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힉의 영혼-형성 신정론(Soul-making Theodicy)
- 존 힉,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철학적 이해, 김장생 옮김(서울: 열린책들, 2007) -
1. 악의 문제는 인간이 붙들고 씨름해온 가장 오래되고 여전히 가장 절박한 물음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문제는 무엇보다도 악이 빚어내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여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앙의 근본도전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신정론(神正論/theodicy)은 단순히 근대로부터 비롯된 철학적 탐구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신정론은 일차적으로 고통의 문제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신정론의 문제가 철학과 신학에서 오늘날에도 뜨거운 감자인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학은 ‘지금 여기’에서 제기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응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에 아직까지 신정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없는 형편에 존 힉(John Hick, 1922~)의 저서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철학적 이해.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플란팅가까지 신정론의 역사(Evil and the God of Love)」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원래 이 작품은 1966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야 비로소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비록 이 저작이 신정론에 대한 비교적 최근의 철학적, 신학적 논의를 담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신정론과 관련된 근본문제들을 그리스도교 전통의 맥락에서 심도 있게 추적하고, 또 철학적, 신학적으로 폭넓게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는 결코 낡은 것이라고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이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악의 현실을 경험하는 우리들을 악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대화로 초대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깊다.
2. 존 힉은 우선 악의 문제에 대한 양 극단, 곧 일원론적 사유방식과 이원론적 사유방식은 그리스도교 근본이해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우주를 궁극적으로 조화로운 통일체로만 보는 일원론은 불합리하게도 악의 현실적 지배력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며, 이와 달리 이원론은 선과 악의 대립을 극단화하여 ‘궁극적’ 조화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악의 엄연한 실재와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느님 신앙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인가? 달리 묻는다면, ‘악의 실재’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진술은 과연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이것이 신정론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근본물음이다. 존 힉은 이 물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응답모색의 전형적 유형을 사상사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리옹의 이레네우스 두 교부들의 사상에서 찾고, 그 이후에 전개된 신정론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양상들은 근본적으로 이 두 사상적 전통(존 힉은 빅토르 휴, 토마스 아퀴나스, 아베 샤를 쥬르네, 칼뱅, 라이프니츠, 칼 바르트의 신정론을 일종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 유형으로 분류하고, 슐라이어마허의 신정론은 이레네우스의 신정론 유형에 속한다고 본다)의 맥락 속에 놓여있다고 본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와 이레네우스의 신정론 유형의 차이와 유사성에 대한 존 힉의 비교를 특히 다음의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정리해볼 수 있다.(252-256 참조) 첫째, 악의 존재에 대한 궁극적 책임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은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이 아니라 자유를 잘못 사용한 인간에게 있다고 보는 반면, 이레네우스 전통은 인간이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신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서로 구별된다. 이런 근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존 힉은 이 두 전통이 신의 책임성을 명시적으로 그리고 비명시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을 다루는 방식 내지는 태도가 달랐을 뿐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자유의 오용은 신의 예정 속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신의 궁극적 책임을 배제하지 않았는데, 다만 이레네우스와는 달리 신의 책임성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것을 불손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둘째, 악의 존재에 대한 정당화근거 문제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은 악의 근원을 과거에 발생한 인간(아담)의 타락이라는 원초적 재앙에서 찾고 악을 우주의 충만하고 완전한 조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레네우스 전통에서 원초적 타락은 인간의 연약함과 미성숙에 따른 것으로 보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악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미성숙하고 불완전하게 창조된 인간이 궁극적으로 신의 선한 목적 안에서 완성되기 위해서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악의 허용이 궁극적으로 신의 더 큰 선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 이른바 ‘복된 죄’라는 의미에서 - 두 전통은 서로 동일한 맥락에 놓여있다. 곧 이 두 신정론 전통은 악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궁극적인 조화와 총체적 선함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도 이레네우스 전통이 아우구스티누스 전통과는 달리 창조의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관점을 더욱 분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구원과 영원한 형벌(지옥)에 관한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 있어 두 전통은 서로 상이한 관점을 드러낸다.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서 구원받은 자(구원)와 저주받은 자(지옥)의 분류가 명료하게 나타나지만, 이레네우스 전통은 영원한 형벌(지옥)에 대한 교리가 모든 이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상응할 수 없다는 관점을 보여준다. 셋째, 이 두 전통은 악의 실재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인간의 생명을 위한 환경으로서 적합하게 존재한다는 데 긍정적이며 아울러 우주 안에는 신의 선한 목적이 있다는 가능성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서로 합치된다.
