는 하나라 걸왕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라 걸왕은 夏后의 氏라고 하며 夏나라 마지막 임금이라고 하지요. 夏后란 "중국 始祖 즉, 黃帝를 의미하는 용어 입니다. 즉, 흉노의 족보는 중국의 시조인 黃帝로 부터 시작 됨을 알수 있는 기록 입니다. 이 대목에서 中華人民共和國의 略稱인 中國과 中原(關中平原)을 지배하던 왕조를 의미하는 中國과 혼동하면 안됩니다. 지금의 중공을 중국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고대 중국과 지금의 中共을 동일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名為獯粥。 이름은 훈육이라 한다. 즉, 夏代의 흉노는 燻㣃이라 불리웠으며, 獯이라는 漢字는 "개를 불에 구워 먹는 오랑캐"라는 의미 입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확국은 三皇五帝를 자기들의 시조들이라고 주장을 하면서도 염제의 후예인 淳維를 오랑캐이며 야만족이라는 이중적 역사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史記》〈匈奴列傳〉: 「匈奴,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曰淳維。」 흉노, 그 선조는 하후씨 이며 묘족의 후예이며 순유리고 한다. 夏后는 炎帝 또는 炎帝의 後裔를 의미 합니다. 《史記索隱》: 「張晏曰:『淳維,以殷時,奔北邊』。 장안이 말하기를 '순유는 은나라 이후 북쪽으로 옮겨 갔다. 이 기록은 순유는 은나라가 멸망한 후 북쪽으로 쫓겨 간 은나라의 잔당들이라는 의미의 기록 입니다. 즉, 흉노의 족보는 夏나라와 殷나라의 왕족이라는 의미 입니다, 夏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桀王(걸왕)이 폭정을 하다가 상나라에게 멸망을 하자 하나라의 왕족들이 북쪽(산서성 일대)으로 달아난 사람들을 淳維(순유)라고 하며 이들 순유를 상나라 사람들이 山戎과 獫狁﹑葷粥등으로 불리웠던 것입니다. 즉, 淳維는 모두 顓頊高陽氏의 후예들이며 전욱고양은 黃帝의 孫子이기 때문에 순유는 黃帝의 후예 입니다. 또한 순유만을 苗裔(묘예)라고 하는데 순유만을 묘예라고 하는 뚜렸한 이유는 찿을 수 없습니다. 商나라는 순유의 후예인 주나라에 의해 멸망을 하는 것입니다. 주무왕은 자신의 동생들과 왕족들을 각지역에 봉직을 하고 나라를 세우도록 했기 때문에 춘추시대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주왕조와 같은 姬性들 입니다. 따라서 全國七雄이라고 하는 나라 가운데에 姜太公의 齊나라를 제외한 모든 왕조는 전욱고양의 후예들인 것입니다. 黃帝의 후예인 周武王이 炎帝의 후예인 商나라를 멸망시키자 상나라의 귀족 또는 왕족이였던 孤竹國이 있던 곳으로 망명을 떠난 사람들이 伯夷와 叔齊라고 하지요. 즉, 伯夷와 叔齊 그리고 箕子는 商나라의 왕족이거나 귀족들인 것입니다. 春秋戰國時代 까지 姜太公의 齊나라와 楚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은 황제 苗裔들의 나라들이며 이들을 東夷族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염제의 후예 성씨들의 집성촌이 河南과 安徽省 山東省 서쪽 일대에 많은 이유 입니다. 바로 黃帝와 炎帝의 후예 가운데에 농경민족화 된 사람들이 華夏族이라고 불리우는 "北方係 漢族의 源流" 입니다. "北方係 漢族의 源流" 地域 이들이 殷墟(은허)의 甲骨文字를 만든 사람들 입니다, 지금도 갑골문자가 우리 조상이 만든 문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지 않은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華夏族은 우리 上古時代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新羅는 대다수의 화하족과 소수의 高句麗 百濟人들이 세운 나라 입니다. 또한 高句麗 왕조의 桂婁部와 灌奴部는 華夏族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高句麗 王朝의 高씨들은 炎帝의 後裔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리를 伯夷라고 하지요. 또한 백이와 숙제가 들어간 곳은 孤竹國이라고 하며 배구열전의 기록으로는 고구리의 위치는 孤竹國이 있었던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孤竹國의 위치는 산서성 서남쪽 薄板 땅입니다.