3. 존 힉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이레네우스 두 교부들의 신정론과 그 후의 신정론의 전개양상에 대한 폭넓은 탐구와 비평적 대화를 바탕으로 자신의 고유한 신정론 체계를 구성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이레네우스의 신정론 전통에 입각한 것이다. 존 힉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정론의 근간은 이미 성경에 비명시적으로 함축되어 있으며, 결정적으로 예수의 죽음은 그보다 더 큰 악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악의 문제의 궁극적 최대치를 보여준다. 또한 성경이 보여주는 비명시적 신정론의 핵심적인 의미는 “죄와 고통의 실재들을 깊이 인지한 채 신에 대한 깊은 믿음을 지닐 수 있다는”(259) 점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정론의 일차적 과제는 악의 현실에 직면하여 어떻게 신에 대한 신앙을 형성할 것인지를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믿음을 견지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모색하는 것이다. 곧 신정론의 주된 임무는 악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합리적 신앙의 가능성을 밝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존 힉은 ‘창조-타락’이라는 신화적 틀에서 악의 근원문제를 해석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신정론 전통의 관점은 오늘날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의 과학적, 도덕적 그리고 논리적 비판에 모순 없이 신에 대한 합리적 신앙의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264 이하 참조)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 전통이 지닌 결정적인 한계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인간의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성이 배제된 비인격적인 전제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207 이하 참조) 이런 맥락에서 존 힉은 이레네우스 전통의 관점(인간관과 자유사상 그리고 종말론적 관점)을 수용하여 이른바 ‘영혼-형성 신정론(Soul-making Theodicy)’을 제시한다.
이레네우스는 창조주와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의 인격적 본성을 나타내는 ‘신의 형상(εἰκγων, image)’과 성령을 통한 인간의 궁극적 완성을 의미하는 인간 안의 신의 ‘유사성(ὁμοίωσιϛ, likeness)’을 구별하면서(226), “인간을 신의 형상 안에서 이미 존재하는 도덕적 인격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신과의 유사성을 다 형성하지 못한 존재”(268)라고 본다. 이를 존 힉은 불완전하고 미성숙하게 창조된 인간은 궁극적으로 창조주가 원하는 완전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창조과정 속에 놓여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도덕적 자유와 책임감을 지닌 인간이 ‘개인의 자유를 통한 위험한 모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270) 이런 의미에서 신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의 본질을 나타내는 자유의 개념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존 힉에 따르면 신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를 특징짓는 자유개념의 근본전제는 무한한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적 거리’이다. “인간이 강제되지 않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창조주에게 다가가려 할 때의 핵심인 자유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창조주로부터 인식적 거리를 처음부터 두어야 한다. ... 이것은 ‘마치 신이 없는 것(as if there were no God)’과 같은 자율적 환경 속에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335)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강제되지 않는 인격적 자유를 뜻하며, 죄를 지을 수 있고 심지어 신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제하지 않는다. “죄 - 신중심이 아닌 자기중심 - 는 오직 직접적인 신의 현현이 아닌 환경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오직 실제적인 타락에 의해 증명되는 죄지을 수 있음(posse peccare)의 상태에 의해 전제된 환경 속에서만이 그들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가질 수 있다.”(293) 이는 곧 “도덕적 악은 사실상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도덕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신으로부터의 인식론적 거리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362)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신과의 인식적 거리로부터 비로소 성립하는 인간의 인격적인 자유는 자기중심성을 넘어 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근본조건이요 신의 현존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신은 오직 인간의 자유로운 인격적 책임을 포함한 지식의 양식을 통해서만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며, “그 책임이란 강요되지 않은 해석행위로 구성되고, 우리는 이 세계를 신의 현존을 매개하는 것으로 경험한다.”