산서성 서남쪽은 遼西이며 西安平 또는 安平과 平州라는 이름으로 물갈이 되는 땅입니다.
고구리 전성기 때의 산서성 서남쪽은 고구리 영토 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孤竹國의 고구리는 消奴部로 보이며 이들이 夫餘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여의 消奴部 解씨 왕조는 황제의 후예 입니다.
高句麗라는 나라를 解씨 夫餘와 高씨 高句麗로 구분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입니다. 叔齊의 "叔"이란 서열상으로 "伯"의 다음을 의미하는 용어 입니다. 商나라를 세운 湯王은 黃帝의 후예라고 하지요. 《史記》〈匈奴列傳〉: 「匈奴,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曰淳維。」 흉노, 그 선조는 하후씨 이며 묘족의 후예이며 순유리고 한다. 夏后는 黃帝 後裔인 전욱고양을 의미 하는 것이며 夏, 商, 周, 先溱時代와 春秋戰國時代의 모든 왕조의 임금들은 황제의 후예들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부여와 고구리 隨, 唐으로 이어지는 대륙의 모든 왕조는 모두 黃帝의 苗裔들이며 王侯將相의 씨는 따로 존재 했음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초원 스탭 이렇게 북으로 이동한 黃帝의 後裔들이 모여든 곳이 지금의 山西省 일대와 내몽골 일대 입니다. 위지도의 雲城일대가 消奴部가 있던 곳으로 보입니다. 결국 염제의 후에들과 황제의 후예들은 북쪽의 遼東과 河南의 華夏族으로 이웃하는 것입니다. 夫餘의 解慕漱(해모수) 解氏(해씨) 王朝의 消奴部와 모든 鮮卑族(선비족)은 모두 黃帝의 후예들인 것입니다. 鮮卑族은 크게 6개의 부족이였지요. 작게는 그 보다 훨신 많았을 겁니다. 모든 선비족은 夫餘에서 나온 黃帝의 후예이며 선비족을 眞朝鮮이라 부르는 것이며 모든 선비족은 고구리와 同種同類 입니다. 桂婁部의 위치는 지금의 南四湖 북쪽 일대인 鄒城일대로 보입니다. 消奴部와 桂婁部는 혼인 관계로 맺어 지면서 자연 스럽게 해씨 왕조에서 고씨 왕조로의 승계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주나라 멸망이후 황제의 후예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들이 아래 지도의 三晉(趙, 魏, 韓) 입니다. 위 지도에서 보듯이 현재 중공의 역사는 三晉의 韓나라를 산서성 남쪽으로 비정하지만 韓나라의 실제 위치는 하남의 북쪽 일대의 나라로 보입니다.
그리고 趙나라의 위치 또한 더 남쪽으로 보이며 산서성 동남쪽 까지 비정된 조나라의 영토는 거짓입니다.
趙나라의 영토를 산서성 동남을 넘어 하북성 남쪽 까지 그리는 이유는 邯鄲을 지금의 邯鄲을 趙나라의 國都 였다 라는 것 때문입니다.
지금의 邯鄲은 절대로 趙나라의 國都였던 邯鄲이 아닙니다. 즉, 春秋時代란 黃帝와 炎帝의 후예 부족들이 각기 부족단위의 나라를 형성하던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춘추시대의 나라들은 國境線이 그려진 나라가 아닙니다. 三晉이 우리 역사가 아니라면 동아시아 역사의 실제의 흐름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참고 : http://cafe.daum.net/mijiwon/OkwR/2/太原 鮮于氏, 淸州 韓氏, 幸州 奇氏
주나라가 멸망한 이후 三晉의 영역과 ●箕子朝鮮의 위치가 겹친다는 것은 정말 동아시아 고대사가 제대로 된 역사인지 의심 이가는 대목입니다. 箕子朝鮮의 위치는 지금의 산서성 일대이며 삼진의 위치와 정확히 겹친다는 것입니다. ※참고 : http://cafe.daum.net/mijiwon/OkwR/8/孤竹國과 箕子朝鮮의 위치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는 山西省과 河南 일대 이며 이것을 遼東(요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高句麗는 夫餘와 고구리가 결합된 역사 입니다. 다만, 고구리는 夫餘의 嫡統(伯夷)이며 모든 선비족은 夫餘의 傍系 부족입니다. 서쪽 중앙 아시아 평원에서 부터 한반도 끝자락 까지 얼마나 많은 부족이 존재 했을까요. 그러나 五胡十六國 時代 까지 유목만족의 통칭이 胡입니다. 우리는 생각 없이 중원의 종족들은 漢族이라고 생각하지요. 절대로 아닙니다. 고대 漢族은 華夏族에서 유래 했으며 하화족은 東夷族이며 고대에는 종족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 입니다. 대륙에 황제의 후예가 나니 첫 왕조가 강태공의 제나라이며 이후 劉邦의 漢이 황제의 후예가 아닌 왕조 입니다. 한나라는 漢水를 배경으로 형성된 농민들의 나라 입니다, 南方係 漢族 形成의 過程 中原은 유사 이래 끊임 없이 북방민족의 피를 수혈해야 했습니다. 中原의 범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종족을 漢族이라고 지칭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중화인민공화국에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소수"라고 해야 맞는 말입니다. 물론 지구상에 수수한 순혈 혈통의 종족이 존재하겠느냐마는 漢族이란 중국인들이 天子라는 구심점 아래 모이기 위한 "정치적인 修辭(수사)"에 불과한 것이 라는 것이지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혈통적 DNA는 우리 한반도 사람들과 78%의 유사성을 보인 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하면 중화인민공화국 사람들은 북방계 한족들의 혈통이 남방계 혈통과 혼혈을 가져온 결과 입니다. 오히려 우리와 더 가까을 것 같은 일본은 73%라고 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하면 일본은 왜의 혈통이 더 많이 수혈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재의 대한민국 라람들 역시 북방민족과 남방 민족의 혼형종들입니다. 다만 우리는 남방민족과 조금 덜 혼혈이 되었을 뿐입니다. 일본 남부 지역의 혈통은 거의가 남방 민족입니다. 일본이 스스로 倭라고 하듯이 倭의 근본은 長江 유역의 벼 재배 문명의 야요이 문명이며 이들이 고대로 부터 지속적으로 일본 남부에 상륙을 했으며 이들 야요이 문명인들에 의해 일본의 근간을 이루는 것입니다. 남방민족의 중심 종족은 倭로 보입니다.
필자는 최근 까지도 倭를 어찌하여 東夷로 구분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져 왔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까지 倭라는 종족을 장강의 남쪽에 존재하는 나라로 이해해 왔었습니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의 프레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吳越同舟의 古事속의 吳나라와 越나라는 양자강 남쪽으로 비정을 하여 역사를 해석합니다.
단언컨데 거짓이며 중공의 남방공정에 의거한 역사 프레임 입니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위치는 정확하게 지목할 수 없지만 淮水의 남과 북쪽이라는 것만은 분명 합니다.
水經注의 기록에서 자질구레한 하천 까지 기록햇으면서 대륙의 3대하천 중의 하나이며 남방계 한족들의 근간인 회수에 대한 기록이 쏙 빠져 있습니다.