(294)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세계는 신학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는 물론 그 어떤 형태의 고통 자체에 대한 정당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아무런 고통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고통은 인간의 영혼-형성을 위해 불가피한 인간의 근본현실로써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고통이 없는 ”세상은 자기희생의 미덕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공적 선을 위한 헌신, 용기, 인내, 이해나 정직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될 것이다. ...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과 같은 것이 없는 세상에서는 ...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결코 발전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다.”(337) 이런 의미에서 불의하고 불필요한 고통이 가득 찬 세계는 “역설적으로 모든 더 가치 있는 인간의 인격이 나타나게 된 근거”(338)이며 ”신이 창조한 영혼-형성을 위한 공간“(346)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까다로운 물음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지상의 삶 최후의 순간까지 사랑과 선을 선택하는 자유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혼-형성의 목적이 성취될 수 있으며, 또 궁극적으로 신의 선함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존 힉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의 차원, 곧 믿음과 희망의 영역에서만 신의 궁극적 선함의 성취에 대한 확실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신은 자신을 위해[자신의 사랑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였고, 우리의 전체 존재는 신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완성을 추구한다. 신은 세계 밖에서 세계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 영혼의 자유와 고결한 상태를 지켜주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무한한 시간 안에서 역사하는 무한한 사랑의 근원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피조물은 그 선을 거부하여 끝없는 분노의 길로 가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떻게 신이 궁극적으로 모든 피조된 영혼들을 죄의 올무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사랑 안에서 그 영혼들을 돌보며 신 자신에게 기꺼이 복종할 수 있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패의 논리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신의 성공의 개연성은 나에게는 실질적인 확실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354) ”우리는 어떻게 혹은 언제 신이 현재의 악으로부터 미래의 선을 이끌어 낼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온전히 신의 권능 앞에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삶에 나타난 신의 사랑의 통치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의 실재적인 결과이다.“(368)
4. 존 힉은 이 저작에서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제기될 수 있는 물음들을 거의 모든 차원에서 다루고 있으며 또 그 물음들에 대하여 철학적, 신학적으로 치밀한 숙고를 거친 응답을 제시함으로써 비판적 대화의 장을 제공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신으로부터의 인식론적 거리는 인간 자유의 성립의 근본조건이요 동시에 악의 실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근거이기도 하다는 존 힉의 논리는 신 인식의 문제와 깊은 관련 속에서 제시된다(285 이하 참조). 이 논리에 따르자면 신의 신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책임을 통해서만 비로소 드러난다. 그렇다면 인간의 창조적 완성의 자유를 보증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둘째,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과 인간의 자유의 관계문제이다. 신의 궁극적 선함이 최종적으로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351 이하 참조), 인간의 자유는 과연 온전하고 전적인 자유로 실현될 수 있을까? 존 힉 자신이 강조하듯이 인간의 자유의 본질이 그 누구에 의해서도, 심지어 신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는 자율성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면 왜 종말론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자유는 독립적이어서는 안 되는가? 마지막으로 존 힉의 영혼-형성 신정론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고통문제 - 존 힉도 이 문제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393 이하 참조) - 에 대하여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대답을 시도한다. 그런데 과연 이 종말론적인 차원이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하늘을 향한 고통스런 울부짖음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또 이 종말론적인 차원이 과연 인간의 고통을 빚어내는 악의 현실에 대하여 비판과 저항의 근거로 의미 있고 타당하게 작동할 수 있는가?
첫댓글 때를 아는...그리고 알리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김정용 베드로신부님^^