淮水의 기록이 長江의 기록으로 고쳐진 것으로 보입니다. 長江의 남쪽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고 이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는 때는 五胡十六國 時代(304년 ~ 439년) 때입니다. 司馬懿의 西晉이 멸망을 하면서 司馬氏와 그 잔당들이 망명을 떠난 곳이 長江의 하구인 揚子江 일대 입니다. 우리는 揚子江과 長江을 구분 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江"이라는 하천은 상류를 "金沙江" 중류를 "長江" 하류를 '揚子江"으로 구분을 합니다. 즉, 東晉이 揚子江 일대에서 나라를 세우기 전에는 양자강 일대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밀림이 우거진 미개발 지역이엿던 것입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한족의 대부분은 바로 서진의 망명객들과 장강 남쪽의 남방민족의 혼혈들이거나 오리지널 남방계 종족들입니다. 西晉의 북방 문화와 남방 문화가 합쳐지면서 五胡十六國 시대 이후 이 지역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크게 번성을 하면서 선비족의 나라인 당나라가 스스로 무너지는 계기인 五代十國 시대의 혼란을 틈타서 趙匡胤(조광윤)이 남방계 한족 최초로 趙宋을 세우는 것입니다. 소위 한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첫 나라는 劉邦의 漢나라 입니다. 하지만 유방의 한나라 종족은 북방민족이며 북방계 한족의 근본이 지금의 漢水였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漢"이라 했던 것이며 유방의 한나라 사람들을 한족이라하는 것이며 劉邦의 漢나라 사람들은 華夏族인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색으로 방위를 구분했습니다. 지금의 中華人民共和國 사람들의 주류는 南方係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대륙은 화이허를 기준으로 南方과 北方을 구분합니다. 결국 北方係 華夏族은 東夷九族의 하나이며 우리 민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민족입니다. 이 때문에 오리지말 漢族인 孔子를 東夷族이라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춘추전국 시대의 동아시아 지배자들은 유목민족이며 피지배자들은 농경민족인 화하족입니다. 이와 같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게가 화하족의 반란으로 화하족의 나라인 한나라가 세워지면서 화하족은 한족으로 이름이 변경되어 기록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中國의 系譜 기록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유목민족의 통일하는 사람은 淳維(순유)라 불리우는 유목민족의 君長인 冒頓單于(묵돌선우) 입니다, 묵돌선우의 單于와 단군이라는 이름은 다 같이 "유일한 임금"이라는 의미 입니다. 참고 : http://cafe.daum.net/mijiwon/O8wH/247/檀君과 單于 그러나 묵돌선우의 三韓은 漢武帝에 의해 괴멸되면서 유목민족의 각 부족들이 각자도생을 길로 나아가면서 산산이 분열 됩니다, 이후 한나라 무너지면서 위 촉 오 라는 삼국 시대가 도래 하고 서진이 잠시 중원을 장악하지만 서진이 멸망을하면서 오호십육구 시대를 말자 합니다 오호십육국이 타투는 이 혼란 속에서 광개토 태왕과 고려 태왕의 약 100년간 고구리는 중원의 오호십육국을 모두 속국화 했던 것입니다. 고구리는 당나라에게 멸망을 합니다, 唐朝는 고구리와 同種同類이며 夫餘에서 나온 나라 입니다. 즉, 唐朝의 지배자들은 우리 민족 입니다. 당나라가 멸망을 하면서 五代十國의 혼란이 시작 됩니다. 오대 십국 시대의 奚丹(글안)은 오호십육국 시대의 고구리와 거의 같은 모습입니다. 글안은 조선에서 유래 햇으며 宇文鮮卑族(우문선비족)의 후예 입니다. 五代十國의 대부분은 거란의 군사력에 나라의 명운을 걸어야 했던 것입니다. 거란은 燕雲 十六州(遼東)라는 땅을 정통 유목민족의 나라가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燕雲 이라는 용어는 글자 그대로 戰國時代의 燕나라의 영토(山西省 일대)와 묵돌선우가 직접 통치하던 雲中(오도로스 평원)이라는 땅의 합성 용어 입니다. 그후 거란이 멸망을 하고 징기스 칸의 몽골이 세상을 지배 합니다. 몽골이 高句麗를 부르는 이름이 "무쿠리"라고 하지요. "몽골"과 "무크리"는 방언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몽골이 인도에 세운 나라 이름이 "무굴"임을 상기 하기 바랍니다. 이후로도 금나라와 청나라의 여진족은 우리 겨레의 한 갈래 입니다. 1911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청나라로 부터 독립하기 전 까지는 중원은 우리 역사 였으며 우리가 중국이 였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